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 바그: 새 물결 프로젝트> 10편
일곱 번째 물결: 나보다 더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동하기
나보다 더 행복했으면 하는 존재가 있을까요. 생각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독자의 부지런하고 폭 넓은 요청에 따라 나보다 '더' 행복했으면 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기로 했습니다. 가장 크고 두텁고 가까운 두 사람을 떠올렸습니다. 아빠와 오빠입니다. 여기서 오빠는 남자친구를 말합니다. 두 사람에 대해서는 매일 생각하지만 오늘만은 생각의 깊이와 밀도를 달리해보기로 합니다.
내게 가장 성실하게 묻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건강, 나의 안부, 나의 마음에 대해. 근면함과 끈기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아빠에 대한 글만 쓰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아빠의 글도 쓰는 날이 오고, 이제는 아빠가 아닌 글만을 쓴다. 나의 근원이자 기쁨이고 슬픔이자 이야기인 그에 대해 더는 할 말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브런치북에서 모든 말을 쏟아낸 후로는 그를 넘어선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 썼다.
어떠한 시점에서부터 아빠를 전혀 미워하지 않게 됐다. 무작정 쓰고 잠잠히 기다리던 중에 그렇게 되었다. 집에는 항상 그가 있었고, 매일 안부를 물었고, 그게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가 부당하며 내 것과는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그것과 새롭게 부딪힐 일도 없었다. 갈등에 쏟을 에너지를 다른 데 썼다. 그저 집을 지키는 아빠의 이미지만이 남았다. 집과 아빠가 연속적인 개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내 생각에 아빠의 행복은 안정감에서 오는 것 같다. 이를테면 자신이 좋은 사람이라는 안정감, 살 만한 돈을 벌고 있다는 자각, 딸 아들이 잘 자라주었다는 확신 같은 것. 보통은 함께 사는 사람 혹은 가까운 사람과 대화하거나 바라보면서 느껴야 마땅한 감정들이다. 심심하고 나른한 저녁 나절에는 얻기 힘든 생각들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혼자인 저녁이다. 적당히 어두운 안방의 안락 의자에 누워 스포츠 중계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그런 날들. 대부분의 저녁이 그렇다.
딸 아들이 집에 있을 땐 각자 방에서 시간을 보내더라도 일종의 환기가 된다. 아들이 아빠의 방을 간헐적으로 찾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그냥 방에 들어와서 침대에 누워 있고, 어떤 날은 자랑을 하러 오고, 어떤 날은 떼를 쓰러 온다. 집에서 그를 찾지 않는 건 딸이다. 사실 딸은 누구도 찾지 않는다.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고요해지기만을 바라는 듯하다. 그럼에도 딸은 거실에서 많은 일을 하는데 표정은 매번 비슷하다.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티비를 본다. 그 애가 무엇을 하는지는 대충 보면 알 수 있지만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빠는 내게 묻는다. 보통은 경제적 지원 같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하는 편이지만 질문으로 딸의 인생에 직접 개입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지금 뭐하냐고 묻지는 않는다. 밥은 먹었어, 내일은 수원으로 출근하는 거니, 여행은 언제 간다고, 정도이다. 상세한 대답을 원하는지 아닌지 헷갈린다. 그의 물음 앞에서 나는 밥만 잘 챙겨먹으면 괜찮은 애, 취업에 가까운 애, 매번 어떻게 잘 놀러다니는 애가 된다. 그의 앞에서 한껏 축소되었다가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껏 확장된다.
내가 수원에서 면접을 보게 됐다고 카톡으로 전했을 때 아빠는 엉 승아, 라고 답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그게 네가 하고 싶은 일인 거지, 라고 물었다. 바로 어제는 수원을 가는 게 맞냐고 확인했다. 그리고 오늘 아빠는 몇 달 전부터 계획되었고 몇 주 전부터 우리에게 택시를 불러달라고 말했던, 태국행 비행기를 타러 갔다. 정확히 수요일 네시에 택시를 불러달라고 했는데 나는 그게 화요일인 줄 알고 그렇게 적어두었고, 정확히 수요일 네시에 면접을 보기로 했다.
