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 바그: 새 물결 프로젝트> 12편
아홉 번째 물결: 매사에 ‘그럴 수 있지’ & 감정 표현
그럴 수 있지- 는 마법의 문장인 것 같습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무엇에든 가능하니까요. 나를 지키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이해와 존중이 함께이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뻣뻣해지는 대신 나직이 중얼거리는 겁니다. 그럴 수 있지...
12월 30일과 31일. 2023년의 마지막 이틀을 친구들과 보내기로 했다. 아빠는 태국으로 골프 여행을 떠났고, 동생은 친구집으로 유배를 보냈다. 몇 달 전부터 진즉에 계획된 일이다. 각자의 일상 속에서 각기 다른 포즈로 헤엄치던 우리는 청주시 오창읍으로 헤쳐모였다. 벌써 3년째 우리집에서 연말을 함께 보내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한 연말을 보내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머릿속이 맑았다. 고독도 불안도 외로움도 멍에도 악의도 없이 그저 매일을 보냈다. 첫 출근을 위해 강의를 듣고 마음을 준비하며 메가커피를 마무리하고 있다. 교회 일도 막바지에 다다르고... 그러나 다음주면 이 모든 일상이 전부 새로운 일들로 교체될 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아찔하고 벅찬 감정을 느낀다.
1월 1일부터는 교회에서 조장과 팀장을 맡고... 출판사에서 파트타임 편집자로 일하며... 메가커피는 곧 관둘 것이다. 레터는 끝이 나고, 나는 내 글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글을 만지며 책을 홍보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까. 온갖 새로운 자극에 지치지 않고 용감하게 웃을 수 있을까. 딱히 자신은 없다.
친구들을 기다리며 집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본격적으로 화장실 청소란 걸 처음 해보았다. 깨끗한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에 이곳저곳을 쓸고 닦았다. 애들을 만나기 전까지 청소를 하고, 운동을 하고, 파친코를 읽고, 엑셀 강의를 조금 듣고, 서브웨이를 시켜 먹었다. 오후 1시가 되어도 동생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걔의 잠재력에 놀라며 에그마요와 더블초코칩 쿠키도 함께 시켜주었다.
일어나서 서브웨이를 보자마자 자기 것도 있냐고 물었다.
- 당연하지.
- 쿠키는 무슨 쿠키?
- 더블초코칩.
- 아~ 난 라즈베리 치즈밖에 안 먹는데.
동생 특유의 웃음기 어린 능청이었다. 순간 니가 무슨 쿠키를 좋아하든... 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말로 뱉지는 않았다. 걔가 별 의미 없이 한 얘기에 급발진을 하는 건 나의 오래된 습관이다. 그럴 수 있지... 역시 속으로 생각한다. 내가 시킨 메뉴는 내 로스트 치킨이랑 니 로스트 치킨, 니 에그마요, 니 더블초코칩 쿠키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맛있게 먹는 걸 보면서 준비하고 나왔다.
먼저 오창에 도착한 친구들을 데리고 카페에 왔다. 처음 온 카페에서 셋이 수다를 떨었다. 평소와 같았는데 어쩐지 기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몸이 좋지 않았다. 크게 인지하지는 못했는데 친구가 먼저 말했다. 이미 묘하게 지친 것 같다고... 사실이었다.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얼마나 지쳐있는지는 여전히 몰랐다. 그냥 전체적으로 바빠서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하며 조금 시무룩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쾌하게 발랄하던 날들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 에너지가 다 어디로 갔는지,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애들과 저녁으로 온갖 음식을 시켜먹고 바쁘게 교회로 왔다. 토요일 저녁엔 찬양팀 연습이 있다. 평소에도 8시에 가서 11시에 끝나는데... 오늘은 11시 반이 넘어서 끝이 났다. 교회에 도착한 순간부터 졸렸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엔 찬바람을 맞고 다시 정신이 들었다. 나는 호스트다, 나는 호스트다. 책임 어린 생각도 했지만 무엇보다 끝장나게 즐기고 싶었다. 우리가 모이는 시간이 앞으로는 더 귀중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하니 비에 젖은 내 앞머리를 보고 애들이 조금 가여워했다. 아무래도 땀인 줄 알았던 것 같다. 이전에 지쳐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다시 목소리가 커졌다. 평소처럼 흥분하고 웃으며 떠들었다. 당장 이 시간과 이 애들에게 충실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서로를 놀리고 비난하고 칭찬하고 더러워졌다. 사회적 자아를 던지고 고딩 자아를 되찾는 밤을 보냈다. 새벽 4시까지 소파와 의자와 바닥에 앉아 지금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도 12월의 마지막 날이니까 새해 다짐을 나누어보면 어떨까. 내가 교회에 다녀온 사이 이미 한차례 얘기를 마쳤다고 했다. 나는 그 애들의 계획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에 한명씩 다시 캐물었다. 우리의 공통적인 계획은 튼튼함이었다. 미용 목적이 아닌 건강 목적의 관리...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한 해가 되기를 다들 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었다.
