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열음 Oct 10. 2024

묘미, 취미, 별미

<누벨 바그: 새 물결 프로젝트> 7편

네 번째 물결: 해야 할 일로 가득한 하루 vs 하고 싶은 일로 가득한 하루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어떤 비율로 정하고 지내며 살아가시나요.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전부 집어삼키지는 않았나요. 독자님의 흥미로운 요청 덕분에 하루를 채우는 일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시간이 무척 다르게 흘러가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첫 번째. 해야 할 일로 가득한 버전.


5:05 기상


5:13 새벽기도 출발


미라클 모닝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수요일에 아주 중요한 공모의 결과가 나와서인지 파렴치하게도 기도하고 싶었다. (당선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닌 내 마음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라는 기도지만) 되든 안 되든 하나님의 선하신 방법대로 나를 인도하심을 '믿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하는 순간에는 나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생각했다. 졸린 와중에 아픈 사람, 슬픈 사람, 바쁜 사람을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은 곧 기도로 이어진다.



6:35 집에 와서 컵라면 하나 때리기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어쩐지 정신이 점점 맑아진다. 어젯밤에 오빠가 한 말을 기억한다. 바쁜데도 맑아. 이토록 맑은 정신이라니. 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어떤 분께 선물을 받았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는 말씀이 적힌 종이다. 노란 에이포용지에 말씀을 프린트해서 코팅까지 하신 것이다. 오빠도 이전에 같은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분의 서류가방에 노랗고 빳빳한 종이들이 가득할 거라고 생각하니 무척 귀엽고 따숩다.


오늘은 알바를 가는 날이다. 보통 때라면 7시 15분에 겨우 일어나서 세수하고 렌즈 끼고 옷 입고 나가는데, 오늘은 한 시간이나 여유가 있으므로 아침도 먹고 샤워도 하게 되었다. 정말이지 호사스러운 아침이다.



7:33 카페 출근


날이 무척 추워져서인지 사람이 진짜 없다. 점심 시간에 아주 잠깐 몰린 정도... 8시부터 3시까지 일하는 건데 지루해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같이 일하는 분과 함께 지루해해서 좀 나았던 것 같다. 바쁜 날이 있으면 지루한 날도 있어야 하는 거라고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한다. 함께 일하는 언니와 먹는 얘기만 잔뜩 하다가 퇴근했다.



15:00 퇴근


15:20 피부과 출발


16:05 피부과 도착


오늘로 피부과도 종강이다. 벌써 10번째 방문이다. 평소에도 알바 끝난 후 바로 가는 편이다. 가기 전에는 피곤하고 배고파서 몽롱한 채로 갔다가, 끝나고 나면 아파서 정신이 번쩍 들어 돌아온다. 갈 때도 올 때도 온전한 마음은 아닌 듯하다.


마지막 관리인데 팩을 올려두고 곤히 잠들었다가 방귀를 뀌면서 일어났다. 레이저 치료도 없고 피곤해서 방심한 탓이다... 잠결에 뀌고 일어난 거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묘하게 웃음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얼굴이 빨개진 것도 같았지만 어차피 얼굴엔 팩이 있었다. 이제 안 볼 사람들이니까... 하면서 다시 잤다.


마지막 관리를 받고 나오기 전에 다시 실장님을 만났다. 피지는 많이 가라앉았지만 홍조는 여전히 남아있다고. 홍조에 안 좋은 것은 급격한 온도 차이, 매운 음식, 카페인이라고 한다. 매운 음식도 없고 커피도 못 마시면 인생을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거냐고... 한탄하며 돌아왔다.



17:20 버스 타기 전 땅콩빵 구매


겨울 길거리 간식은 꼭 해야만 하는 일에 포함된다. 땅콩빵과 호두빵을 '섞어'로 구매해서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맛나게 먹었다. 입에서 김이 나왔다. 손이 시려운데 빵이 너무 따뜻해서 괜찮았다. 150만원어치 피부과 관리보다 2000원짜리 땅콩빵이 더 기쁜 게 우습다.



