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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Oct 24. 2024

배가 부를 땐 하늘을 봐

<누벨 바그: 새 물결 프로젝트> 11편

여덟 번째 물결: 하늘 보기 & 밥 해먹기


  

하늘 보고 밥 해먹기. 가장 간단한 물결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꽤... 어려웠습니다. 독자는 이로써 여유와 활력을 갖고 싶다고 말했는데요. 저는 분주한 연말연시의 약속들에 그만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며칠 단위로는 안 될 것 같아 이번 달을 통째로 잡아 생각했습니다. 이번 달 저를 보듬은 하늘과 먹여살린 음식과 부지런한 태도를 담아보겠습니다.



큰 마음을 먹지 않으면 하늘을 보지 않는다. 길거리에 멈춰 서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조용하게 그를 피해갈 테니. 그러나 충분한 목적지를 두고 걷는 와중에 하늘을 본다는 건 결국 먼 곳을 보자는 뜻일 테다. 가성비 좋게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그렇게 플래너에 ‘하늘 보고 밥 해먹기’를 추가한 날. 본격적으로 온 하늘에 먹구름이 꼈다. 곧 비가 온다고 들었다. 인간의 산뜻한 다짐을 비웃기라도 하듯 파랗던 하늘은 자취를 감추고 구름만이... 예쁜 구름도 아니고, 안개인지 아닌지 헷갈릴 만한 모습으로. 메가커피에 출근하는 아침이다. 오늘은 커피 냄새를 맡아도 잠이 깨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하늘을 가장 많이 보는 때가 있다면 그것 역시 메가커피에서다. 상가 코너에 위치한 덕분에, 그리고 마주한 건물 하나 없이 뻥 뚫려있다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바깥만 봐도 하늘을 엿보게 된다. 출근하자마자 분주하게 일하다 9시에서 10시쯤 소강 상태가 온다. 손님도 없고 할 일도 없고 생각도 없어지는 상태. 잔뜩 이완된 채로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찰나의 연속이다. 바깥의 손님들을 구경하다가 너머에 있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본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카페에서 일할 때는 날씨 얘기를 자주 한다. 딱히 할 말은 없는데 말을 시작하고 싶을 때. 어웅, 날씨 너무 좋다~ 하늘 봐~ 같은 얘기. 토픽이나 말투 면에서 나는 엄마들과 합이 잘 맞는다. 평소에도 서준 엄마 혹은 택조 아저씨 같다는 별명을 듣는 나다. 능청스러운 주접. 하늘과 날씨를 두고 우리는 주접을 떤다. 의미 없는 앙탈을 부리고 놀러 가고 싶다는 둥의 말을 한다. 그러나 일이 끝나면 모두들 신속하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안다.


그래도 하늘을 바라보기로 독자와 약속했으니까 며칠간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그 애를 생각한다. 가만히 멈춰선 동네 메가커피에서 하늘을 바라볼 나. 그런 내게 물결을 제안하고 바쁜 서울의 한복판에서 조용히 하늘을 바라볼 그. 우리가 바라보는 하늘은 무척이나 다를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내게 하늘은 멈춰 있는 아침인데... 그에겐 분주히 흘러가는 오후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어제 주현과의 글모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열음의 글은 매서운 추위와 어지러운 연말에도 성실하고 침착하게, 더 깊어지는 중’이라는...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을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내장까지 따수워지는 시간이다. 더 좋은 말만을 해주고 싶어서 우리는 서로를 향해 몸을 틀고 있다. 그의 시선 안에서 나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배송하는 글꾼이 된다. 어쩌면 내 하늘도 빙빙 돌고 있는데 내가 같은 방향으로 빠르게 돌고 있어서 모르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해본다. 나름 열심히 사는 것 같다는 뜻이다.


하늘을 바라보는 일에는 목적도 계획도 필요 없다. 그저 쉬어가는 일. 멈춰서는 일. 생각하는 일.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하다. 계획하지 않으면 하늘을 바라보지도 않는 나다. 하늘을 바라보는 건 이불을 정리하는 일같다. 있으면 좋은 습관, 하루를 바꾸는 조막만한 움직임 정도. 아무 생각도 영혼도 없이 개켜놓고 나면 눈곱 만한 성취감이 올라온다. 털어내는 먼지만큼 작은 일이지만 쌓일수록 부지런한 나를 만들게 되겠지. 잘 정리된 이불이 나와 밤을 연결한다면, 새로운 하늘은 나를 낮과 연결시킨다. 연결감은 쉽게 찾아오는 감각이 아니다. 사소한 데서 미리미리 쌓아두어야 가능하다.



