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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에서 Sep 18. 2021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기차 하드, 꿈 큰

 어떤 작가가 고민 상담을 해 주면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대학생에게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럴 때는 가장 급하지 않은 일부터 하세요. 그러면 그 일을 하는 동안에 급한 일은 이미 못하게 되어서 할 일이 줄어듭니다.”


 나는 이 답이 마음에 쏙 들었다. 내가 능동적으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못하게 만드는 평화롭고 세련된 방법. 가끔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목록이 길어지면 정말 이 방법을 써 버릴까 하는 충동을 느낀다.


 해야 하는 일은 보통 하고 싶지가 않은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면 일찌감치 해 버려서 해야 하는 일로 분류될 틈조차 없을 것이다.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일찍 해 버리고 마음 편하게 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루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면 금요일 숙제를 금요일 오후에 하고 주말을 맞는 사람과 일요일 밤에 하는 사람. 나는 후자이다.

 어릴 때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숙제였는데 지금은 숙제 검사가 되었다. 특히 작문 숙제 검사나 작문 시험지 채점은 해야 하지만 하기가 싫어서 자꾸 미루는 일이다.

 

 외국인이 쓴 글을 읽고 글을 고치거나 평가를 하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하고 고민도 많이 된다.

 외국인 학생들이 쓴 글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먼저 번역기와 함께 쓴 글이다. 2021년 도쿄 올림픽 태권도 종목에서 은메달을 딴 스페인 선수의 도복 검은 띠에는 '기차 하드, 꿈 큰'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훈련하다'라는 뜻의 'train'이 '기차'로 번역되고, '열심히'를 뜻하는 'hard'가 발음 그대로 '하드'로 잘못 번역되었다. 큰 꿈을 이루려는 의지도 매끄럽게 번역되지 못했다. 그래도 그 문구는 운동선수가 적어 놓은 짧은 문구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상황을 이해하고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  

 외국인에서 잘못된 번역이 긴 문장으로 자주 나오거나 앞뒤 맥락을 모르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나오면 무슨 말을 하려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기차 하드, 꿈 큰'의 글 버전을 읽어 내기 위해 나는 그 근원을 찾아 파파고에 학생이 쓴 문장을 그대로 쳐 본 적도 있다.


 두 번째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는데 어떻게 고쳐 줘야 할지 난감해지는 글이다. 그대로 쓰면 전달이 안 되기 때문에 고쳐 줘야 하는데 그러자니 문장이 거의 다 바뀔 것 같다. 학생이 쓴 표현을 조금이라도 남겨 주고 싶어서 훼손된 문화재의 원형을 복원는 장인의 심정으로 이렇게 저렇게 문장을 바꿔 본다.


 세 번째는 학생이 쓴 글을 읽긴 다 읽었는데 문법도 많이 틀리고 내용 연결도 잘 안 되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경우다. 이럴 때는 집중해서 다시 읽어야 한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같은 부분에서 또다시 막혀서 정신이 혼미해지지만 정신을 붙잡고 끝까지 읽어 내야 한다. 얼마 전 학생의 작문 과제를 읽다가 '그러던 어느 날'이라는 표현이 나와서 내가 놓친 부분이 있는 줄 알고 처음부터 다시 읽었지만 '그러던'에 해당하는 어떤 행위도 나오지 않아 허탈했다.


 마지막으로 맞는 글자보다 틀린 글자의 비중이 현저히 높은 글도 있다. 반사적으로 철자 오류 수정을 하고 공장 생산 라인에서 부품 넣듯이 조사 끼워 넣기를 하며 앞을 향해 전진하면 글이 끝나도 뭘 읽었는지 내용을 모른다. 이럴 때도 다시 읽어야 한다. 이런 글은 빨간 볼펜으로 내가 쓴 글자가 너무 많아서 내 지분이 못해도 50%는 된다. 공동 창작물에 가깝다.


 작문 과제를 확인할 때 한 두 장을 다 읽으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된다. 괜히 창문도 열어보고 화장실도 들른다. 줄어들 리가 없는데도 남은 종이는 왜 자꾸 세게 되는지 모르겠다. 가끔 이게 뭐지 싶을 정도로 의식의 흐름대로 쓴 글이 나타날 때가 있다. 힘겹게 그 의식의 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단순히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학생이 모국어로 같은 내용을 쓰더라도 좋은 글긴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잘 쓴 글도 있다. 작문 주제에 맞게 깔끔하게 잘 쓴 글을 보면 감탄한다. 내용도 좋고 표현력도 좋은 완성도 높은 글을 쓰는 학생들이 있다. 흥미로운 글도 많다. 유럽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에세이를 자주 쓰고 자기 생각을 글로 표현할 기회가 많다고 들었는데 유럽 학생 중에 흥미로운 글을 쓴 학생이 많았다. 매 학기 같은 주제에 대해 학생들이 글을 쓰기 때문에 글의 내용이 비슷하다. 내용도 비슷하고 전개도 비슷한 경우가 많은데 정형화된 구성이나 내용이 아니라 참신한 내용을 자유롭게 쓴 글을 읽게 되면 반갑고 재미있다.  


 일거리를 집에 가지고 가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하는 동료 선생님이 있다. 내가 작문 뭉치를 주섬주섬 가방에 넣고 있으면 항상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그거 가져가게요? 어차피 그대로 들고 올 거 같은데 뭐 하러 가지고 가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요.”

 동료 선생님도 아는 결과를 내가 모를 리 없지만 혹시 모른다며 나에게 작은 희망을 걸고 가져간다.

우리 집에서 하룻밤 잠만 재우고 올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방이 조금 더 무거우면 마음이 조금 덜 무거워서 일거리를 싸 가는 수고를 종종 한다. 


 일 중에서 가장 손이 안 가는 작문 뭉치를 집에 가져오면 우선 가방을 방 한구석에 두고 외면한다. 그러나 못 본 척을 해 봐도 가방에 든 학생들의 글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고 기한 내에 읽어야 한다.

 우리가 기계라면 '한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의 분량 x 시간'으로 계산해서 일을 끝내는 데 걸리는 시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감정과 기분과 몸의 컨디션 등 여러 요소에 영향을 받는 인간이라서 기계처럼 일정한 능률로 일을 할 수 없다.

       

 학생들의 글을 읽을 때 일을 지속하기 위해서 순서 배열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도저히 못 읽겠다 싶은 학생의 글이 제일 윗장이 되면 엄두가 안 나기 때문에 그런 글은 뒤로 뺀다. 잘 써서 쉽게 읽히는 학생의 글을 매력적인 표지처럼 제일 앞에 두고 차례차례 난이도를 높여가며 배열하면 조금 낫다. 안 일어나고 끝까지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일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커피를 옆에 두고 이걸 다 마실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겠다, 과자를 다 먹을 때까지는 일어나지 않겠다, 유튜브 광고 없음 노래 모음을 틀고 노래가 끝날 때까지 나는 일어나지 않고 이 글을 다 읽을 거라고 다짐한다.  




 하기 싫은 일은 자꾸 미루고만 싶지만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라서 미뤄 봤자 소용이 없다. 장소를 옮겨서 다른 곳에 갖다 놓아도, 시간을 들여 숙성을 시켜 보아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있다. 그냥 마음을 단단히 먹고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안 일어나야 끝이 난다. 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는 빨리 끝내고 ‘끝난 일’로 만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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