17:45 버스 탑승


19:00 집 도착 후 저녁 먹기 (테레비와)


20:06 티비 끄기...


보통 알바와 피부과가 함께인 날엔 집에 와서 푹 쉬었다. 쉬는 시간도 물론 필수적인 일이지만, 해야 할 일들로 가득한 하루에서 티비 보다 잠들었어요~ 할 수는 없으니까. 대신 내일 강릉으로 여행을 가기 위해 맛집을 찾기로 했다. 네이버 지도에 가득한 맛집/빵집 목록만 봐도 마음이 풍족한 저녁이다.



21:00 영상 편집 시작


21:34 영상 편집 마무리


교회에서 성탄절을 준비하고 있다. 작년에는 치어리딩이었고, 올해는 연극이다. 나는 산타 모자를 쓰고 춤을 추는 이벤트 사원 역할을 맡았다. 우리의 연극 전에 공개할 영상을 편집했다. 사진만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영상이라 금방 끝날 것이었다.



21:55 밀리의 서재 보려다 말기


왠지 종이책을 펼칠 기력이 없어 밀리의 서재로 책을 보려고 했는데... 벌써 구독 만료다. 읽고 쓸 기력이 더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 강릉 여행 짐을 싸고 잠들기로 한다. 지난주에 부산을 다녀온 참이라 짐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파란 에코백이었는데, 이번엔 민트색 백팩을 챙겼다. 당일 아침에 챙겨야 할 목록은 화장품, 충전기, 충전된 아이패드, 렌즈통. 어딜 가든, 언제 가든 직전까지 쓰다가 챙기는 것들은 따로 있다. 이미 몸에 밴 것들이라 따로 적어두지 않고 자도 될 것이다.


해야 할 일을 미리 해놓는 것의 기쁨. 원래는 자기 직전에 기도하는데, 아침에 이미 하고 왔으니 저녁엔 간단하게만 한다. 아침에 기도했는데도 생각나는 사람들, 생각나는 일들, 빼먹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오늘은 아빠가 (오랜만에) 두통으로 앓아누웠기 때문에 그를 위해서도 기도한다. 오늘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기도뿐이다.



하루를 보내고 보니 시간을 굵직하게 써야 하는 일들(알바, 피부과) 때문에 금방 흘러갔다. 휴식도 해야 하는 게 맞는데, 시간과 마음을 정해두고 쉬는 게 쉽지는 않다. 그건 평소에도 그랬다. 약속이 있는 날이나 놀러가는 날을 쉬는 날로 치고, 나머지는 항상 뭐라도 해야 하는 날이다. 그래놓고 모든 걸 매일 해내지는 못하니까 문제지만. 아무튼 쉬는 날도 지정이 필요하다.



*

두 번째. 하고 싶은 일로 가득한 버전.


강릉으로 2박 3일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아주 추운 강릉 바다를 보고 먹다가 이야기하다가 돌아올 것이 뻔했다. 그래서 아주 기대가 된다.



9:00 기상


9:45 운동


10:00 샤워


10:15 화장


10:25 식사


많은 것을 먹고 오게 될 것이기 때문에 운동을 꼭 하고 싶었다. 15분짜리 짧은 운동이라도 효과가 좋다. (한혜진 루틴 추천) 기상해서 운동하기까지 45분이 뜬다. 저런 빈틈이 자주 있을 텐데 모두 계획되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카톡이나 유튜브, 각종 인터넷을 하는 순간이다.


아침으로 호박죽 다섯 입과 두부 김치 세 조각을 먹었다. 어제 아팠던 아빠가 먹은 호박죽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먹지 않을까봐 포스트잇으로 '승아! 죽 먹어도 돼요' 하고 써 두었다. 원래 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몇 입 먹었다. 먹다 보니 물려서 어제 저녁에 먹던 두부 김치를 꺼냈다. 시간만 있었으면 고기를 구워먹을 뻔했다. 하고 싶은대로 사는 하루가 어쩌면 먹고 싶은대로 먹는 하루가 될지도 모르겠다...