*

이번 달 명예의 음식상을 수여한다면 그건 바로 수육과 두부김치일 것이다. 이토록 김장 시즌이 왔음을 절감한 적이 없었다. 올해만큼은 그래도 김장을 하지 않겠다던 할머니가 기어코. 갓 만든 김치를 부칠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는 전화를 했을 때, 나는 제비다방으로 어떤 밴드의 공연을 보러 달려가고 있었다. 젊음의 최전선에 있을 때 할머니가 나를 불러세운 것이다. 올해도 변함없이 나의 전통을 너에게 줄게. 그 거리에 할머니가 끼어 들었다.


해가 지날수록 할머니의 수고로움을 느낀다. 밥 한 번 차려먹기도 고단한 하루를 살면서 무려 김장김치를 딸아들의 집집마다 부치는 일이 얼마나 고될지 상상도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번만큼은 김치로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끝장나게 맛있게 먹고 싶었다. 그러려면 남들이 김장할 때 꼭 먹는다는 그 수육. 기억에는 없지만 어렸을 때 분명 할머니네서 먹었을 그것을 누리자.


수육을 해먹기란... 월계수잎과 양파와 파와 소주와 (생강과 커피 가루 혹은 녹차와) 통으로 된 돼지고기를 팔팔 끓여내는 일이다. 재료만 준비되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가장 최근에 보쌈을 사먹은 기억이 너무나 아름다웠어서 반드시 앞다리살이 아닌 통삼겹 수육을 만들어내리라, 다짐했다. 부드럽게 살살 녹아내리는 수육을 만들고 말겠다.


메가 언니에게 괜찮은 정육점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가 일러준 곳은 다름 아닌 우리 아파트 정육점. 지나가기만 하고 들러본 적은 없는 그곳이 맛집이라고 했다. 퇴근하는 길에 당장 통삼겹살을 세 덩이 사와서 위의 재료를 모두 넣고 50분을 팔팔 끓였다. 생각해보니 초이레터 초창기에 미디어 디톡스를 시작한 바로 그날이다. 무슨 떡밥을 회수하듯 이렇게 수육의 전말을 공개하게 되다니.


수육은 당연히 성공이었고 우리는 집에서 이런 음식을 해먹을 수 있다는 데 어느 정도 감격했다. 나도... 수육을 잘 할 수 있구나? 생각하며 다른 날에도 또 만들었다. 처음엔 동생과 다음엔 아빠와 먹었다. 매번 두부도 데쳤고, 수육에 김치가 질릴 쯤 두부에 김치를 고이 싸먹었다. 김치만 맛있으면 곁들이는 게 뭐든 상관 없었다. 냉장고에 잘 정리된 김치 네 통을 볼 때마다 할머니의 얼굴이 스윽 밀려온다. 다음 김장철이 오기까지 할머니의 그림자가 이모네와 삼촌네, 총 다섯 집에 걸쳐 있다. 할머니가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면서도 김치를 사먹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생각을 한다.



집밥의 기본이라 불리는 미역국과 제육볶음. 둘다 내 머리에서 나올 법한 메뉴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집에서는 흔치 않은 구성이다. 그러나 불현듯, 집밥의 정수를 차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역시 집앞 정육점에서 사온 소고기와 마트표 돼지고기로 미역국과 제육볶음을 시도해볼 것.


사실 미역국은 생일 단골손님이니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만은 유튜브를 보지 않고 기억에 의존해 만들어보기로 했다. 미역을 불린 후 (사실 불리는 거 맨날 까먹어서 한 10분 전에 대충 담가둔다.) 참기름에 솔솔 볶는다. 그러다 고기를 넣고 함께 볶는다. 약간 탈 것 같이 볶다가 다진마늘 넣고 물 넣고 마악 끓인다... 간장과 소금으로 간 하고 푸욱 끓여내기. 아무래도 내 요리엔 진정성이나 정통성은 없고 마악이나 푸욱 같은 감탄사적 느낌만이 가득하다. 일단 되는대로 해보고 안 되면 다음 번에 다시. 기회는 언제나 내 손에 있다.


제육볶음을 하려고 고기를 미리 사두었는데 벌써 며칠이 지났다. 저녁 약속이 많았기 때문이다. 밖에서 팔 것 같은 집밥 제육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결국 내가 먹을 수 있는 날이 없어서 남자들을 위해 미리 해두기로 했다. 내가 양념을 해서 재어놓을 테니 볶기만 하라고 했는데, 둘이 나를 보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냉장고에 있는 걸 꺼내먹지도 않는데 볶기까지 할 부지런함이 없다고 말하며. 알긴 아네.