그래서 콜택시 번호를 알려주고 수원으로 떠났다. 면접을 끝내고 나오자마자 오빠와 통화한 뒤에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면접이 어땠는지 말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가 택시를 잘 탔는지 묻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의 통화에 내 면접 얘기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잘 끝났다고 말했던 것 같다. 아빠가 돌아오는 날은 1월 3일 정도인데, 정확히 그쯤 결과가 나올 것이다. 일주일 정도 기다리면 된다고 했으니까... 면접 소식과 함께 그가 돌아올 것이다.
그는 내 인생에 늘 물음표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그걸 표현하지는 않고 간직만 하는 것도 같다. 아주 가벼운 물음만이 그의 입에 가득하다. 그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스물 다섯 해를 지켜본 결과 우리 아빠는 사소한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대체로 그랬다. 외할머니에게 전화해서 이번 명절엔 못 간다고 말하기도 어려워했으니까...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엔 주저하지 않는 사람임을 안다. 혼자서 어떻게든 우리를 키워낸 게 그렇다. 단 한 번도 우리 앞에서 무너지지 않고 울지도 않고 거의 두려워하지도 않고, 그는 항상 집이자 아빠이자 어른이었다. 늘 여자친구가 있었던 아빠가 재혼을 하지 않는 이유도 단 하나, 우리 때문이라는 걸 안다. 나는 그가 자기의 행복 앞에 주저하지 않고 용기를 냈으면 한다. 그게 어떤 모습이든 나는 조용히 바라보다 물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니까 그게 아빠가 하고 싶은 일인거지?
*
두 번째 인물은 오빠다. 돌아보면 그가 행복하지 않은 순간을 목격한 일이 별로 없다. 그는 실로 춤을 추는 사람이며 자존감으로 가득 차 있고, 회복 탄력성도 좋다. 스트레스를 받긴 하지만 그닥 오래 지속되는 것 같지는 않다. 상했을 법한 음식을 먹어도 덜컥 소화를 해낸다. 음식만이 아니라 일, 사람, 마음의 문제도 비슷한 속도와 가능성으로 소화해낸다.
그런 그에게도 임계점이 있다. 음식을 먹을 때도 명확한 한계가 있다. 그 이상 먹으면 탈이 날 것을 알고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리밑 혹은 변곡점 혹은 마지노선이라고 하자. 적당한 선까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특정 선을 넘기면 입을 연다. 회사 사람들이라고 예외는 없다. 그걸 충동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화가 분출되는 시점이 그닥 이른 것 같지는 않으므로... 그저 선이 있는 사나이다.
지난 월요일, 그러니까 크리스마스에 오빠를 만났다. 함께 9시 예배를 드리고 오빠는 유치부 사역을 위해 교회에 남고, 나는 교회 앞 카페에서 면접 준비를 하기로 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좋았다. 무엇보다 우리는 곧 오마카세에 준하는 무엇을 먹으러 갈 것이었다. 성경 일독 내기에서 진 오빠가 사기로 한 것이다.
이번주에는 둘다 약속이 있어서 제대로 만날 수 있는 날이 월요일뿐이었다. 그래서 이번 물결로 오빠가 요청한 '승희가 남자친구 말 잘 듣기'를 실현해 볼 계획이었다. 일단 만나야 말을 잘 들을 수 있으니까... 고분고분이가 되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의 말을 잘 들어보려고 했다. 잘 듣는 게 잘 듣는 거지 뭐!
모든 게 착착 굴러가고 있었다. 예배와 사역, 면접 준비, 그리고 오마카세까지. 회와 고기를 좋아하는 우리의 취향에 딱 맞는 음식들을 차례대로 받아 먹었다. 게살계란찜, 회, 참치 가마구이, 초밥, 스테이크, 온소바, 레몬 소르베까지... 황홀한 마음으로 먹다가 디저트를 받아들 때쯤 교회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사역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거기서 둘의 생각이 갈라섰다.
우리가 싸울 일이 아닌 일로 싸우기 시작했다. 가게에는 우리뿐이었고 사장님은 이미 우리에게 피날레 디저트를 제공했기 때문에 시야에 안 계셨다.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나는 소리 없이 눈물을 닦는다... (진상 손님같지만 참을 수 없었다.) 정말 잘 먹었는데도 오빠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차로 간다. 그래도 사장님께는 잘 먹었습니다, 속삭인다... 진짜 맛있었으니까.
