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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적 해석가 Apr 01. 2023

라라랜드

빨간 꿈과 파란 현실의 보랏빛 투쟁

 사람들의 인생 영화하면 항상 <라라랜드>가 꼽히곤 합니다. 낭만적인 두 연인의 이야기. ‘만약에’라는 독특한 서사와 예쁜 색감이 주된 이유입니다. 저 또한 <라라랜드>를 낭만적인 두 연인의 이야기로만 기억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Mia & Sebastian’s Theme>을 들었습니다. 머릿속에 재생되는 엠마 스톤과 라이언 고슬링의 탭댄스 장면. 아찔하리만큼 아름다운 분위기와 색감까지. 그러나 그 이상의 무언가를 깨달았습니다. 낭만적으로만 묘사되는 사랑 이야기라기엔 치열하고 현실적인 괴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장 <라라랜드>를 다시 켰습니다. 분명 낭만으로만 가득 찬 이야기는 아니더군요.


 성탄절 주간, 낮의 LA 고속도로는 주차장처럼 막힙니다. 멈춘 차량에는 개개인의 사정이 있습니다. 멍하니 바라보는 사람,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사람, 연기 연습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라라랜드>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미아는 할리우드 세트장에 위치한 커피숍에서 일합니다. 유명 배우들을 만나면서 꿈을 키웁니다. 오디션에 참여하면서 말이죠. 번번이 퇴짜 맞기 일쑤입니다. 세바스찬은 식당에서 피아노를 연주합니다. 프리재즈를 좋아하지만, 재즈를 싫어하는 사장은 선곡표 대로 연주하라고 합니다. 미아가 피아노 선율에 이끌려 우연찮게 들어간 식당에서 세바스찬은 연주 중이었습니다. 둘은 관계가 깊어집니다. 재즈 바와 영화관을 함께 다니며 데이트도 하고 각자의 꿈을 좇습니다. 미아는 일인극을, 세바스찬은 키이스와 함께 밴드를 결성하여 전국 투어를 합니다. 꿈의 달성이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아닙니다. 서로에게도 소홀해져 시간을 갖자고 합니다. 그러다 세바스찬은 섭외 담당자의 전화를 받고 미아를 찾아 나섭니다.


 <라라랜드>는 총 5개의 장으로 이루어집니다. 겨울부터 가을까지 사계절을 거치고, 5년 뒤의 겨울에서 마무리되죠. 5년 전의 사계절은 미성숙한 아마추어의 미아와 세바스찬을 제시합니다. 미아가 세바스찬과 여름 파티에서 재회할 때, 둘의 대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Sebastian: Okay, I was an asshole. I can admit that. But requesting "I Ran" from a serious musician, it's just, it's too far.

Mia: My Lord, did you just say "a serious musician?"

…(중략)…

Mia: Uhh, the coffee shop on the Warner Brothers lot, that's a classic.

Sebastian: So you're a barista? And I can see how you could then look down on me from all the way up there.

 세바스찬은 스스로를 프로페셔널 음악가라고 말하고, 미아는 자신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둘은 꿈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죠. 둘은 연애를 시작하고, 서로의 꿈을 응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각박하죠. 결국 꿈의 높이를 낮추어 현실과 타협합니다.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고개를 들어보니 더 높이 있습니다. 5년 뒤의 겨울은 다릅니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꿈을 이루었습니다. 미아는 유명한 배우가, 세바스찬은 재즈바를 열었습니다.


<라라랜드>를 보며 떠오르는 영화가 많았습니다. <사랑은 비를 타고>, <카사블랑카>, <이유 없는 반항>입니다. 이 중 <카사블랑카>와 <이유 없는 반항>은 영화에 직접적으로 언급됩니다. 오마주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죠.

 오프닝 장면에 등장하는 노래 <Another day of Sun>은 <Singing in the rain>과 동치입니다. <사랑은 비를 타고>에서 주인공 돈 락우드(진 켈리)가 비 오는 밤에 비를 맞으며 노래합니다. 사랑에 빠진 심정을 그린 노래이죠. <Another day of Sun>은 태양이 작렬하는 대낮에 노래합니다. 미아가 친구들과 파티에 참여하러 가는 길에 보이는 수많은 간판의 몽타주와 탭댄스 장면, 상상 장면에 등장한 연극적인 구성은 전부 <사랑은 비를 타고>의 오마주입니다. 영화의 “Spring” 장은 <사랑은 비를 타고> 속 두 연인과 닮았습니다.