아무튼 나는 제육을 해야겠고, 고기는 상태가 점점 나빠질 테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미리 요리해두기로 한다. 내 일정이 모두 끝난 밤에 혼자 부엌에서 뚝딱대며 제육을 만든다. 유튜브 숏츠 선생님을 따라 양념을 계량한다. 고춧가루, 간장, 다진마늘, 설탕, 맛술을 잘 조합하면 모든 한식 양념이 탄생한다. 무엇을 얼마나 넣느냐에 따라 다채로워질 뿐이다. 영상에서 하라는 대로 열심히 따라하고 마지막에 후추 톡톡까지 완성했다. 그게 맛의 킥이었던 것 같다.


아빠에게 한 입 먹어보라고 했더니 맛있는데 싱겁다고 했고, 동생에게 먹어보라고 했더니 그냥 맛있는 것 같다고 한다. 아빠는 언제나 맛이 중요하고, 동생은 내가 밥을 한다는 게 유의미한 것 같다. 맛 감별사의 평가에 따라 간장 양념을 더하고 한 입 먹어본 뒤 냉장고에 고이 넣어둔다. 원래 음식은 하자마자 바로 먹어야한다고 믿지만, 내가 없는 동안 두 남자의 저녁을 책임질 제육을 믿으며 냉장고 문을 닫는다. 이럴 때면 정말 현모양처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사실은 간헐적 조리사일 뿐이지만.



마지막은 최근 가장 맛있게 먹었던 강민경의 애호박찌개다. 애호박...을 단독으로 먹을 만큼 좋아하지는 않지만 유튜브를 보니까 너-무 맛있을 것 같아서 따라해본다. 애호박 한 통을 전부 다 쓰는 레시피였다. 애호박을 채칼로 얇고 길게 썰어 준비한 뒤에 무수히 많은 파를 볶아 파기름을 낸다. 이윽고 돼지고기, 다진마늘, 양파, 당근, 고춧가루를 차례로 넣어 양념이 잘 밸 때까지 자알 볶아준다.


거기에 육수나 물을 붓고 애호박을 투하한 뒤 푸욱 끓여내면 끝이다. 묘하게 짬뽕 같으면서도 국밥 같은 비주얼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류의 국물이라는 뜻이다.) 사실 애호박을 넣은 뒤 너무 오래 끓이면 애호박이 투명해져서 멋이 없어지는데... 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애호박이 녹아내릴 때까지 국물을 우려냈다. 오래 끓일수록 김치찌개처럼 맛이 우러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메인의 형태가 사라지기 전에 불을 꺼버리는 과감함이 필요했다.


밥에 꼭 말아서 먹으라는 선생님의 권고에 따라 국밥처럼 말아 먹는다. 역시 그릇은 친구가 뉴욕에서 사온 주황색 시리얼 그릇이다. 깊게 패여 있는 도자기 그릇이라서 빨갛고 뜨거운 국물을 먹기 제격이다. 이토록 제대로 오용하는 줄 알면 멀리서 사온 걸 후회할지도 모른다. 걔는 이 무지막지하게 무거운 도자기 그릇을 다섯 개나 사왔다고 했다. 다섯 개의 식탁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아쉽게도 이 애호박찌개는 가족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 같다. 제대로 설명을 듣지 않으면 이게 김치찌갠지 무언지 유추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찌개를 만든 직후부터 또 바빠져서 나 역시 챙겨 먹지 못했다. 아마 아빠 한 번, 내가 두 번 먹고 버려졌을 것이다... 다음부터 애호박이 보인다면 꼬옥 장바구니에 넣길 바란다. 집에서도 이연복 씨나 강민경 씨처럼 멋들어지게 짬뽕맛을 낼 수 있을 테니까.



부지런하게 요리하던 날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내가 먹을 식사를 내가 책임진다는 효능감이 있었다. 한 끼를 대충 때우겠다는 마음 없이 수고로운 과정을 거친 음식들. 나의 손으로 만들어낸 무엇들을 먹을 때마다 무표정으로도 기뻤던 것 같다. 집에서도 파스타는 만들어먹지 않는 나지만 집요하게 한식만 건드리는 고집도 그리 나쁘지 않다. 한식집에서 들깨궁채볶음을 먹고 맛있어서, 불린 궁채나물을 1kg씩 사서 들깨에 볶아먹던 날들. 그것도 집에서 나밖에 안 먹으니까 너무 많이 남아서 나영이에게 나눠주던 날들도 있었다.


언제든 나가서 사먹을 수도 있지만 또 언제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무런 음식도 만들 수 없는 날에, 부지런히 요리해먹은 기억이 나를 살릴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쌓아올리는 것들이 있다. 이를 테면 운동하기, 감사일기, 기도하기, 요리하기, 하늘보기 같은 것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 그 모든 걸 해낸 과거의 우리가 스스로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이 물결을 제안한 독자도 분명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틈을 내는 일, 기억하는 일, 일어서는 일. 우리에겐 그 모든 일을 해낼 힘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발송일 2023. 12.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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