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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고 Feb 20. 2024

수영하는 뱀이라니!


하와이 빅 아일랜드에 도착한 첫날부터 나는 몸살에 걸려 아팠다. 남편은 손가락 부상을 입었다. 초반부터 부창부수의 면모를 선보인 여행이었다.

몸과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은 후  '힐로의 칼스미스 비치'로 향했다. 우리가 묵은 숙소는 빅 아일랜드의 서쪽인 와이콜로아 근방이다. 힐로는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어 차로 1시간 반 정도 달려야 한다. 하와이의 섬 중에 빅 아일랜드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칼스미스 비치에 가기 위해서다.

이곳에서 거북이를 볼 수 있는데 운이 좋다면 거북이와 함께 수영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칼스미스 비치는 용암석들이 마치 방파제처럼 파도를 막아주고 있었다. 잔잔한 바다가 마치 수영장처럼 느껴진 곳이다. 게다가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도 있다. 자연이 만든 천연 수영장에 인간이 만든 계단은 편리함 한 스푼을 첨가해 주었다.



에메랄드 빛 바다 색깔은 이곳이 낙원의 섬, 하와이 임을 상기시켜 주었고 이제 거북이만 만나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쉽게 거북이를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거북이를 찾아 헤맨다.


‘어디 있는 거니?’


하염없이 거북이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만약 기다림 없이 도착과 동시에 거북이를 보았다면 어땠을까?

박물관에 박제된 거북이를 보는 느낌처럼 싱거웠을 것이다.

이곳의 거북이들은 쇼타임을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관광객들이 기다림에 지쳐 안달 날 타이밍에 ' 짜잔! ' 하고 나타나리니!

그런데 난 힐로에 당일치기로 왔다. 오늘밖에 기회가 없다. 힐로의 거북이를 보기 위해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호놀룰루를 거쳐 다른 섬도 아닌 이곳! 빅 아일랜드로 온 것이다.

이렇게 생각들을 켜켜이 쌓아가며 거북이를 꼭 마주해야 할 이유를 곱씹었다. 반면 거북이를 보지 못할 '경우의 수'에 대해서도 고심하고 있었다. 우리 여행의 시작을 반추해 보건대 가능성 없는 일도 아닐 것이다.




한참을 기다리다 지친 나는 아이들을 남편에게 맡기고 튜브에 몸을 싣고 먼바다로 나아갔다. 물 위에 둥실둥실 떠 있으니 조급한 마음이 사라지고 물멍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렇게 바다와 물아일체 되는 기분을 느끼던 찰나!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는데 불과 1m 앞에 엄청 큰 뱀이 수면 위로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면과 수직으로 머리를 곧추세우고 있는 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다. 나는 너무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반대편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하필 주위에 나를 도와줄 가족들은 보이지 않는다.

도망가려니 나의 발버둥이 얼마나 하찮은 지 내가 원하는 속도로 쭉쭉 나아가지 못한다. 잔잔한 파도마저 뱀이 있는 해안 쪽으로 나를 자꾸 밀어내고 있다. 혹여라도 뱀이 나를 쫓아올까 두려워 뒤도 확인하지 못하고 열심히 도망쳐 나왔다. 그제야 근처에 있던 외국인이 하는 말이 귀에 들어온다.


‘터틀!’ 


영어가 짧아 다행이다. 한국이었으면 뱀이 나타났다고 소리치며 도망갔을 것이다. 얼마나 바보 같은가. 그냥 거북이를 무서워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게 나았다.


거북이를 보기 위해 힐로 비치에 왔으면서 뱀 타령이라니. 연상점수도 빵점인 데다 거북이에 대한 예의도 빵점이다. 게다가 수영하는 뱀이라니! 이 무슨 '장님 코끼리 만지기'격이란 말인가! 상식까지 내던진 단순한 사고방식에 민망했다.

거북이는 단지 숨을 쉬려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것인데, 요란한 물거품을 만들며 추하게 도망가는 여인네를 마주한 것이다. 부끄럽다. 그리고 거북이를 놀라게 한 건 아닌지 미안했다.

 



해안으로 돌아가 두 다리를 땅에 딛고 서니 비로소 진정이 되었다. 거북이는 이곳의 스타인 자신을 보고 뒷걸음질하는 인간이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나 보다. 고맙게도 나를 따라 해안으로 와주었다.  예상치 못한 등장이었지만 아주 성공적인 등장이었다. 쇼맨십을 발휘한 거북이는 아이들 옆으로 헤엄쳐 와 줬고 아이들도 가까이서 거북이를 볼 수 있었다.

거북이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올리는 거북이의 모습은 비슷할 것이다. 에메랄드 빛 바닷속에서 오색찬란한 물고기들 사이로 유영하는 거북이 아니겠는가? 마치 내셔널 지오그래픽 같은 채널에서 봤음 직한 거북이 말이다.


화면에서 카메라는 거북이의 측면도 밑면도 아닌 위에서 내려다본 커다란 등껍질을 먼저 비춰준다. 내게 거북이의 상징적인 이미지는 곧 등껍질이고 따라서 거북이의 머리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거북이의 머리가 세 살 된 내 아이의 머리처럼 크게 느껴졌다. 사실 비슷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거북이의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빅 아일랜드로 갔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오히려 내가 생생한 거북이 체험을 했다.

거북이가 10~30분 정도 숨을 참을 수 있으며 때때로 숨을 쉬기 위해 수면 밖으로 머리를 내민 다는 것. 거북이의 머리만 따로 보게 되면 순간적으로 뱀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는 것. 거북이 머리가 생각보다 크다는 것. 책이나 영상으로만 접했다면 몰랐을 거북이의 새로운 면모를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이 기억이 너무 강렬히 남아 하와이에 온 보람도 느꼈다.


다음에 기회가 되어 거북이를 또 만나게 된다면 유경험의 여유로움을 장착하고 도망가지 않겠다.

반갑게 인사를 건넬 것이다.


‘ 안녕! 거북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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