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하와이까지 긴 이동시간이 내게 두려움이었다.
그 시간을 참지 못할 어린 아들의 돌발행동에 온몸의 세포를 하나하나 곤두세우고
긴장을 놓지 못했다. 나는 자정 넘어까지 울어대는 아이를 달래느라 에너지를 다 쏟아부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몸살이 나 호텔방에서 끙끙 앓고 만다.
이렇게 귀한 하와이 여행의 첫날을 날려버리고, 다행히 다음날 컨디션을 회복했다.
이제 하와이에 여행 온 기분을 온몸으로 느껴보려 했다.
가족들과 수영장에 갔다.
이곳은 워터 슬라이드가 하나 있다.
아이들은 어렸다.큰애는 겁이 많고 작은애는 겁이 없다.큰애는 워터 슬라이드는 재미있으나 물에 빠지는 것은 무섭다.
물에 빠져 눈을 뜨지 못해 앞이 안 보이는 것도 싫고, 물을 먹는 것은 더욱 두렵다.
반면, 작은애는 눈에 물이 들어가든 물을 먹든 상관없다.물은 그저 재미있고 즐거운 것이다. 그런데 작은애는 수영을 못한다. 물에 겁 없이 뛰어드니 물에 빠지면 큰일이다. 이 아이가 워터 슬라이드 타는 건 걱정 많은 우리에겐 상관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남편이 슬라이드 아래쪽에서 대기하다가 내려오는 아이를 받아주기로 했다.
이런 방법으로 워터 슬라이드를 타니 모두가 만족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우리 부부도 아이들이 행복해하니 즐거웠다.
그런데, 남편에게 일이 생겼다.
아이를 받다가 가속도가 붙은 아이의 무게감에 새끼손가락이 딱! 꺾인 것이다. 다쳤다는 말을 들었을 때, ‘괜찮아?’라고 물으면서도 정말 ‘괜찮다’는 답만 듣고 싶었다.
답정너의 순간이 절실했다.
'뼈가 부러진 건가? 뼈가 부러졌으면 아예 움직이질 못하고 퉁퉁 부을 텐데' 팔 골절의 경험이 있던 나는 남편 손가락의 상태를 보고 골절은 아님을 확신했다. 희망적이었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통증이 동반된 것이라면 내일이면 괜찮아지리다. 독심술로 내 속을 읽었는지, 부부라 일심동체의 뜻을 품었는지.
남편은 ‘괜찮다’고 원하는 답을 들려줬다.
그런데, 분명 괜찮다고 대답한 남편이 밤이 되니 나무젓가락을 찾아 손가락을 고정시킨다.
살펴보니 손가락이 굽혀지지 않았다.
녹색창에 검색해서 얻은 얕은 지식을 총 동원해 손가락을 고정시켜 움직임을 줄이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매사에 계획적이지 못해 미처 여행자 보험도 들지 않았다.
병원을 가기도 힘든 상황이지만 병원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기도 하다. 미국 병원비가 비싸다는 건 준비성 없는 우리 부부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병원비의 부담도 있었지만, 남편 입장에서는 딸린 처자식에 장모님까지 모시고 온 여행이었다. 남편은 여행을 이어가겠다는 책임감으로 무장한 채 그냥 버티기로 작정했다.
이런 남편의 뜻은 눈치챘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일이라도 병원에 가보자고 해야 하나. 많이 다친 게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아물길 바랐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나의 몸살로 하와이 일정의 하루를 날려버렸는데, 남편의 병원행으로 또 하루를 보낼 수는 없었다.
이기적인 마음이 컸다.
이런 나의 갈등마저 읽은 걸까?
남편 역시 부러지거나 인대가 끊어진 일이라면 깁스가 최선이니 임시방편으로 부목을 대면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수술이 필요한 일이라면 하와이에서 할 수 없으니 한국에 돌아가 병원을 가겠다고 했다.
나는 부목 이 될 막대기에 테이프 감아주는 일을 도와주며 모른 척 눈감았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의 공감정신을 버리고
“아프냐. 나는 모르겠다.”라는 모르쇠 정신을 발휘하였다.
종이에 손가락을 살짝만 베어도 다 아물 때까지 신경이 곤두서는데, 남편은 얼마나 신경 쓰였을지 가늠할 수가 없다.
불편한 손가락으로 운전을 도맡아 하고 가이드 역할을 하며 물놀이까지 하려니 힘들었을 것이다.
아이의 무게감이 손가락을 꺾었을지언정
가장의 무게감마저 꺾어 없앨 순 없었다.
중! 꺽! 마!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가장의 마음이라는 정신으로 여행을 마쳤다.
한국에 와서도 새끼손가락이 접히지 않았다. 병원에 가니 인대가 끊어진 것이라 미세 봉합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철심 박는 수술을 했다.
회복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완전히 돌아오지는 않았다.
지금도 손가락을 볼 때마다 하와이 여행을 추억한다.
이렇게 어린 아들은 의도치 않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여행 초반부터 엄마와 아빠에게 골고루 타격을 주었다.
으이구… 사랑스러운 우. 리. 아.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