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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치 Mar 25. 2024

착한 우리 딸, 엄마가 너만 믿는 거 알지?

착한 아이증후군

세명의 자녀 중에 둘째 딸로 자랐다. 엄마는 항상 내게 양보하라고 했다. 당연히 욕심이 있는 어린아이이고, 자주 언니와 싸웠다. 엄마는 둘이 알아서 하라는 편이었다.


문제는 아빠가 있을 때 싸우게 됐을 때였다. 아빠는 우리가 언성이 높아지면 자기가 더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분노조절장애는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


"애새끼들이 시끄럽게 뭐 하는 거야?

부모 복 없는 놈은 자식복도 없다고 조용히 안 해?"


강압적인 말투, 폭언을 자주 했다. 그것이 잘못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눈이 뒤집혔다. 눈이 뒤집히면 보이는 어떤 물건이든 집어던졌고, 다리를 부러뜨린다거나 죽인다는 말을 했다. 칼을 가져오려고 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죽을힘을 다해 방으로 도망쳤다. 방으로 들어가 온몸으로 문을 닫고 잠갔다.

그 문을 아빠가 힘으로 열려고 하거나 방문을 발로 찼기 때문이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쾅쾅거리는 소리와 어린 남동생에 놀란 울음소리 떨리는 목소리로 사과하는 나의 음성이 집안을 가득 채웠다.

아빠가 조용해지길 바라며 방 안에서 울면서 빌었다. 우리가 들어가면 엄마는 씩씩거리는 아빠를 진정시켰다.  엄마는 그런 아빠를 말리는데 온몸을 써야 했다. 아빠가 화를 낼 때면 집안은 살얼음판이 되었다. 발걸음이라도 크게 냈다가는 또다시 아빠가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심장이 머릿속에서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쿵쾅쿵쾅 -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언니와 내가 싸운 이유는 고작 이어폰이 누구 거냐?라는 문제였다. 그런 작은 문제에 아빠는 왜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큰소리가 나고, 자신의 신경을 거슬렸다는 이유하나로 물건을 집어던지고 화를 냈다. 그렇게 화를 내면 엄마는 아빠에게 잘못했다고 빌라고 했다.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라고 했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와 파르르 손가락부터 소름이 돋았다. 언제 분노할지 모를 아빠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사죄하였다. 그렇게 아빠에게 가서 사죄를 하고 나면 아빠는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하며 아침밥을 먹었다.

출처 : 핀터레스트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나는 뒤끝이 없어. 기억도 안 나."


상처를 받은 건 아빠를 제외한 모두였다. 아빠는 밖에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똑같아졌다. 그런 날은 아빠의 기분에 맞춰 방 안에서 속닥이거나 공부를 하는 척을 해야 했다. 아빠에게 쉽사리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아빠를 '왕'이라고 불렀다.

폭군이었다.



우리 가족은 모두 아빠를 무서워했다. 엄마는 자녀 중에 의지할 사람을 찾았던 것 같다. 그 타깃은 나였다.

엄마는 내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착한 딸이니까 양보하자.
착한 딸이 엄마 도와줘.
엄마가 누굴 믿어. 우리 딸 믿지.

나는 그 말들이 정말 내가 착해서 그런 줄 알았다. 한편으로 엄마가 불쌍하기도 했다.

언니는 고등학생이라 야간학습을 했고, 남동생은 너무 어렸다. 그래서 언니가 있는데도 집안일을 혼자 도맡았고, 남동생을 돌보는 일도 당연하게 내가 했다. 늦둥이를 낳은 엄마는 젊은 엄마들을 따라가기 힘들다는 이유로 자주 아줌마들 사이에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로 데려갔다.


6살, 7살의 아이들 모임에 14살 여자아이.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나는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관심도 없는 과학박물관, 역사박물관을 따라다녔다. 겨울이면 엄마 없이 어린 남동생을 데리고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썰매장을 갔다. 엄마는 내가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매번 칭찬을 해줬다.


"착한 딸 덕분에 엄마가 너무 편했어. 고마워."


칭찬을 받으면 그날 내가 힘들었어도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점점 엄마의 역할을 대신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집안일을 대신하는 것에서 6살 남자아이를 키우는 육아까지 담당하고 있었다. 막냇동생이 아닌 막내아들이 생긴 것 같았다. 지금도 나는 내 동생에게 내가 너를 키운 거야.라고 말한다.


"동생 수학 좀 가르쳐줘. 채점도 해주고."


언젠가부터 싫어. 안 해.라는 단어를 내뱉을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알겠어. 할게. 그리고 시키지 않아도 이제는 자동적으로 남동생을 놀아주고, 한글을 가르치고, 책을 읽어주고 있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이 당연해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어린아이들이 싫다. 14살 청소년이지만 아직 관심이 필요했던 나이였는데, 아이들을 돌보는 역할을 했던 터라 그때 많이 질려버렸다. "언니! 누나!"라는 목소리와 엉엉 울어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때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아이들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꼬여버린 마음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빠가 화를 내고 나면 나는 집을 나가고 싶거난 죽고 싶었다. 엄마에게  "나 너무 힘들어."라고 말을 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왕따를 당한 사춘기 여자아이는 매일 우울한 감정에 시달렸다. 학교며 집이며 편히 쉴 수도 기댈 수도 없었다.


"엄마도 힘들어. 엄마도 참고 살잖아. 엄마보다 너네가 나아."


엄마는 항상 자기가 더 힘들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의 힘듦을 자신의 힘듦으로 덮어버렸다. 그래도 내가 뭐라고 하는 날이면 엄마는 화를 냈다.


"아빠가 돈 벌어다 주잖아. 네가 먹고 자고 하는 거 다 너네 아빠가 벌어다 준 돈으로 사는 건데, 너 돈 있어?!"


14살, 돈이 없었다. 당연히 없었다. 그 말을 들으면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화목한 가정이었다. 공부 열심히 하는 첫째 딸. 엄마 말 잘 듣고 동생도 돌보는 둘째 딸, 귀엽고 사랑스러운 막내, 다정한 엄마와 열심히 돈을 벌어다 주는 아빠.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었다.


아빠가 화가 나지 않는 날은 정말 그렇게 행복한 가정처럼 느껴졌다. 서로 장난도 치고, 웃고 여행도 종종 갔다. 생일이면 케이크도 하고 가족끼리 모여 노래를 불러주었다. 웃으며 장난치는 일도 일상이었다. 그저 퇴근하는 아빠의 기분이 오늘은 좋을까? 눈치를 살피는 것이 당연했던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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