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약과 저녁 약. 처음에 병원을 다닐 때는 아침, 저녁으로 약을 정량만 꼬박꼬박 먹었다.
가족들은 우울증도 약을 먹으면 감기처럼 낫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약을 꼬박꼬박 먹는데 왜 힘드냐, 정신력이 약해서 그런 것이다.라고 종종 얘기했다.
나는 그런 말에 늘 상처를 받았고, 나아진 척을 하면서도 나아지지 않는 내가 싫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나는 약의 양이 적은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생각만으로 멈췄어야 했는데, 나는 자연스레 약을 두 봉지를 한 번에 먹었다.
사실 당시 두 봉지의 약을 먹었을 때는 뭐가 달라진 거지? 하고 생각할 정도로 처음에는 그리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확연히 달랐다.
가족들의 상처 주는 말을 똑같이 들어도 내 불안한 심경이 이상하리만큼 편안했다. 아빠의 큰 고함 위로, 나를 부르는 이름이 들려와도, 아, 부르네? 하고 넘겼다. 그 기분이 편안했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아침과 저녁 약을 아침에 한 번 몰아서 먹었다. 사실 저녁때는 가족들이 건들 일이 낮보다는 적었기에 두 봉지를 낮에 먹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다. 2주에 한 번꼴로 병원을 찾아가 약을 탔고, 의사 선생님에게는 꼬박꼬박 약을 잘 챙겨 먹고 있다며 거짓말을 했다. 물론 가족들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와중에도 아빠는 내게 빨리-빨리-를 끊임없이 재촉했다.
어떤 일을 하던,
“왜 빨리하지 않았느냐. 아직도 안 하고 뭐 했냐, 왜 전화는 안 받냐, 당장 전화받아라.” 등의 재촉을 했고 나를 점점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약 두 봉을 한 번에 먹는 거로 해결이 되지 않는 날도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세 봉지의 약을 뜯어먹었다. 두 봉지를 한 번에 삼켰을 때와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됐다. 그것은 일종의 필름이 끊기는 현상이었는데, 내가 한 행동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약에 취한 사람처럼 혀를 꼬부리지도, 헛소리를 하지도 않고, 걸음걸이도 똑바로 걸었다. 그렇게 나는 겉으로만 봤을 때는 점점 멀쩡한 내가 되어 하루를 살아갔다.
약을 세 봉지씩 먹기 시작한 순간부터, 매일 같이 아빠의 재촉으로 불안과 공포를 지니며 지냈던 날들과 다른 날들이 이어졌다. 기억하지 못하고, 가위로 싹둑 기억을 잘라내듯 없어지니 순간이동을 한 듯 기분이 좋았다.
아무 기억도 못 한 채 살아가는 것이 불안에 떨며, 우울한 밤을 지새우고, 눈물과 함께 잠을 자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삶보다 편했다. 모두에게 그것이 가장 옳은 방법은 아닐까? 어쩌면 나의 영혼은 없이, 나의 몸만 움직이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평범한 착한 딸로 살아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세 봉의 약을 먹었던 처음 며칠간은 그 약들이 괴로운 시간을 싹둑 잘라주었다. 그러나 그것도 며칠뿐이었다.
내가 약에 취해 무의식에 잠식되어 있을 때, 아빠는 고함과 재촉하는 말로 무의식에 잠식된 나를 의식으로 꺼내왔다. 아빠는 내가 또다시 괴로운 현실을 마주하도록 만들었다.
가슴이 쪼이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이렇게 뛰다가는 곧 심장이 멈출 것 같이 불안에 떨었다.
나는 정확히 내가 왜, 무엇 때문에 다섯 봉지 이상의 약을 내 입에 털어 넣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세 봉지로는 부족했고, 네 봉지는 확실하지 않은 거 같았다.
아마도 나는 확실하게 기억을 지우고, 나를 무의식의 저편으로 보내고 싶었던 것 같다. 그저 나는 편안해지고 싶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