 <카사블랑카> 속 두 연인이 이야기하는 세트장 앞에 미아의 커피숍이 위치합니다. 미아 방 벽면 그림은 <카사블랑카>에 등장하는 배우 잉그리트 버그만입니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지구본 위의 모형 비행기는 <카사블랑카> 속 비행기입니다. “Fall” 과 “5년 뒤 Winter” 장은 <카사블랑카>의 오마주입니다. <카사블랑카> 또한 사랑하던 두 연인이 재회하지만 여자가 남자를 떠나가며 끝이 납니다. 즉, <라라랜드>의 전반부는 <사랑은 비를 타고>의, 후반부는 <카사블랑카>의 오마주입니다.


 <라라랜드>는 색채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주된 색상은 두 가지, 빨강과 파랑입니다. 빨강과 파랑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빨강은 꿈과 열정, 미아, 영화관을 상징합니다. 파랑은 현실과 세바스찬, 재즈를 상징하죠. 파랑은 영어로 Blue입니다. Blue는 ‘파랑’ 외에도 ‘우울한’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재즈는 정확한 기원을 알 수는 없으나 흑인 음악과 기존의 가스펠이 합쳐 탄생한 장르입니다. 재즈는 편안한 음악이 아닙니다. 세션들 간의 투쟁이며 싸움입니다. 이는 기저에 우울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파랑은 재즈의 공간, 세바스찬입니다. 반면 빨강은 영화관의 색깔입니다. 영화관 의자는 붉은색이죠. 영화관에서는 현실로부터 벗어납니다. 영화라는 매체는 관객을 몰입시켜 우주나 다른 나라, 가상의 공간으로 여행하게 해 줍니다. 다시 말하자면, 영화관은 새로운 공간으로 나아가는 도피처, 꿈입니다. 빨강은 꿈의 공간, 미아를 의미합니다. 미아가 일하는 세트장의 외부는 파란색이지만 내부는 붉습니다. 이는 현실의 외부와 꿈의 내부를 상징적으로 제시합니다.

 빨강과 파랑은 영화 전반에 걸쳐 서로의 자리를 차지하려 합니다. 파란 옷의 미아를 빨간 조명이 감싸고, 빨간 옷을 파란 조명이 감쌉니다. 두 색상은 이상하리만큼 섞이지 않다가 최후에 이르러서 섞입니다. 빨강과 파랑은 끊임없이 투쟁하죠.

 미아와 세바스찬은 서로에게 급속도로 빠집니다. 강하던 두 색상은 서로에게 서서히 스미기 시작하다 이내 보라색으로 변모합니다. 보라색은 빨간색과 파란색의 결합입니다. 보라색은 영화에 걸쳐 크게 2번 등장합니다. 첫째는 세바스찬과 미아가 언덕에서 춤을 추는 장면입니다. 미아와 세바스찬이 느끼는 사랑을 상징적인 보라색 톤으로 나타냅니다. 두 번째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세바스찬의 재즈바에서 나오는 미아에게 보라색 조명이 비춥니다. 이때의 보라색의 의미는 전자와 다릅니다. 현실과 꿈의 동치를 상징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볼까요. <라라랜드>를 처음 보고 올린 블로그 글에는 한 줄 평을 “푸른 꿈과 붉은 낭만이 점철된 보랏빛 과거”라고 했습니다. <라라랜드>를 낭만적인 영화로 기억한다는 증거이겠지요. <라라랜드>는 결코 낭만적이기만 한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재즈에 가깝습니다. 모르고 들으면 감미롭고 편안하지만 그 속에는 세션들 간의 치열한 자리싸움이 있습니다. 세바스찬과 미아라는 두 연인의 이야기는 언뜻 보면 낭만적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각자의 삶에서 치열하게 투쟁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적을 울리고, 일깨우며 말이죠. 그 결과 그들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성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라라랜드>는 가장 현실적인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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