차에서 우리는 몇 분간 고요하다가 다시 몇 분간 언성을 높인다. 눈을 부릅뜨고 말한다. 어떤 말은 서로를 보지 않은 채로 말한다. 그럼에도 그 말들은 우리의 가슴을 푹푹 찌르기 위해 들어온다. 비껴가는 말은 없다. 사랑 싸움이라는 게 그렇다. 진짜 중요한 말들은 온데간데 없고 쓸데없이 아프기만 한 말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러니 애시당초 싸울 때 말을 조심해야 한다. 안 싸우는 게 가장 좋긴 하겠지만.
우리는 잠시 화해했다가 다시 싸운다. 내가 며칠 전의 일을 다시 들먹였기 때문이다. 어떤 지점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다. 어떻게 해야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전의를 상실한 채로 집에 갈까, 하고 말한다. 나는 집에 가기는 싫지만 어딜 가고 싶지는 않으니 대답하지 않는다. 다시 침묵... 얼마 뒤 그가 거룩한 마음을 먹고 내 손을 잡는다. 우리 기도하러 갈까. 나는 여전히 눈물이 마르지 않은 채로 그러자고 한다.
단 한 번 내게 물었다. 기도하러 가겠냐고. 무엇보다 결정적인 물음이었다. 우리에게 공통된 믿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행복의 본질이 하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더욱이 요즘 기도의 덕을 보고 있는 오빠 덕분이다. 묵묵히 기도를 쌓아올리는 일이 얼마나 값진지도 우리는 알고 있다. 기도는 누가 대신해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한 커플이 아닌 두 개인으로 마주한다.
그러나 오늘만은 예외로 함께 기도하기로 한다. 예배당에 도착한 나는 여전히 울먹이고 그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다. 나는 불 꺼진 예배당까지 왔으니 따로 기도하고 회복하자는 건 줄 알았는데, 그는 같이 기도하자고 말한다. 그가 기도를 시작한다. 늘 하던 대로 감사부터. 그리고 지난한 회개. 나는 감사에서부터 울고 있고 그는 회개에서부터 울기 시작한다. 울지 않을 수 없는 기도를 한다.
그의 기도가 끝날 쯤 내가 말문을 연다. 하나님, 우리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내가 기도하는 순간에는 둘 다 울지 않는다. 이미 폭풍이 우리를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잠잠해지는 동시에 충만해진다. 예배당을 나서는 우리에게서 더 이상 슬픔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다들 기억할지 모르겠다. 오빠를 만나 오마카세를 먹고 대차게 싸운 이 날은, 다름 아닌 크리스마스이며 남자친구 말 잘 듣기- 물결을 실행하는 날이라는 것을. 무언가 시도하기도 전에 보란듯이 실패한 물결은 처음이었다. 완벽한 실패다. 가장 쉽고 재밌는 시도가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의 오만이었다. 하나님은 꼭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나를 전복시키신다.
아직도 두 사람이 나보다 '더' 행복했으면 한다고 자신하기는 어렵다. 마음은 비슷하지만 온전히 내게서 나온 문장은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문장을 빌려서 내 사람들을 비춰 본다. 이건 사랑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빠와 오빠는 본인들보다 내가 더 행복하기를 바라줄 것도 같다. 우리가 주고받는 사랑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낀다.
그러니 오늘은 사랑에 관한 시를 조금 빌려와 글을 맺어야겠다... 김민정 시인이 이슬아 작가의 결혼을 축하하며 쓴 축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둘이 사는 내내
사랑이 떠들썩한 치장이 되지 않기를
둘이 사는 내내
사랑이 굳건한 의리가 되기를
그리하여 둘이 사는 내내
사랑이 당신 둘에게만 늘 자랑이기를
<사랑>, 김민정
(이 물결을 요청한 독자도 아빠와 비슷한 특색을 가졌습니다. 공연장에서 원하는 노래를 외칠 만한 용기는 없지만 제게 글쓰기 모임을 제안하고 사람들에게 우리 어서 만나요, 를 독촉할 용기는 있습니다. 어쩌면 진짜 용기는 그런 사람들이 가진 게 아닐까요.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건 큰 행운입니다.)
발송일 2023. 12.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