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일만 단편선 #17
퇴직금까지 정산 받았더니 생각보다 돈에 여유가 있었다. 진규는 가장 먼 곳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 거기서부터 여행을 출발하기로 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예전부터 가고 싶던 그 나라였다.
그 나라의 수도에서 첫날 밤을 보낸 뒤 진규는 사막으로 들어갔다. 과거 A국의 사막 투어를 해봤다는 친구가 들려준 이야기가 생각나서였다. 가이드는 총 여덟 명의 관광객을 사막에 내려주었다. 그 다음부터는 자유롭게 걸어다니면서 사진도 좀 찍고 구경도 하라고 했다.
“길을 잃으면 어떡하죠?”
관광객 중 한 사람이 물었다. 그러자 가이드는 웃으면서 그럴 일이 없다고, 조금만 걸어도 울타리가 쳐져 있어 어차피 멀리 갈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가이드는 사막용 ATV를 가리키며, 이걸 타고 잠깐 돌면 여러분을 다 발견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관광팀의 다섯 사람은 가족이었고 두 사람은 연인이었다. 가족과 연인은 각자 흩어지고, 진규는 혼자서 사막을 걸었다. 신발과 양말을 벗고 붉은색 모래알을 맨발로 밟자 기분이 무척 좋았다. 멀리까지 온통 붉은 모래밭만 보였다. 친구의 말대로, 과연 한번쯤 와볼만한 곳이었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저 멀리 울타리가 눈에 들어왔다. 철제로 된 울타리를 조악하게 이어놓았는데, 대충 거기까지만 돌아다니라는 뜻인 걸 알 수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영어로 문구가 하나 쓰여 있었다.
KEEP DISTANCE
진규가 울타리를 등지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진규가 고개를 돌려보니 뒤에는 방금 전의 울타리만 놓여 있을뿐 인기척은 없었다.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려는데 방금 전의 목소리가 다시 희미하게 들렸다.진규는 고개를 갸웃하며 울타리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뒤에 작은 악어가 한 마리 기어다니는 걸 발견했다.
"이쪽으로."
왜 사막에 악어가 돌아다니는지는 몰라도 녀석이 진규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환청도 환영도 아니고, 현실이라는 걸 분명히 지각할 수 있었다. 진규의 손바닥만한 새끼 악어는 몸을 홱 틀어 깊은 사막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진규는 망설였다. 빨리 가이드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일단 따라가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자는 목소리가 들렸다.
새끼 악어는 거대한 모래산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밟는 곳마다 푹푹 꺼지는 모래라 힘겹게 정상까지 오르자, 그 밑으로 장관이 펼쳐졌다. 진규만한, 혹은 훨씬 더 큰 성체 악어들이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고 있던 것이었다. 놈들은 캠프파이어라도 하고 있는 건지 모닥불을 둘러싸고 춤을 추거나 뭔가를 마시고 있었다.
모닥불?
문득 하늘을 올려다 보니 어느새 밤이었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난 걸까. 저쪽에서 흰색 모자를 쓴 커다란 악어가 진규를 향해 소리쳤다.
“뭐하고 있어! 빨리 와!”
그 말에 진규는 지각이라도 한 학생처럼 악어를 향해 뛰었다. 그러다 스텝이 꼬여 넘어지고 말았다.
“크하하하! 오랜만에 웃기는 녀석이 왔네.”
악어는 호탕하게 웃었다. 진규는 어쩐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악어가 쓰고 있는 건 해군 장교모자였다. 이게 어디서 났을까. 진규는 생각하다 속으로 웃었다. 지금 궁금한 게 고작 그런 거라니. 그거 말고도 궁금해야 할 게 너무 많아 보였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축제라도 벌이듯 덩실덩실 춤을 추는 악어들이라니. 모자를 쓴 악어가 진규에게 마실 것을 권했다. 커다란 유리잔에 든 액체로 보건대, 맥주 같았다.
“크으.”
분명한 맥주 맛이었다. 비록 온도는 미지근했지만 쌉싸름한 맛과 깊은 향이 무척 반가웠다.
“왜 그러고 서 있어. 앉아.”
악어는 괄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규는 환대 받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악어는 꼬치구이도 내밀었다. 무슨 고기인지 궁금했지만 이제와 고기의 정체부터 묻는 것도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진규는 그것을 받아 먹었다. 악어는 마셔, 먹어, 건배 같은 말만 반복했다. 세 잔쯤 잔을 비우자 진규도 알딸딸해졌다.
“좋네요.”
진규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그러자 악어는 매우 기쁘다는 듯 말했다.
“그래 그거야. 좋은 거야!”