나는 이렇다 할 새해 다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생각하자면 하나 있었다. 우기지 않는 것이다. 나이가 점점 들수록 확신만 드세지고, 내가 틀릴 가능성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이게 맞지 않아? 그냥 이게 맞는 건 역시 없었다. 언제든 열린 사람으로 누구와도 열린 대화를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내가 틀릴 수도 있지. 혹시라는 가능성을 열어두기.
다섯 명 중 믿는 친구 한 명과 함께 우리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다. 오늘은 12월의 마지막 날인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작별을 고하는 날이었다. 5년간 함께한 교회 오빠가 떠나고, 초중고 재수를 거쳐 지금까지 함께 자란 친구가 떠나는 날. 그리고 남자친구가 6년간의 유치부 사역을 마치고 아이들과 작별하는 날. 1년간의 조별 모임이 끝나는 날. 교회의 작별은 느린 듯 빠르다. 함께 지내는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는데, 저 떠나요... 하고 고하는 순간, 마지막이다. 보통은 마지막 날에 공식적으로 떠난다는 소식을 전한다.
그 사람들이 없는 교회가 상상되지 않아서 상상하지 않는다. 비워지는 일이 슬프다. 모두가 남았으면 좋겠고, 모두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에겐 언제나 이별이 있다. 기다리고 있는 이별을 인지하느냐 잊고 사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잊고 사는 편을 택하면 후폭풍을 맞을 것이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에게 이별은 늘 갑자기, 코 앞에 와 있는 무엇이 된다.
그래도 오랜 친구와 함께 예배하는 순간이 너무 감사했다. 믿게 된 지 오래 되지 않은 애였다. 걔는 내가 찬양을 엉망진창으로 할 거라고 예상했나보다. 다 끝나고 나오니까 내 음정이 정확하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맨날 정준하 창법으로 이상한 노래만 부르는 나를 보다가... 본격적으로 손 들고 찬양하는 나를 보니 얼마나 어색했을까. 걔의 오해와 무지가 턱없이 웃겼다. 역시나 그럴 수 있지.
걔는 내가 교회적 자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생각해도 목소리가 한층 올라가는 것 같다. 에너지도 최대, 리더십도 최대, 인간성도 최대로 끌어올리는 순간이 아닐까. 다시 교회적 자아를 내려놓고 애들과 카페를 가기로 했다. 어제 먹은 수많은 음식이 아직도 우리 속에 가득했다. 이 애들과는 항상 허용치 이상의 음식을 먹게 된다. 모두가 공평하게 과식을 하고 공평하게 괴로워한다. 그런데도 항상 식폭행이 반복된다. 이제는 나이를 생각하자는 말을 누군가 했다. 벌써 내년이면 스물 여섯이 될 것이고 우리가 만난지도 햇수로 10년이 될 것이다. 10년 친구. 그래도 아직 짧다.
