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몰리션> 해석과 시선에 대하여
우리는 인생이 반복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하루하루가 서로 상이(相異)함을 알 수 있다. 어제의 출근길에는 Coldplay의 Trouble을 들었지만 오늘은 Kungs의 This Girl을 들었고, 수리되지 않았던 화장실 문이 수리되어있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독특한 경험과 새로운 만남으로 가득 차 있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반복되는 삶에 지루함을 느끼고 인생의 재미를 점점 망각해간다.
장 마크 빌레 감독, 제이크 질렌할 주연의 영화 <데몰리션>은 주인공 데이비스(제이크 질렌할)가 교통사고로 아내(나오미 왓츠)를 잃으면서 시작한다. 아내를 눈앞에서 잃었음에도 데이비스는 이상하리만큼 평온하고 슬픈 감정이라곤 느끼지 못한다. 아내가 실려온 병원의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사려고 했으나 기계 고장으로 돈을 버린 데이비스는 자판기 회사에 항의 편지를 쓰기로 한다. 그는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쓰기 시작했다. 다음날, 그는 회사에 평소대로 출근하여 일을 한다. 그러다 물건들의 구성 요소를 파악하고 싶다는 충동에 하나씩 해체하기 시작한다. 삐걱거리던 화장실 문부터 깜빡이는 전등, 잘못 배송된 커피 머신, 회사 컴퓨터를 해체하여 바닥에 나열한다. 한편, 데이비스의 편지를 읽은 자판기 회사 직원은 그가 궁금해져 답신을 보낸다. 회사 직원과 시간을 보내던 중 그녀의 아이와 친해지게 되고 그는 자신의 집을 부수기로 마음먹는다.
해체와 파괴는 엄연히 다르다. 행위 자체가 다를 뿐만 아니라, 행위의 결과 또한 다르다. 해체는 하나의 제품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품을 파악하는 과정이다. 가령, 아이폰을 해체한다면 배터리와 무선 충전 단자, 화면 디스플레이, 블루투스 송수신기 등의 요소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이폰을 파괴한다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히 박살날 것이다. 데이비스가 물건을 해체하다가 파괴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해체의 결과는 해당 물건을 이루는 또 다른 기성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반면 파괴를 통해서는 사물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파괴는 해체보다 조금은 더 심오하고 숭고한 의미를 가질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핵심 소재인 집은 데이비스의 견고한 내면을 상징한다. 아내의 사랑에 너무나도 익숙해진 나머지, 그 속에 담긴 진심을 파악할 수 없는 견고한 내면 말이다. 데이비스가 자신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집을 해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는 파괴를 해야 했다. 그리고 집이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눈물을 흘렸다.
영화의 뒷부분에 나오는 회전목마도 마찬가지이다. 회전목마는 어렸을 때 재미있게 타지만 나이가 들고 나서는 잘 타게 되지 않는 놀이기구 중 하나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조명이 들어온 회전목마를 바라만 볼뿐이다. 어린아이의 시각이 사라졌고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때 회전목마가 재미있는 이유는 회전목마가 회전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이 회전하고 있다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세상이 아닌, 회전목마가 회전한다는 것을 아는 순간 놀이 기구에 대한 흥미는 사라진다. 단순한 원운동의 반복에 지루함을 느끼는 것이다. 영화는 현대인에게 회전목마를 바라보는 시각을 파괴하라고 말한다.
회전목마는 회전하지 않는다. 아니, 회전하지 않는다고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놀이기구로써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우리의 일상이 매일같이 반복되어서 재미없다고 느껴진다면, 하루를 바라보는 시선을 파괴해보는 것은 어떨까. 지하철이 움직이는 것이 아닌 주변의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고, 엘리베이터가 상승하는 것이 아닌 주변 환경이 가라앉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면 인생 속의 또 다른 의미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