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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emaker Oct 11. 2021

한국 사람이 가장 힘들었다

한국형 집단주의의 폐해

필리핀 로스바뇨스의 IRRI(International Rice Research Institute)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얻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에 대해 나누는 글임을 먼저 밝힙니다.


사실,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는, 나를 힘들게 했던 그것이 한국문화였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수의 무리가 만드는 분위기나 생활양식, 그리고 사고방식을 문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그때 그들이 공유했던 것은 ‘한국문화’ 라기보다는 ‘2012년에서 2015년 즈음에 IRRI에 있던 한국 이민자들의 문화’였다고 명명하고 싶다.


   한국 사회는 그렇게 폭력적이지도, 고리타분하지도 않다고 믿고 싶다. 해외의 한인 공동체들이 다 그렇게 시대착오적이고, 일방적이며, 병신 같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 거기 있던 사람들이 그랬을 뿐이다. 그들만이 우물 안 개구리인 주제에, IRRI 한국 나라의 왕이라도 된 듯 군림했을 뿐이다.





  어떤 공동체라도 누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당시 한인 공동체의 주도권은 한인들 중 상대적으로 높은 직책이었던 한 사람이 자발적으로 잡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인정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는 특유의 오지랖과 갑질로,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긴 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사이코패스나 그보다 넓은 범주인 ‘자기애적 인격장애’를 진단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사람을 경험하고 나서는, 그 범주의 사람들이 어떤 느낌인지는 알겠다. 그는 완벽한 예였다.


   그는 폭군이었다. 지인들을 초대한 저녁 식탁에서 자주, 자녀들을 훈계했다. 부모들은 자식 입에 밥만 들어가도 행복하다던데, 마치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소화불량에 걸리게 하겠다는 듯,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악다구니를 했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도 같이 혼나는 아이처럼, 체할 것 같은 기분으로 모래알 씹듯 음식을 넘기던 기억은 난다.


   그는 모든 관계에서 독재적이어서, 거스르기 힘들었다. IRRI에서 일하지도 않았고, 그와 학교 선후배 관계도 아니었던 나는, 필리핀에 도착하자마자 자주 그의 집에 불려 갔다. 처음엔, 호의라고 생각해서 고마워했다. 저녁 식사 후에, 그의 일방적인 설교는 늘 열두 시를 넘겼고, 급기야는 나와 남편을 앉혀둔 자리에서, 성적인 농담을 하거나, 종교를 무시하는 발언을 듣고 난 후부터는, 초대를 받을 때마다 진저리를 쳤다.




   어느 날, 그는 그의 부인과 외출하고 돌아온 나를 집까지 태워주겠다며 차에 태우고서는, 다짜고짜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남편이 없는 자리에서 그는 나에게 남편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의 도움이 없이는 졸업도 할 수 없는 저능아이니, 부인인 나라도 나서서 자기 말을 잘 듣게 하라는 요지였다. (과장은 보태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저렇게 말했다.)


   그는 당시 어떤 연구에 남편을 참여시키고 싶어 했다. 남편은 연구 욕심이 많아 기꺼이 도와주려고 했지만, 논문지도를 받는 담당 교수님이 계시니,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없어 양해를 먼저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대가 없는 수고를 바라면서도 그는 최소한의 배려조차 하기 싫어했다.


  인격모독적이고 일방적이며 부당한 이야기를 듣고서도 내가, 자기의 말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는 오만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들과의 관계를 끊었는데, 결과적으로 한인 공동체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한인 공동체 사람들은 자주 모였다. 폐쇄된 공동체에서 서로만 이야기했기 때문에, 접하는 모든 정보가 모임을 주도하던 그의 검열과 해석을 거친 것이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외국인들과 어울리고 시간을 보냈다면 영어실력이라도 늘었을 텐데. 한인들은 그를 싫어하면서도, 따랐다. 그의 가스 라이팅에 놀아났다. 그것이 가장 아이러니하다.

   

   술자리에서 우리 부부가 자주 안주삼아 오르내렸을 거라는 것은, 나중에 떨어져 나온 증인들의 증언이 없더라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한인들은 전적으로 그의 말을 믿어서, 내가 임신했을 때도, ‘불임이라던데, 어떻게?’, 혹은 남편이 박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후 과정에 들어갈 때도, ‘니까짓 게 그럴 리가 없는데.’라는 반응을 대놓고 했다.






   가장 끔찍한 사실은, 우리 부부만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학생은 스트레스로 밤마다 그를 때리는 악몽을 꿔서,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했다. 또 다른 학생은, 비슷한 일을 겪고 따로 찾아와 마음의 고통을 털어놓았다.


  마음의 피해를 입고 찾아오는 사람들과 깊은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한 사람에게 동일한 괴롭힘을 당했다는 경험은 흡사 동기애나 전우애 같은 끈끈한 감정을 가지게 해 줬다. 나중에도 자주 연락을 못하더라도 어디에선가 만나면 반가운 수다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약자였다는 쓰디쓴 공통의 경험이 이어준 고마운 인연들이랄까.


       



  지금 그때 날 힘들게 했던 한국인들은 모두 떠났다. 특히 그 사람은, 연구소에서 나가게 되었다. 그 이유에 대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여러 루트를 통해 들었다. 오만한 사람이 얼마나 멍청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지, 그를 통해 많이 배운다.


  그는 여전히 있는 자리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어떻게든 남편에게 똥물을 튀겨보려고 발악한다. 그런 행동이 결과적으로 본인에게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놀랍다. 남편에 대한 인격적인 모독이나, 폭력적인 행태를 보는 주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증인이 되어 말해줄 뿐만 아니라, 본인과 손절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다.


   그는 완벽한 반면교사다. 그를 경험한 이후, 언제나 그와 반대로 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약자의 입장에 대해 철저하게 경험으로 배웠다. 피하고 손절해야 할 대상을 알아보고 걸러낼 수 있게 되었다.


   쓴 경험을 통해 얻은 가장 커다란 원칙은, 절대 IRRI에서 한국인만의 모임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모일 일이 있다면, 외국인 친구들도 함께 초대하는 것을 선호한다. 문화가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면 갑질 할 일도 눈치 볼 일도 없다. 한국인들 특유의 따돌림이나, 뒷담화도 없다. 외국 생활의 가장 큰 장점은 헬조선의 문화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 장점만은 최대한 누리며 살고 싶다.



타이틀 이미지 출처: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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