서로와 떨어져있는 모든 순간에, 즉 혼자의 일상을 살아내는 와중에 우리는 서로를 생각한다. 자주 그리워하고 웃겨하고 그래서 말하고 또 연결된다. 어떤 날에는 별다른 카톡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공백이 하루를 넘기지는 못한다. 누군가는 꼭 말을 하게 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못 배기기 때문이다. 미지의 일상을 서로에게 털어낸다. 털어내는 동시에 가벼워진다. 말하고도 덜어지지 않은 것들은 기다린다. 어차피 바로 다음 사람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른 삶을 전해듣는 동안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비워지고 채워지고를 반복하며 9년을 보냈다.
*
애들을 각자의 집으로 보내고 난 후에 오늘로 유치부 교사를 내려놓은 오빠를 만났다. 그에게 해야 할 두 가지 이야기가 있었다. 하나는 이미 내가 알던 것이고, 하나는 몰랐지만 말해야 하는 것이다.
유치부 아이들이 오빠에게 서른 개의 꽃을 전해주었다고 했다. 선생님이 마지막 날이라고, 그 작은 손에 꽃을 한 송이씩 들고 선생님에게 달려왔다. 선생님 사라매요~ 그 외침을 들은 오빠는 그대로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리고 그 영상을 보는 나도 울었다. 울 수밖에 없는 영상이었다. 오빠를 위로해야 하나, 아니면 응원해야 하나, 칭찬해야 하나, 안쓰러워해야 하나.
모든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6년을 돌보고 사랑한 아이들과의 만남이 이제는 계획에서 지워졌으므로. 그는 아주 슬플 것이다. 다음주부터는 청년부 회장이 될 것이다.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꽃을 받은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다 다시 눈물을 흘릴 뻔했다. 누워있는 오빠의 등을 조금 쓸어내며 고생했다고 말했다. 6년이라는 시간이 하루 아침에 접히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애들을 생각하며 사진을 들여다보고 기도하겠지. 그 마음이 예수님의 사랑을 닮았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이별이 없지만.
나는 계획적으로 오빠의 등을 쓸어주었지만, 오빠는 아무런 이유 없이 언제나 내 등을 쓸어내린다. 쓸기보다는 토닥거린다. 잘할 거라고 말한다. 그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때 나는 말했다. 나 사실은 일 시작하는 거 설레지가 않고 떨려. 설렜으면 좋겠는데 떨려. 내가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르겠고,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눈을 감고 조용히 말했다. 일을 시작하는 게 너무 감사한 일인데, 설레지 않는 게 어쩐지 슬펐다.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 일이라는 건가. 회사에 가기로 한 순간부터 직장인에 가까워진 걸까.
생각해보면, 2023년 한 해를 이틀 안에 마무리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애들과의 연말 모임에서, 교회에서, 오빠와. 시간이라는 건 그렇게 개운하게 열고 닫히는 일이 아닌데도. 갔나? 싶으면 벌써 가 있고, 왔나? 싶으면 벌써 와 있을 것이다. 또 어느 날엔 간 줄 알았는데 아직 멀었고 이미 온 줄 알았는데 아직 멀리 있을 테다.
확실한 소식은 없고 나는 여전히 자신이 없지만, 언제나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 한 크게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확실하지 않은 것들 중에 그래도 조금은 확실한 것들에 자주 기댈 것이다. 미지의 2024년이 코 앞에 와 있다. 시간이 무참히도 흐르는구나. 새해를 시작하는 새 마음이 필요하다. 돌아보니 마지막 물결인 감정 표현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모든 물결과 세월을 통틀어 가장 큰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아빠한테 사랑한다고 카톡하기. 어쩌면 이 말을 하기 위해 이 레터를 시작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레터를 보내며.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이 궁금합니다. 어떤 새해를 계획하고 계신가요. 거창하게 새해라고 하기에는 그저 몇 시간 뒤 내일일 뿐이지만요. 몇 가지 물결은 레터에 담지 못했습니다. 시도하지 않는 게, 혹은 본격적으로 도전하지 않는 게 도전 자체인 물결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물결도 잊지 않았고 소홀히하지 않았음을 기억해주시고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모든 독자의 의견과 요청과 대답과 자본과 마음에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초이레터는 다시 돌아옵니다! 여러분 덕분에 가장 영광스러운 12월을 보냈습니다. 또 만나요.)
발송일 2023. 12.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