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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열음 Oct 24. 2024

그건 고민거리도 아냐

내게 일어난 일을 모두 소화하고 싶어서 이 글을 쓴다. 자칫 우연이나 불행으로 치부될 뻔한 조각들을 그러모아 하나님의 작품으로 완성하기 위해서 산다. 그 이름 안에서 나는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피하는 정도의 자유가 아니다.


엄마와 같이 가슴에서 혹이 발견되었다고 해도 마침내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내 자유다. 이 자유는 품이 크다. 어떤 고난과 고비를 만나도 망하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분과 동행한다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줄 안다.


조금은 솔직해지자. 솔직히 매순간이 행복하지는 않다. 지금도 툭 튀어나온 배를 마주할 때마다 암울하다. 아래를 내려다볼 때마다 압박 붕대를 두른 가슴보다 둥그렇게 튀어나온 배가 더 거슬린다. 압박 붕대는 이미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수술을 마친 어제부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으니까.


수술을 마친 직후에 남자친구에게 카드를 쥐여줬다. 길 건너편에 있는 크리스피 도넛을 다녀오라는 미션이다. 사실은 아침을 먹고 싶은 그를 위해서였지만 도넛을 생각할수록 마음이 가빠졌다. 수술을 마친 내게 필요한 건 이불도 배려도 생수도 아닌 도넛이다. 도넛과 커피가 있다면 혹이 잘 떼어졌을 뿐만 아니라 자그마한 절개 부위도 곧 봉합될 것이다. 곧 새살이 돋아날 테니까.


결국 오빠는 크리스피 두 박스를 사왔고, 한 박스는 간호사님들께 전해졌다. 센스가 좋은 오빠 덕분에 남은 입원 시간 동안 간호사님들께 의기양양해질 수 있게 되었다. 어쩐지 도넛 이전과 이후로 간호사님들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그 도넛들을 열심히 먹다가 가슴보다 배가 더 나오게 된 것이다.



가슴에서 혹을 발견한 건 고작 일주일 전이었다. 엄마의 유방암 전력으로 인해 3년 전에 첫 검진을 받았다. 혹시 몰라 일찍부터 받기 시작한 검진이었다. 그때 의사 선생님은 내게 호르몬이 아직 많이 분비될 때니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라고 했다. 그가 권고한 기간은 2년, 그러나 시간은 역시 무참히도 흘렀고 첫 검진 이후로 방심한 나는 그보다 1년 더 늦게 검진을 받게 되었다.


내 가슴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던 의사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물혹이라고 했다고요? 아닙니다. 조직 검사 하셔야 돼요."


여기서 조직 검사를 한다는 건 두 가지 경우를 의미했다. 암이거나 아니거나. 악성 혹이라면... 암일 테고. 양성 혹이라면 떼어내면 된다고 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3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아닐 거라고 믿었지만 혹시 맞다고 해도 담대하게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거듭 되뇌었다.


그러나 조직 검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흘린 눈물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건 아빠와 승우와 오빠의 것이었다. 남을 사람들의 슬픔을 짐작하니 감당하기 어려웠다. 결국 길바닥에서 눈물을 질질 흘렸다. 그러면서도 계속 걸었다. 일단은 출근을 하는 중이니까,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빠와 승우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다행히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배가 나온 것 외에는 크게 상심하지 않고 있다. 검사 결과는 양성 혹이었고 350만 원짜리 수술도 어제자로 잘 마쳤기 때문이다. 이제는 실비 보험과 회복만 남았다. 둘다 중요한데 어쩐지 전자가 더 간절하다. 젊음을 과신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엔 이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건강 검진을 주기적으로 받으라고 진실한 눈으로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내일은 새로운 독서 모임을 시작한다. 입금할 때까지만 해도 되게 설렜는데, 막상 직전이 되니 굉장히 귀찮다. 가는 길이 멀어서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자신 없는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편집자로 일하면서 책 이야기가 자신이 없으면 어떡하지. 그게 내 약점이다. 하는 일을 덕질하지 않는 것... 책을 좋아하지만 책과 거리를 두고 싶다. 퇴근하고 나면 비생산의 영역으로 자꾸만 밀려난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서 영상을 본다. 봤던 것을 또 보고 또 본다. 일하는 것 외의 모든 것을 덕질하는 것도 같다.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읽기와 쓰기를 미룰 수 없다. 수술 다음날이라는 이유로 대표님이 무려 한시간 반이나 일찍 퇴근을 시켜주셨기 때문이다. 집에 와서 씻고 밥을 먹고 영상을 세 시간이나 보았는데도 9시다. 남은 3시간 정도는 읽고 쓰면서 쌓여온 죄책감을 달래려 한다. 글이 죄책감이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되지 않는 이상은 어쩔 수 없는 일같다.


일단은 암이 아니고, 배불리 먹었고, 3시간이나 놀았고, 할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한다. 압박 속옷을 입었지만 답답한 붕대는 아니고, 수술비가 350만 원이나 들었지만 실비 처리를 할 테고, 금요일에 본가로 내려가는 차편을 놓쳤지만 토요일 오전을 자취방에서 보낼 수 있으니...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어디까지 뻗어가시려나. 당장은 그것을 발견하는 재미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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