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요즘 화가 늘었나 봐

by 최열음

아빠와 차에서 대화라도 한 날은 소재가 넘쳐나는 날이다. 오늘은 다소 표현이 부족한 아빠와, 분위기 메이커 역할에 지친 딸이 함께 퇴근길을 통과하며 나눈 대담을 적어보려 한다. 차 안에 갇혀 있으면 무슨 말이든 하게 된다. 가벼운 스몰 토크든, 면전에 대고는 할 수 없는 속 깊은 이야기든. 어쨌든 운전석과 조수석이 면전은 아니니까… 오늘 아빠와의 대화는 그 중간쯤에 머물렀던 것 같다. 나는 수업 때문에, 아빠는 배가 고파서 지쳐 있던 탓이다.


평소 뻥뻥 뚫리는 퇴근길을 통과하는 아빠는, 나를 픽업하느라 한층 복잡해진 교통 상황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나는 그런다고 해결되지 않을 일에 열을 내는 아빠가 화병인가, 생각했다. 최근 아는 유튜버가 화병 진단을 받았다는 것을 보고 그게 생각보다 흔한 질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빠는 사소한 데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었고, 아빠와 함께 하는 나는 화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화가 나면 빙빙 돌려 툴툴대는 식으로 표출했다. 평소라면 입을 꾹 다물고 속으로만 짜증을 냈을 테지만, 오늘은 용기를 내어 소신 발언을 했다…


아빠 요즘 화가 늘었나 봐?


이마저도 별 일 아니라는 듯 웃음으로 끝을 털어버렸다. 그는 조금은 당황한 듯했다. 아빠에게 예상치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나면 왠지 모르게 뿌듯한 마음이고... 아무래도 내가 호락호락한 딸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아빠가 맘대로 화를 쏟아내도 될 만큼 만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그리고 아빠는 집에 오는 내내 심기가 불편했는데, 그 이유는 배고픔 때문이었다. 오늘도 집에 당도하자마자 아빠는 씻을 테고, 나는 손만 빨리 씻고 주방에 들어설 것이다. 만약 내가 손 놓고 소파에 앉아있다면… 아빠는 씻고 나와 찡그린 얼굴로 ‘저녁은… 뭐 어떻게 하나?’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쉽게 책임감을 느끼는 사람이고... 아주 피곤한 날이면 후자처럼 뻔뻔하게 굴겠지만 웬만한 날에는 전자의 딸이다. 누구에게도 답을 구할 수 없다면 스스로 답을 내야 하지 않나. 그렇게 14년이 흘렀다.


내게 아빠의 배고픔은 책임의 대상 같다... 아빠는 우리의 경제를 책임지고, 나는 아빠의 식사를 책임진다. 동생이 군대에 간 지금, 우리를 이어주는 유일하고 암묵적인 계약이다. 물론 입 밖으로 꺼낸 적은 없지만 암묵적인 약속이 더 과중하다. 나는 오늘 저녁으로 바질페스토 파스타를 만들 생각이었다. 집에 가면 재료 손질부터 면 삶기까지 착착 해내겠다는 계획으로. 그러나 파스타를 해 먹자는 나의 말에, 그걸로 배가 찰지 모르겠다는 대답을 들었다. 진짜 얄미웠다…


그러나 나는 굴하지 않고 오늘의 밥상을 성공적으로 차려냈고, 책임감 충족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아빠와 나는 서로의 책임을 다했다. 아빠가 꿈꾸는 평범한 가족의 모습에 조금은 가까워진 것도 같다. 밥을 다 먹고선 그 자리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유퀴즈를 보았다. 방송에서 본인의 현재 상황을 5글자로 표현하라는 과제를 받은 할아버지가 ‘너무 심심해’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며 깔깔 웃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는 언젠가 서로의 심심함을 해결해 주는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아직은 아빠의 심심함까지 책임지기엔 벅차지만. 책임감이라는 건 달성할수록 새롭게 가지를 뻗어가는 것 같다. 나의 사랑의 형태가 책임감에서 끝나지 않고, 즐거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먹여야 해서가 아니라 그냥 먹이고 싶은 마음은 언제쯤 생겨날까. 잘 먹이고 싶은 마음만큼 명확한 사랑이 없는 것 같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