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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 Feb 26. 2024

칠흑 같은 어둠 속 나를 따라오는 사이렌 소리

하와이의 빅 아일랜드는 우리나라 제주도와 같은 화산섬이다. 제주도의 약 6배 크기로 중앙에 거대한 화산 두 개를 중심으로 해안에 마을이 발달되어 있는 섬이다. 우리는 동쪽의 힐로 여행을 마친 후 서쪽에 위치한 와이콜로아 숙소로 돌아가는 중이다. 빠른 귀가를 위해 섬을 가로지르는 직선코스를 선택했다. 출발 시각은 5시 반.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1시간 45분 후 숙소에 도착 가능하다. 시간이 애매해서 저녁은 숙소로 돌아가 먹기로 했다. 가는 동안 아이들이 차에서 자면 좋겠는데, 여행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지 도통 잠들지 못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이 길은 정말 깜깜하다. 아직 저녁 6시 반. 겨울도 아닌데 해가 이렇게 일찍 질 줄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에 마을 하나 없는 곳이다. 조금 으스스하다. 초행길이라 더 어리숙했다. 오로지 차량 불빛에 의지해 한껏 긴장한 채 2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연료마저 심상치 않다. 힐로에서 숙소까지 거리는 70마일이었고 차량에 표시된 운행 가능한 거리는 130마일이었다. 이 정도면 연료가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 힐로에서 주유하지 않고 출발했다. 그런데 연료 닳는 속도가 엄청나다. 한 시간쯤 달리다 보니 남은 거리는 아직 30여 마일인데 차량에 표시된 가능 거리가 60 마일이다. 이런 식으로 연료 소모가 계속되면 와이콜로아 시내에 진입하기 전에 차가 멈출 수 있을 것 같다. 연비 낮은 대형 SUV인 데다 지대까지 높아 그런지 연료를 더 많이 소비하고 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이런 상황을 들키지 않게 주의했다.




나에겐 불안으로 기억되는 어린 시절의 여행이 있다. 불국사를 여행한 날이었다. 날이 어두웠다. 인적 없는 산길 어딘가에 내렸을 때다. 이 낯설고 어두운 곳에서 부모님이 당황하신 기억이 있다. 버스에 지갑을 두고 내린 것이다. 결국엔 버스 종점으로 찾아가 지갑을 찾았던 것 같다. 아마 인적 없는 산길 어딘가에 내린 게 아니라 버스 종점이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불안이 나의 어릴 적 기억을 형상마저 바꿔놓았다. 불국사에 관한 기억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다만 그날의 불안과 두려움이 남아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의 흥분으로 가득 차 잠들지 못하고 재잘거리고 있던 아이들에게 이런 불안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깜깜한 도로에 차가 멈춰버리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함에 걱정이 앞섰다. 제한 속도는 55마일. 빨리 주유소에 도착하여 이런 초조함을 다 떨쳐 놓고 싶다. 달리는 중 보이는 55마일 속도 제한 표지판은 마치 55킬로미터로 천천히 달려야 한다고 말하는 듯 답답했다.


갑자기 우리 뒤편에 파란 불빛이 나타났다. 분명 못 보고 지나친 불빛이다. 이 파란 불빛의 간격은 우리 차와 벌어지지 않고 일정하게 따라온다. 무슨 불빛이지? 궁금해하고 있는데 사이렌 소리가 울린다.


“경찰인가 봐”


'미국에서 경찰을 만나면 주의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허투루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경찰이 동양인을 어떻게 대한다고 했더라.'

공포가 몰려오며 머릿속이 어지럽다.

그렇지 않아도 해도 빨리 져 어두운 데다가 저녁도 먹기 전이라 뱃속은 출출하다. 비도 내리고 연료도 다 떨어져 간다. 이 복합적인 상황으로도 난감한데 이것만으론 부족하다며 최후의 돌덩이가 쿵 내려앉아 불행에 쐐기를 박는다.


‘우리가 몰 잘못한 거지?’


차를 멈췄다

이제 아이들도 이 상황을 알아챘다.


‘엄마 무슨 일이야?’


‘경찰 아저씨가 우리를 만나러 왔네’

속도제한 표지판에 45마일이었던 곳이 있었다고 한다. 그 표지판을 미처 못 보고 줄곧 55마일로 달려왔는데 급한 마음에  55마일도 아닌 60마일까지 밟았던 모양이다.  암행단속에 걸린 것이다.

다행히 미국 경찰은 우리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고 노란색 속도위반 딱지를 건네줬다.


웃음이 터졌다.


악재가 휘몰아치는 이 상황이 엉뚱하게도 나의 두려움 가득한 마음속 울음 버튼이 아닌 웃음 버튼을 건드렸다.


"얘들아. 하와이에서 경찰 아저씨 만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우린 이제 이 여행을 평생 기억하게 될 거야.

정말 우습다. 그지?"


엄마가 웃으니 아이들도 재미있다며 깔깔대며 웃는다.

아이들에게 웃음을 전염시켰다.




끝까지 책임감을 내려놓지 못하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남편은 이게 웃을 일이냐며 핀잔을 준다.

"괜찮아. 여보!"

이제 가다가 연료 부족으로 차가 멈춰도 어떻게든 해결되겠지.

경찰이 올 지 보험회사에서 올 지 알 수 없었지만 경찰을 한번 만나고 나니 두 번도 괜찮았다.

우리는 이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했다. 속도위반에 따른 벌금은 쓰라렸다. 200불 넘는 금액이 나와 한화로 약 30만 원을 지불했다.


다행히 차는 길가에서 멈추지 않았고 주유소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경찰을 두 번 만나는 행운을 누리진 못했다.


여행지에서 계획하지 않은 돌발상황은 이렇게 두고두고 추억할 거리를 만들어 준다.

예상치 못한 돈은 더 썼지만, 아이들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선사했고, 심지어 그 기억이 웃음으로 남아서 너무 다행이었다.


그래도 다음에 또 하와이를 간다면, 이것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기름만은 가득 채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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