10:40 강릉으로 가는 터미널로 가는 버스 탑승


11:05 시외버스 탑승


13:45 강릉 하차


버스 안에서 심심할까봐 영상을 몇 개 저장해두었는데 침 흘리며 자고 나니 도착이다. 간밤에 그렇게 오래 잤는데도 잠이 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서울에서 오고 있는 친구는 버스가 더워서 힘들었다고 한다. 강릉에 도착하니 배터리가 20퍼센트라고... 감기도 걸린 녀석이 바닷 바람을 맞고 더 아프면 안 될 텐데.



14:20 팔도전복해물뚝배기 도착


우리는 '팔도'전복해물뚝배기를 선택했다. 바로 근처에 비슷한 뚝배기 집이 하나 더 있었다. 그곳을 견제하듯 곳곳에 우리가 원조라는 안내가 붙어 있었다. 화장실 벽에도... 정말이지 간곡한 설득이었다. 뚝배기를 기다리는데 비지엠으로 찬양 반주가 흘러나왔다. 마치 수요예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식사를 기다렸다.



15:20 오션뷰 카페 도착


강문 해변을 바라볼 수 있는 카페를 골랐다. 미리 골라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나와 친구 모두 와본 적 있는 곳이었다.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그만큼 무난했던 곳이다. 겨울 바다는 아주 춥지만 안에서 바라보기엔 너무 좋았다. 평일에 오니 바다가 보이는 자리가 많았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으로 몸을 붙여 앉았다.



16:20 인스타와 카톡, 남은 여행 계획 짜기


여행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우리는 각자 할 일이 있으므로(그런 여행을 계획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노트북과 패드를 펼쳤다. 워케이션이라는 단어가 없을 때부터 워케이션을 꿈꿔온 우리였다. 지난 제주도 여행에서도 비슷한 시간을 보냈다. 할 일이 따라오는 여행.


강릉에 오기 전부터 맛집 목록을 저장해두었는데, 오고 나서도 새로운 곳들이 계속 추가되었다. 그다지 촘촘하지는 않지만 나쁘지 않은 계획을 세워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계획을 세우는 동안 네이버 지도 앱을 몇 번이고 열어보며 즐거워졌다. 내겐 지도를 살피는 순간까지 여행에 포함되는 일같았다.


현재 시간 17:42. 곧 숙소로 돌아가서 배낭을 벗고 저녁을 먹을 것이다. 오늘 저녁은 돈까스, 숙소는 교동이다. 숙소 바로 앞에 유명한 교동짬뽕과 장칼국수가 있는 걸 보고 감격했다. 피부과에서 먹지 말라고 한 모든 음식을 잔뜩 먹고 돌아가겠지만 후회는 없다. 오늘 말고도 어차피 하고 싶은 일로 가득한 하루일 테니까.



이틀을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경계가 참 불명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그런 해를 보내고 있다. 여행하고 글쓰고 사람 만나고 돈 버는 해. 시작하기 전에는 두 편이 아주 다를 거라고 예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내겐 하고 싶으면서도 해야 하는 일이 있고, 해야 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반 가르듯 척척 구분되는 일들이 아님을 느낀다. 글을 쓰고 기도하고 알바하고 피부과 가고 맛난 걸 먹고 친구를 만나고.


결국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 수 있는 건 내 주변 사람들의 믿음과 지지 덕분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빠가 나를 기다려주고, 잔소리하지 않으며, 조용히 카드를 건네주기 때문이고. 오빠가 나를 믿어주고 기다려주기 때문이고. 애들이 함께 고민해주고 들어주고 말해주기 때문이라는 걸 느낀다. 사랑과 믿음은 결국 하나로 이어지니까. 내일의 공모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도 비슷하다.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도 인생이 망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 하나면 충분할 것 같다.



발송일 2023. 12. 1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