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로부터 몇 광년을 가로질러 온 이곳에서, 나는 결국 행성의 갈라진 틈(crack)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느 지점이었을까. 손목 위의 시계가 비명을 지르듯 멈춰버린 것이. 초침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0.2초의 간극 사이에서 파르르 떨며 제자리를 맴돌았다. 시간은 이제 측정 가능한 물리량이 아니라, 순전히 나의 감각에 의존하는 주관적인 부피가 되었다. 배가 고프면 한 시간이 지난 것이고, 언니의 목소리가 그리우면 하루가 지난 것이라 믿기로 했다.
이곳엔 문명의 흔적 따윈 없다. 누군가 세운 기둥도, 깎아 만든 계단도 없다. 그저 끝없이 이어지는 동굴뿐이다. 기묘한 점은 이곳이 결코 어둡지 않다는 것이다. 연구소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을 언니는 지금쯤 내 시계가 멈췄다는 사실을 알까? 아마 언니는 데이터 시트를 넘기며 야근을 하고 있거나, 집에서 쉬고 있을 것이다.
"시간은 흐르는 게 아니라 그냥 여기 쌓여 있는 거래."
언니는 가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말하곤 했다. 그때는 그게 과학자 특유의 엉뚱한 상상력이라 생각하며 웃어넘겼는데. 지금 이 끝없는 동굴을 걷다 보니 청서의 말이 정답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나는 지금 이 행성이 수십억 년 동안 쌓아온 시간의 퇴적층 사이를 걷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원히 고장 난 현재. 이곳엔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으며,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마른바람도 불지 않는다. 동굴의 벽면은 스스로 인광을 내뿜으며 나를 지켜보고 있다. 빛의 근원은 알 수 없으나, 덕분에 나는 나의 그림자를 잃지 않았다. 어쩌면 이 동굴을 우주가 마련한 거대한 암실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연구소에서 아이의 발달 과정을 체크하던 언니는 청서가 가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을 때마다 "시각적 노이즈에 반응하는 거야"라고 건조하게 말하곤 했다. “여기는 아직 어제랑 내일이 안 나눠졌어." 그 애가 내 옷자락 끝을 잡으며 했던 그 말이 문득 떠오른다. 그 나뉘지 않은 세계가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언니는 내가 이 행성의 균열 아래로 내려갔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비효율적인 탐사"라며 미간등을 짚으면서도, 내 생체 신호가 끊기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안도할 것이다.
언니가 믿는 과학은 명징하지만, 내가 지금 느끼는 인간의 온기는 조금 더 복잡하고 기묘하다. 시계가 멈추고 나니 비로소 내 심장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시계태엽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던, 눅눅하고 불규칙하며 그래서 더욱 생생한 펌프질 소리. 인간이란 얼마나 이상한 존재인가. 아무런 이정표도 없는 어둠 속에서도 제 안에서 빛을 만들어내고, 닿을 수 없는 타인의 안부를 물으며 스스로를 계속 걷게 만들다니.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나는 지금 내 발바닥에 닿는 행성의 감촉과 기억 속에서 더욱 선명해지는 움직임을 통해 나를 재정의하고 있다. 인간은 혼자 낯선 곳에 던져졌을 때 비로소 자기 안의 다정함을 발견한다. 두렵지는 않다. 빛이 없으나 어둡지 않은 이 길 위에서, 나는 내가 가진 기묘하고 따뜻한 본능을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