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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에서 Aug 24. 2021

생활의 달인이 될 수 없는 직업

나름의 장점도 있다

늘 새롭다


 시간이 지난다고 다 익숙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교실에 들어가는 생활을 꽤 오래 했는데도 개강 전에는 언제나 긴장되고 다들 나를 빤히 보고 있으면 힘들다.

 학생들도 앞에 있는 나를 안 볼 수는 없겠지만 내 동선을 따라 학생들의 시선이 이동하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땀이 난다. 주목받는 건 왜 늘 새롭게 힘들까?

 개강 날 그린 작품 - < 나만 봐 >2012년 作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해야 하는데...

 학생들 앞에 서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말하면서도 10년을 넘겼을 때 누가 그랬다. 10년이나 했으면 적성에 맞는 거라고. 땀은 계속 나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는 말이었다.   


생활의 달인은 될 수 없다


 ‘생활의 달인’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어떤 일을 몇십 년 한 사람은 눈을 감고도 순식간에 일을 해치우는 놀라운 모습을 보인다. 나도 20년 가까이 이 일을 했으니 짧지 않은 세월인데 나는 그런 기술 보유자가 되지 못했다. 사람이라는 변수가 존재하는 직종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기계처럼 똑같이 할 수도 없겠지만 내가 똑같이 하더라도 상대가 달라지니 반응도 결과도 자연히 달라진다.


 수업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서 내가 생각한 대로 된다는 보장이 없다. 수업 준비를 아무리 많이 해도 준비한 보람 없이 끝날 때가 있다. 그래도 준비가 덜 되면 불안해서 수업 준비는 최대한 열심히 해 두는 편이다. 오래 일했지만 새로운 수업을 맡으면 나는 아직도 긴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매번 반복되는 개강인데도 개강을 앞두고 잠이 잘 안 오는 것을 보면 일을 그만둘 때까지 불안감과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쉬지도 않고 장기근속을 할 거면 생활의 달인으로 등극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해야 했. 쓱 잡으면 밥알의 개수가 동일한 초밥의 달인, 기계처럼 면을 쭉쭉 뽑아내는 수타면 달인, 죽은 가방도 살려 내는 수선의 달인 등. 일을 해 온 시간과 분량, 노력에 비례해서 숙달도와 실력이 향상 직업이 부럽다.  


알게 모르게 훈련이 된다 


 이 일을 오래 하면 약간 발달하는 것이 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과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학생에게 질문을 하고 내가 대신 답을 해 버리면 내 한국어만 쓸데없이 유창해지니 답답해도 기다려야 한다. 대답을 듣기까지의 길고 긴 시간. 성격 급한 내가 일할 때만큼은 없던 인내심이 생긴다.

 

 처음에 일한 한국어 학원에는 취미로 한국어를 배우는 어르신들이 많았다. 거기에서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들 수업을 많이 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개인 수업에서 만난 7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젊은 학생들과는 배우는 속도가 매우 달라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그때 나는 20대였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서 공부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몰랐다.


 개인 수업이라서 대답을 기다려 줄 수 있지만 학생이 할 말을 생각해서 그것을 한국어로 말하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이 길어지면 답답했다. 그러나 내가 조금이라도 초조해하고 답답해하는 것 같으면 학생들은 답하는 것을 포기하고 안 하려고 했다. 그래서 안 그런 척하는 연기가 나날이 늘었다. 마치 내일까지도 기다릴 수 있다는 평온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매일 일하다 보니 실제로도 기다리는 것이 점점 견딜 만해졌다. 여러 명이 함께 듣는 수업에서는 그러기 어렵지만 개인 수업에서는 대답을 기다려 주고 다른 부분에서 시간을 조절하면 된다. 한국어로 대답을 완성할 수 있게 도와주고 기다려서 들어주는 것이 나의 일이다.     


 무언가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과 처음 접하는 사람의 입장은 다르고 두 사람이 체감하는 시간도 매우 다르다. 가르쳐 주는 사람은 내가 이렇게 여러 번, 천천히, 오랫동안 설명했으니 이제 상대방이 알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한다. 배우는 사람은 한 번 들어서 모르겠고, 설명이 빠르게 휙휙 지나가고, 금방 끝나서 모르겠다고 한다. 분명 같은 시공간에서 벌어진 일인데 같은 설명, 다른 느낌이다.


 한국어를 가르치다 보면 내 설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설명하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다. 설명을 들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 지난 시간에 배운 것을 모두 잊어버리고 오는 경우, 이렇게 쓰면 틀린다고 방금 말하자마자 쓰지 말라고 한 대로 쓰는 경우 등등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은 매일 생긴다. 반복해서 설명하는 것도 나의 일이다.      


 에 가서  써 먹을 수 있다


 서울에서 지내다가 지방에 있는 집에 한 번씩 내려가면 엄마가 스마트폰을 가지고 와서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지난번에도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것을 물어보셔서 마치 데자뷔 같지만 처음 하는 것처럼 설명을 시작한다. 설명이 끝나고 엄마 표정을 봤는데 어두우면 다시 반복. 말을 조금 바꿔서 몇 번 더 한 후 스마트폰을 돌려 드리고 자, 이제 엄마가 한번 해 보시라고 한다. 내가 해 주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나는 곧 서울로 갈 것이고 내가 없을 때 엄마가 혼자 하실 수 있어야 한다.

 누가 시간을 돌린 것처럼 내가 설명을 시작하기 전과 같은 상태일 때가 대부분이다.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재미있게 봤다. 주인공이 ‘타임 리프’ 능력을 이용해 조금 전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신기하고 부러웠는데 집에 내려가면 나도 시간을 달린다.


 괜찮다. 내가 집에 상주하는 딸이라면 짜증스럽겠지만 나는 집에 없는 날이 더 많은 딸이고 간헐적 효도는 쉽다. 그리고  비록 생활의 달인은 못 되었으나 밥 먹고 하는 일이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고 다시 설명하는 일이다. 일한다고 생각하자. 외국인도 가르치는데 엄마는 한국어 듣기도 완벽하게 되시지 않는가. 


 새로운 것을 겁 내고 시도해 보지 않으려는 어른들도 많은데 엄마는 새로운 문화에 관심이 많고 배우고 싶어 하신다. 스마트폰도 먼저 가지고 싶다고 하셨다. 언젠가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 나이가 들면 설명을 들어도 빨리 빨리 이해가 안 된다고, 나이 든 사람이  다섯 번  정도 설명을 듣는 게 젊은 사람들이 한 번 듣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다섯 번이 한 번이다.

과학적 근거는 없으나 경험자가 그렇다고 한다.


 혹시 부모님께 뭘 가르쳐 드리다가 짜증이 올라오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면 좋다.

 

지금 이게 외국 문화처럼 낯설고 설명이 외국어처럼 들릴 수 있으며, 나는 아직  한 번도 설명을 안 한 것과 같다.
네 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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