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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二. 공장장의 아들

바닷가 사람들 일대기 2편

by 신서안 Mar 12. 2025
사진: Unsplash의Monty Allen사진: Unsplash의Monty Allen


그는 충청도의 깊은 산골, 나지막한 언덕들이 이어져 내려오는 마을에서 작은 공장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마을은 늘 안개가 자욱했고, 이른 아침이면 언덕 너머에서 떠오르는 태양이 은은한 금빛으로 집집마다 지붕을 덮었다. 그의 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했고,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였으나 현명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세 형제는 마을에서 공부를 꽤 하는 아이들로 자라났다. 가족의 미래는 밝아 보였다. 그러나 믿고 따르던 동네 삼촌에게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면서, 다섯 식구의 희망이 담겨 있던 공장은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베어져 쓰러지는 모습과도 같이. 이후로 밤낮없이 집안에는 술 냄새와 탄식 소리가 가득했다. 아버지는 때때로 울분이 차오르면 훌쩍 집을 떠나 며칠이고 돌아오지 않는 일이 반복되었다.



어머니는 세 아이를 지키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 작은 공장에서 일자리를 구해 악착같이 일했다. 첫째는 집안을 이을 기둥이라는 이유로, 막내는 어려서 아직 돌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먼저 데려왔으나 둘째까지는 여력이 되지 않아 후순위로 미루어 두었다. 산만 홀로 이모 집에 남아 눈칫밥을 먹으며 외롭게 자라났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무거워졌고, 그 기다림은 내면 깊숙한 곳에 상처로 자리 잡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산은 자라서도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는 것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래도 다행히 그의 곁에는 명한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학교를 마치면 둘은 논밭 사이 길을 따라 뛰어다니며 잠자리를 잡고, 어두운 밤에 서리를 하며 낄낄 웃었다.



어느 해, 마침내 마음씨 좋은 노상인의 호의로 그 집에 남는 방 한 칸을 얻은 어머니는 홀로 남겨둔 둘째 아들을 불렀다. 산은 그 길로 태어난 마을을 떠나 좀 더 큰 도시로 옮겨갔다. 똑똑한 산은 그 도시에서 이름난 공고에 입학했다. 그러나 기름 냄새 가득한 작업장과 도면으로 가득 찬 교실에서, 산은 가끔 먼 창밖의 구름을 바라보며 다른 세상을 꿈꾸곤 했다. 결국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고, 기술 과목 성적이 바닥을 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졸업장은 손에 쥘 수 있었다.



졸업 후 주인집 할머니는 산에게 배운 기술을 살려 공장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산은 안정된 직장을 원했다. 우체국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고,  불과 4개월 만에 빠르게 합격을 이루었다. 처음에는 근처의 작은 우체국에서 일했다.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푸른 논밭이 보였고, 산들바람이 불어오고 떠나갔다. 몇 년 후, 산은 남쪽의 더 큰 도시로 발령이 났다. 그곳은 동백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금빛 모래가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해안이 아름다운 도시였다. 산은 거기서 교회를 다니다가 한 여자를 처음 만났다. 이전 연애가 끝나고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있을 무렵이었다. 밝게 웃으며 봉사하는 그의 모습은 점점 제 마음속에 들어왔다. 처음엔 호기심이었지만, 그의 따뜻한 눈빛과 조용한 배려가 마음을 조금씩 녹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어느 봄날, 별빛 아래 파도가 잔잔히 밀려오는 해변에서 미래를 약속했다. 그렇게 양가에 인사를 드리고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후, 두 사람 사이에 첫 딸이 태어났다. 산은 아이를 품에 안고 다짐했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을 이 아이에게 만큼은 넘치도록 주리라." 그리고 제 아내처럼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에, 토끼 같은 앞니를 가진 둘째가 태어나자 더욱 일에 몰두했다. 상사에게 서류로 머리를 맞아가면서, 동료들에게 '어차피 같이 월급 받는 봉급쟁이인데 쟤 때문에 우리가 비교 당한다'며 은근히 견제를 받아도, 묵묵히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그런 산의 노력을 인정해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민원인들이었다. '덕분에 일이 잘 해결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정말 막막했을 거예요.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런 칭찬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 켠이 간질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어렸을 때부터 듣고 싶었던 부모님의 칭찬은 들을 수 없었지만, 그 빈 자리가 조금씩 채워지는 것 같았기에.



어느새 세월이 흘러 수십 년의 공직 생활을 마무리할 때가 다가왔다. 두 딸은 자라 대학을 마칠 나이가 되었다. ‘이대로 내 직장 생활의 마지막을 맞게 되려나.’ 하고 약간의 적적함을 느끼던 중, 위에서 연락이 왔다. 본부로 오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그 순간 산의 마음이 뛰기 시작했다. 젊은 날의 그 열정이 완전히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 깨어났음을 느낀 것이었다. 산은 그 기회를 잡기로 했다. 짐을 챙겨 집을 떠나던 날, 그는 몇 번이나 집을 돌아보았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더 큰 짐을 지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산은 그렇게, 부족한 어린 시절을 딛고 온전히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나 말없이 그를 지탱해준 아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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