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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가정

- 소설 <당신들의 조국>과 만약 던지기 수법에 대하여

by 전새벽 Mar 1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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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던지기처럼 '만약 던지기'도 있다. 마약은 계단, 우편함, 전봇대 뒤 같은데 던지지만 만약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 던지는 것이다. 만약 그때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만약 내가 그때 다르게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이것이 만약 던지기다.


만약은 왜 던지는 걸까? 만약은 역사를 분기처리한다. 실제와 다른 새로운 가지가 생겨난다는 말이다. 가지의 끝에는 열매가 하나 열리는데, 현실의 그것 보다 훨씬 달콤하다. 당연한 얘기다. 원래 있던 것보다도 못한 것을 얻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던지기 따위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누군가 굳이 더 씁쓸한 열매를 위해 만약을 던지겠다고 하면 그건 왜 그런 걸까. 자세히 한번 들여다 봐야겠다. '히틀러가 2차 대전에서 승리했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장편 미스테리 소설, 로버트 해리스의 충격적인 데뷔작 <당신들의 조국> 얘기다.


엿새 후면 아돌프 히틀러의 생일이자 공휴일인 총통탄신일이라 제국에 있는 모든 밴드란 밴드는 행진을 벌이게 될 것이다.
- 로버트 해리스 지음, 김홍래 옮김, <당신들의 조국(알에이치코리아, 2016)> 중에서


소설은 독일이 2차 대전에서 이긴 후 60년대를 비춘다. 폴란드를 넘어 모스크바를 지나 러시아의 중부지방까지 영토를 확대해 둔 독일은 그 넓은 땅덩어리 관리하느라 정신이 없다. 거기에 위대하신 히틀러 생일이 다가와 더 베를린의 각 부처는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바쁜 사람 얘기할 때 사법경찰관 마르크를 빼놓으면 섭섭한데, 그의 숙제는 총통절 준비가 아니라 웬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것이다. 호숫가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시신. 그는 대체 누구이고 왜 여기서 죽은 것일까.


한편 마르크는 이혼한 전처와 합의한대로 주기적으로 아들 필리를 만나고 있다. 그런데 이 열 살 소년, 못 보던 새 강력한 나치주의자가 됐다. 한창 국가사회주의 철학을 공부하고 나치 찬가를 부른다는 녀석이 묻는다. "아버지는 반사회적이에요. 그렇죠?"

아이구야. 직장 생활도 가정도 바람 잘 날 없는 우리의 주인공. 과연 버티고 열심히 하면 핑크빛 미래는 오는 것일까.


다행히 수사는 조금씩 진척을 보인다. 마르크는 시신의 정체가 뷜러 박사라는 것을 알아냈다. 뷜러의 행적을 좇던 마르크는 고인이 슈투카르트라는 사람과 중요한 관계에 놓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 인물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마르크의 수사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저자인 로버트 해리스. 1957년생인 그는 '어바웃 어 보이'의 저자 닉 혼비의 매부이기도 하다.저자인 로버트 해리스. 1957년생인 그는 '어바웃 어 보이'의 저자 닉 혼비의 매부이기도 하다.


<당신들의 조국>이 시선을 사로잡는 이유는 우선 그 과감한 설정에 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신이 되어버린 히틀러와 그에게 과잉충성하는 독일 사회를 작가는 날카롭게 꼬집는다.

한편 과감한 설정 위에 얹어진 이야기도 몹시 흥미로운데,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 딸려 나오는 사건들과 배후에 놓인 음모에 대한 호기심이 쉬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말하자면 한강식 주제 선정에 시드니 셀던식 서사를 입혔다는 것인데. 이 같은 과감함은 신선하지만 걱정도 불러 일으킨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이 미약할까봐. 끝에 가서 실망만 하게 될까봐.

그러나 로버트 해리스의 사전에 미약은 없는 단어인가 보다. 마침내 드러나는 진실은 소설의 진짜 주제가 무엇인지를 그제서야 보여주고 있어 작가의 치밀함과 소설이 던지는 거대한 질문에 그야말로 압도되고 말았다.


로버트 해리스의 <당신들의 조국>은 우리에게 독서의 모든 것을 제공하는 빼어난 문학작품이다.
- 김홍래, '옮긴이의 말' 중에서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히틀러가 이겼더라면'이란 가정은 왜 필요했을까? 굳이 이런 가정을 하지 않더라도 파시즘의 무서움에 대해서 얼마든지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가정이 불러온 결과를 자세히 꼽아 봐야겠다.

소설 속 세계는 어땠는가? 선전선동이 판을 치고 반지성주의가 만연한 폭력의 세계였다. 그렇다면 현실은 어떠한가? '연합군이 승리한 뒤'인 지금의 세계는 선전선동이 판을 치고 반지성주의가 만연한 폭력의 세계...다.

해리스의 가정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요즘 vs. 나치즘'이 이니라 '요즘=나치즘'이다. 해리스의 소설은 잘못된 만약을 던졌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알려주는 가정의 실패 보고서다.


역사에 만약을 던진다는 건 보고 싶은 버전의 현실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우리가 진정 보고 싶은 세상, 즉 파시즘이 사라진 세계를 상상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떤 가정이 필요한가. 그걸 알아내는 것이 가장 시급한 숙제다.


원서의 20주년 기념판. 'What if Hitler had won?'이라고 묻고 있다.원서의 20주년 기념판. 'What if Hitler had won?'이라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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