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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에서 Sep 19. 2021

깨시피 마섭써요

우리 눈에만 보이는 경계

 초급에서 형용사를 배울 때 학생들은 ‘맛있다’ [마따]라고 읽은 후에 ‘맛없다’도 자신 있게 [마섭따]라고 읽는다. 그렇지. 맛있다[마따]니까 당연히 맛없다[마섭따]라고 생각하겠지. 한국어를 발음할 때 이렇게 생긴 걸로만 판단하고 발음하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깻잎이 맛없어요’라는 문장을 보고 외국인 학생이 [깨시피 마섭써요]라고 읽었다. 홍시 맛이 나서 홍시 맛이 난다고 말했던 어린 장금이처럼 책에 ‘깻잎이 맛없어요’라고 쓰여 있어서

[깨시피 마섭써요] 연음 그대로 읽었는데 뭐가 문제인가.      

 ‘깻잎이 맛없어요’를 우리가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건 한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만 보이는 경계가 있어서 그대로 연음 하지 않고 ‘깻잎’ [깬닙]으로, ‘맛없어요’ [마덥써요]로 읽는다.     

 

 대학원에서 발음 과목을 수강할 때 조별 발표에서 우리 조는 ‘ㄴ첨가’를 맡았다. 그때도 발표 자료를 준비하면서 ‘ㄴ첨가’외국인 학생들이 배우기에 너무 어려운 발음 규칙이라고 생각했다. ‘박물관’[방물관]으로 발음되는 것처럼 원래의 발음이 바뀌거나 ‘괜찮아요’ [괜차나요]가 되는 것처럼 발음이 사라지거나 ‘축하’ [추카]가 되는 것처럼 두 발음이 축약돼서 발음되는 것은 그래도 약간의 예상은 되는데 ‘ㄴ첨가’는 없던 ‘ㄴ’ 발음이 갑자기 생긴다.


 ‘신촌역’ ‘강남역’도 쉬지 않고 역 이름을 붙여서 한 번에 말하려면 ‘ㄴ’ 발음을 넣어야 한다. ‘ㄴ’을 안 넣어 읽으면 [신초녁], [강나멱]이 되어 버린다.

요즘 많이 듣는 유행어 ‘이게 머선 일이고(이게 무슨 일이고)?’ ‘무슨 일’도 ‘ㄴ’ 발음을 넣어야 [무스닐]이 아니라 [무슨닐]로 제대로 발음할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발음을 넣어서 발음해야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어려운데 심지어 ‘할 일이 많다’라고 할 때 ‘할 일’ ‘ㄴ’ 발음이 첨가되어 [할닐]이 된 다음에 ㄹ과 ㄴ 발음이 만나서 [할릴]로 유음화가 된다. 내가 외국인이면 좌절할 것 같은 지점이다.    

  

 나는 한국어 발음이 쉽다고 생각했다. 중국어처럼 성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악센트나 억양이 강조되는 언어도 아니고 영어처럼 연음 되면서 발음이 많이 바뀌는 것도 아니라서 배우기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세세하게 들어가면 알아야 하는 한국어 발음 규칙도 많아서 한국어를 공부할 때 발음이 어렵다고 하는 학생도 있다.

 어떤 외국어든 글자를 보고 정확하게 읽을 수 있고 자연스럽게 발음할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노력을 많이  사람이다. 부단한 연습과 학습의 결과이니 인정을 해 줘야 한다.     

 

 나는 성조가 있는 언어는 배울 엄두가 안 난다. 중국인 유학생들이 계속 늘어나던 시기가 있었다. 중국어를 조금 알고 있으면 일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았지만 중국어는 발음을 배우기 어렵다고 들었다. 중국어 성조 4성을 학생에게 부탁해서 들어봤지만 내 귀에 다 비슷하게 들려서 그걸 구분해서 말할 자신이 없었다. 성조가 달라지면 다른 단어가 된다고 하니 성조까지 외워서 정확하게 써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한동안 중국인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러 많이 오다가 다음에는 베트남 학생들이 오기 시작했다. 베트남어를 배우면 수업 자료에 베트남어 글자도 입력할 수 있고 앞으로 베트남 학생들이 늘어나면 베트남어를 아는 것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베트남어를 배워 본 사람이 성조가 중국어보다도 많다고 해서 포기했다. 4성이 아니라 6성인가 아무튼 더 많았다. 쉬는 시간에 학생들이 베트남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바쁜 일이 있는 사람처럼 굉장히 서둘러서 빠르게 말한다. 사실 천천히 말했는데 내 귀에 그렇게 들렸을 수도 있다. 모르면 빠르게 느껴지니까. 소리도 높아졌다가 낮아졌다가 변화가 있는 것 같았다.


 요즘 집에서 요가 매트를 깔고 유튜브를 보면서 폼롤러 마사지를 하고 있는데 강사가 ‘여기는 평소에 안 쓰는 근육이라서 시원하실 거예요.’라는 말을 자주 한다. 정말 평소에 쓰는 근육만 쓰나 보다. 그런 곳을 마사지하면 아프면서 시원하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내가 지금까지 안 하던 방식으로 발음을 해 볼 수 있다. 안 쓰던 근육을 쓰는 것처럼 처음 해 보는 방법으로 발음을 하는 것은 많이 낯설지만 새롭고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소 밋밋한 한국어의 억양이나 높낮이 차이 정도에 익숙한 나는 위아래로 많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성조를 넣어 말할 자신이 아직은 없다. 당분간은 쓰던 근육만 쓰고 하던 방식으로 발음하며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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