악어는 오랜 친구를 반기는 사람처럼 잔을 들어 건배를 청했다. 이번에는 진규도 활기차게 잔을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진규는 이미 그곳의 분위기에 완벽히 적응했다. 다른 악어들은 이제 누워 있거나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 중이었다. 해군 모자를 쓴 악어와 진규는 거의 꺼져버린 모닥불 가까이 앉아 계속해서 맥주를 마셨다.
“너는… 이름이 뭐야.”
진규는 어느새 악어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름이 없어. 근데 부르고 싶다면 캡틴 쿡이라고 불러.”
“캡틴 쿡… 캡틴이면 높은 거 아닌가? 대장이야? 악어 대장?”
“크흐흐흐흐.”
쿡이 요란하게 웃었다. 듣기 좋은 웃음 소리였다. 불현듯 쿡이 바닥에 나뭇거지로 글씨를 썼다.
“악어의 어가 이거야.”
바닥에 쓰여 있는 것은 물고기 어(魚)였다.
“물고기 어자네.”
“나를 봐바. 내가 물고기야?”
“아니지.”
“근데 왜 우리를 악어라고 부를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악은 무슨 뜻인데?”
“악어 악이야.”
“그게 뭐야? 악어 물고기란 뜻이야?”
“그러니까 내가 묻잖아. 누가 우릴 악어라고 부르는 거냐고.”
“사람들이…”
“그건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잖아.”
“그거야 그렇지. 근데 이름이 있어야 부르지.”
“이름을 잘 붙여야지.”
그리고 악어는 아니 쿡은 건배를 청했다. 진규도 거부하지 않았다.
“끄억.”
시원하게 트림을 한 쿡은 어디론가 걸어가서 또 다시 맥주 두 잔을 가져왔다. 진규는 그동안 소변을 봤다. 하늘을 보니 까만 밤하늘에 쏟아질 것 같이 별이 많이 보였다. 기분이 무척 좋았다.
진규는 문득 자신이 회사를 그만둔 계기를 떠올렸다. 사직서를 제출하기 한달 전, 진규는 코드 입력을 틀렸다. 실수를 한 것은 아니었다.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들었을뿐이었다. 코드를 틀리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 어디서 정말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건가?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나 같은 사람한테 과연 일을 맡겼을까? 그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마, 틀려봐야 알 것이었다. 세상엔 틀린 답을 내밀어야 알게 되는 일도 있는 것이다.
진규는 전화 상대방과 코드를 확인했다. 상대방은 ‘코렉트’라고 말했다. 진규는 그때, 일부터 코드를 틀리게 집어 넣었다. 그리고 컨펌을 눌렀다.
그 날 오후도,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한 달을 기다렸지만 누구도 진규를 찾지 않았다. 뭐가 잘못되어 돌아가는 낌새 같은 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진규는 퇴사를 결심했다.
“니 이름은 뭔데?”
쿡이 물었다.
“진규. 백진규.”
“이름이 좋은데?”
진규는 쿡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가, 내심 미안해졌다. 나도 좋다고 해줄 걸.
“캡틴 쿡…이란 이름도 멋져.”
“아주 멋지지. 내가 지었거덩.”
“하아… 사막에서 악어와 맥주를 마시고 있다니. 정말이지 돌아가고 싶지 않네.”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데?”
“내가 온 곳.”
“거긴 나빠?”
“나빴었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일, 그 일의 반복… 오로지 출근하기 위해 사는 것 같았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건 좋은 거야.”
“너는 어디서 왔는데?”
“몰라. 잊어버렸어.”
“가족은?”
“여기 있잖아.”
캡틴쿡이 주변에 누워 있는 다른 악어들을 가리켰다.
“아, 다들 네 가족들이야?”
“그럼. 평생을 함께 해 온 친구들인데.”
“엄청 친한가보구나.”
“뭐라고 부르든, 사라지면 엄청 섭섭할 존재들이지.”
“그렇구나.”
모닥불이 완전히 꺼졌다. 그제서야 쿡은 땔깜을 가지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규는 휴대폰을 꺼냈다. 가이드와 여행사는 지금쯤 혼비백산했을까? 혹시 관광객이 사라졌다며 대대적인 수색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진규는 그런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그런 문제는 지금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보다 환영 받는 기분, 온화한 기온, 밝은 모닥불, 맥주 그리고 여행지에서 만난 친구가 있지 않은가. 비록 그가 악어이긴 했지만.
저쪽에서 쿡이 걸어왔다. 여전히 신나보이는 걸음걸이였다. 진규는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으려다 진동을 느꼈다. 화면을 보니 메시지가 온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