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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一. 농부의 딸

바닷가 사람들 일대기 1편

by 신서안 Mar 12. 2025
사진: Unsplash의Waranont (Joe)



그는 전라도의 작은 마을, 녹차 밭이 끝없이 펼쳐진 그곳에서 태어났다. 여덟 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그는, 커다란 아버지의 그림자와 몸이 약한 어머니의 손길 속에서 자라났다. 그를 길러낸 것은 언니들의 손이었다. 큰언니와는 나이 차이가 많았고, 언니들은 막내가 자라는 동안 따뜻한 보호막이 되었다. 햇빛을 머금은 찻잎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속삭였고, 그는 언니들의 손을 잡고 푸른 언덕을 뛰어다녔다. 해 질 무렵이면 마을 너머로 붉은 노을이 번졌고, 저 멀리 논둑길을 따라 개울물이 찰랑였다. 어떤 날엔 소를 풀어놓고 몰래 뒷산으로 놀러 갔다가 아버지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둘째 언니가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다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어린 마음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런 순간들이 그의 유년 시절을 채웠다.



여자아이가 고등학교까지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던 때였다. 언니들은 그 당연한 흐름에 순응했고, 그 역시 같은 길을 갈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마음속엔 어렴풋한 반항과 열망이 숨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묘하게 눈에 띄는 애였으니까. 학교에서는 오락부장을 맡았고, 노래를 부르면 마을 사람들이 감탄할 만큼 재능이 남달랐다.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남쪽의 큰 도시로 향했다. 짭짤한 바닷바람이 골목을 따라 들이치고, 갈매기는 하늘을 가르며, 푸른 물결이 햇살에 반짝였던 그 도시로. 직장을 몇 번 바꾸며 그는 작은 회사에서 경리 일을 하고, 소비조합에서 가전제품을 판매하는 일도했다가, 사무소에서 도면을 복사해주는 일도 했다. 삶은 팍팍했어도 마음속 불씨는 줄어들었다 다시 타오르기를 반복하며 가는 생명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부모가 대학 입시 공부할 돈을 대줄 리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간호조무사 학원을 다닌다고 둘러대며 돈을 받아 공부를 시작했다. 몇 년이나 공부를 놓고 살았기에, 많은 것이 낯설고 어려웠다. 그럼에도 ‘사당오락(四當五落)', 네 시간 자면 떨어지고 다섯 시간 자면 붙는다는 말을 되새기며 새벽같이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생활을 견뎌냈다. 지난한 추위가 이어지던 겨울의 끝자락에, 기적처럼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는 동기들 중 나이가 많은 축에 속했지만, 기죽지 않고 묵묵히 해냈다. 가관식에서 새하얀 관을 받아들 때에, 그는 조용히 이렇게 다짐했다. '환자의 곁에서, 말없이 함께하는 간호사가 되겠다.'



간호사로 일하던 어느 날, 그는 교회에서 한 청년을 만났다. 총명한 눈빛과 순수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그를 처음 본 순간 깨닫았다. '아, 내가 결혼한다면 바로 저런 사람과 하겠구나.' 운명 같은 일이었다. 별이 빛나고 잔잔한 파도가 밀려오는 밤, 그들은 서로의 손을 맞잡고 꿈을 이야기했다. 그는 그 이야기가 퍽 마음에 와닿았다. 그렇게 양가에 인사를 드리고, 둘은 부부가 되었다. 무테 안경 쓴 앵커들이 나라 경제가 휘청거린다 연일 뉴스에서 떠들어대던 시절, 젊은 부부는 딸을 낳았다. 아이가 지혜롭게 자라길 바라며 이름을 지었다. 그 이름처럼 첫째는 똘똘하고 야무지게 자랐다. 얼마 후,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물려받은 둘째가 태어났다. 그는 자신과 남편을 절반씩 닮은 두 딸을 바라보며 흐뭇했지만, 동시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부모가 된다는 것이란 어떤 의미일까?



두 딸이 무럭무럭 자라던 즈음, 젊은 부부는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공원 앞에 적당한 집을 마련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개천에는 오리들이 유유히 떠다녔다. 저녁이면 노을이 강물 위에 길게 스며들었고, 바람이 창가를 스칠 때마다 동백꽃이 한 장씩 흩날렸다.  그곳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그는 점점 강해졌다. 어머니는 그래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예전 같았으면 눈물로 넘겼을 일들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다.



큰아이는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갔다. 방을 구해주고 내려오는 고속도로 가운데에서, 그는 저 애가 차갑고 빠른 잿빛 도시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작은아이는 어머니의 길을 따라 간호학을 전공했다. 대학에서 뒤늦게 공부에 재미를 붙여, 전체 수석을 할 정도로 놀라운 성취를 보였다. 그는 그런 아이를 보며 지금은 어렴풋하게 바래 버린 자신의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대학을 졸업할 때 즈음, 큰아이는 대학원 입시에 도전하였으나,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는 실망한 딸을 다독이며 밤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인생은 길다. 지금의 좌절은 먼 훗날 돌이켜보면 별일 아닐 것이고, 네 곁에는 언제나 널 사랑하는 이들이 많음을 잊지 말라고.' 그리고 조용히 다짐했다. '딸들보다 딱 몇 년만 더 살아야겠다.' 아이들이 힘들어할 때 언제든 곁에 있을 수 있도록.



이제 그는 두 딸이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본다. 그는 바란다. '부디 건강하기를, 그리고 네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네 가슴이 뛰는 일을 찾아서, 온 몸으로 이 세상을 껴안기를.' 그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두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또 그의 인생의 제2막은 또 어떻게 흘러갈까? 그건 신 빼고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 사실 하나는 분명했다. 녹차 밭 어드메에서 태어난 작은 소녀가, 어머니가 되어, 온 힘 다해 일군 이 가족은 늘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아이들은 마음이 곱고 사랑이 많은 그를 닮았고, 남편 역시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 아이들을 아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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