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다시 읽었습니다. 좋은 책은 몇 번 읽어도 좋습니다. 아니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과 생각을 주니 거듭 읽을수록 좋습니다. 다시 읽은 이방인 역시 좋았습니다. 처음 읽었을 때에는 주인공 뫼르소에게 소외감과 고독함을 느꼈다면, 이번에는 감춰진 우울함과 슬픔을 보았습니다. 뫼르소의 우울함과 슬픔은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책의 울림은 깊어졌습니다.
왜 전에는 뫼르소의 우울을 보지 못했을까요? 아니 이번에는 어떻게 그것을 보았을까요?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는 시선이 제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화요일마다 정신분석 세미나에 참석하는데, 거기서 프로이트의 ‘슬픔과 우울증’(Trauer und Melancholie)을 공부했거든요. 이방인을 추천한 것도 세미나였고요. 우울증에 대한 공부가 뫼르소에게 있는 깊은 우울과 슬픔을 볼 수 있는 시선을 선물한 것이죠.
시선과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한 번 더 깨닫게 됩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시선이 다르면 판단과 결론이 달라지고, 관점이 다양할수록 입체적이고 풍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제가 책에서 얻는 또 다른 시선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체포되던 날 나는 처음에 대부분이 아랍인인 여러 명의 죄수들이 이미 들어 있는 방에 감금되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웃었다. 그러고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물었다. 내가 아랍인 한 명을 죽였다고 하자 그들은 침묵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이정서 옮김, 새움. p102-3)
뫼르소가 감옥에 들어가는 장면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랍인들은 왜 침묵하는 거지? 어떻게 자신의 동포를 죽였다고 무심히 말하는 자에게 화를 내지도, 욕을 하지도 않고 침묵할 수가 있지?
그러나 침묵한 것은 아랍인이 아니었습니다. 책이 아랍인에 대해 침묵했습니다. 소설의 배경은 알제리의 수도 알제인데, 당시에는 프랑스 식민지였습니다. 주인공 뫼르소는 알제에 사는 프랑스인이었죠. 그의 연인 마리도, 그의 친구 레몽도, 그의 직장동료 에마뉘엘도, 대다수의 등장인물도 모두 알제에 사는 프랑스인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들에게는 이름이 있거나, 양로원 원장, 예심판사와 같은 다른 설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랍인은 그저 아랍인으로만 불립니다. 이름도, 직업도, 그 어떤 묘사도 없습니다. 뫼르소의 친구 레몽에게 폭력을 당한 여인은 그저 무어인이고, 그녀의 오빠와 일행은 그저 아랍인이며, 뫼르소가 죽인 사람도 그저 아랍인입니다.
책은 뫼르소의 고독과 우울은 예민하고 정확하게 그리면서도, 뫼르소와 주변인들로 인해 폭력을 당하고 착취당하고 심지어 죽어간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차가울 정도로 아무런 시선을 두지 않습니다. 어차피 서로에게 이방인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아랍인이 이방인에게조차 버려진 이방인의 이방인이기 때문일까요? 앵글 밖에 있는 아랍인에게 향한 저의 시선은 그저 아프기만 합니다.
이제 그 시선으로 책이 아닌 세상을 봐야겠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철저히 소외당해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아무도 듣지 않아서 침묵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절절한 외침도 있으니까요. 소설 이방인은 아랍인에게 선을 그으면서 시선을 거두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선을 긋고 있을까요? 그 시선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외롭고 아플까요?
문득 슈퍼스타 k 출신 "중식이 밴드"의 "여기 사람 있어요"라는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시선 밖에도 사람이 있고, 고개를 돌려 보려고만 하면 그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고개를 돌려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