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느다란 사랑은 끊어지기 마련이다
사람이 죽으면 제일 기억에서 먼저 없어지는 게 음성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 시야 정보는 깊숙이 남지만 음성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에서 왜 죽음을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사람들이 많겠다.
먼저 설명하자면, 내 기억 속에서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기 위해서다.
차츰차츰 잊기 위해서 이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을 해야 내가 편할 것 같아서다.
근데 나는 왜 음성이 아직도 기억에 남을까, 그녀의 그림에 자꾸만 목소리가 나오는 영상이 머릿속에 틀어질까.
지우고 싶고 잊고 싶다. 어쩌면 너무 긴 세월이 흘러 불에 그을린 쇳덩이로 낙인을 찍은 꼬리표가 이어지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상상하고는 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과 연애 중이지만, 가끔 나를 덧씌우지 않을까.
온전히 그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을까 싶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 목소리가 좋다고 했다.
그래서 처음에 호감이 갔고,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 음성이 이제는 쓸모 없어져 버렸다.
낮고 울리는 저음은 같이하던 안정되고 높은 톤의 목소리와 결별했다. 혼자서 덩그러니 남았다.
헤어진 후 처음에 내 목소리를 듣는 것을 의식해 보았다. 원래 이랬나 싶을 정도로 어색했다.
좋은 목소리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별 볼 일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 이유는 이 음성을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였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 없기에 좋고 나쁨을 들이밀 수 없었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어쩔 수 없이 귀에 꽃힌다.
금방이라도 내 이름을 언급하며 배시시 웃는 모습이 떠오른다.
역시 아직도 잊지 못했나 보다. 사랑에 데이고 베여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음성에 녹아있나 보다.
상처로 남은 추억을 다시 상기시키며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그것마저 녹아내리는 음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말 한마디가 뭐라고 그렇게 듣고 싶은지. 그녀의 음성보다 세상에 좋은 목소리는 널려있는데 왜 하필 고집해서 그것을 듣고 싶은지.
내가 예민한 건가, 아니면 원래 다 이런가. 무엇을 얼마나 사랑했기에 잊히지 않는 걸까.
화가 나지는 않는다. 짜증도 나지 않는다. 그냥 마음에 음성을 녹음하는 기능이 꺼진 것 같다.
그러니까, 텅 비어 있는 한 공간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그녀의 음성이 자꾸만 울린다.
바닥을 타고 벽을 타고 천장을 타고 올라온 음성의 기억이 뇌로 전달되는 순간, 알 수 없는 곤경에 빠진다.
제일 빨리 잊어야 한다는 강박이 존재해서 오히려 더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 내게 아직도 기억나냐고 질문한다면, 잊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머릿속에서 맴돈다고 해야 할까.
그 중간쯤에 위치한다고 하는 게 맞겠다. 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알다가도 모르는 게 이런 건가 보다.
기억 속 음성이 점점 압박해 온다. 아까 말했듯이 마음에서 뇌로 옮겨지면서 곤경에 빠지면 대부분 불안 증세가 나타난다.
그래서 압박한다고 표현했다. 기억, 추억 따위의 말로 이별을 포장하고 싶지 않다.
음성이라는 단어로 그녀의 목소리를 표현하고 싶지 않다. 그것도 다 기억과 추억이니까.
그런데도 왜곡된다. 포장지가 자꾸만 눈에 아른거린다. 선물을 뜯으면 그 안에는 텅 비어 있는데.
스스로라는 자아가 없어진 것 같다. 타인의 음성이 머릿속을 지배했는데 그걸 과연 내 자아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내 목소리보다 익숙한 그 음성.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먹는 쓰디쓴 에스프레소 같다. 그것도 아주 농도 진한 것으로 말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 상황에서마저도 에스프레소를 들이키는 것 같다. 어서 빨리 달콤한 디저트로 쓴맛을 없애야 한다.
디저트는 자유가 대부분이다. 자유로움을 만끽하며 족쇄, 속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음성 단 하나만으로도 자유에 족쇄가 걸렸다. 말도 안 되는 말. 자유의 족쇄.
나는 장거리 마라톤을 하는 중이다. 아직 자유까지는 멀었다. 그와 동시에 족쇄가 채워져있다.
족쇄를 달고 이 마라톤에 성공하면 그때야말로 완전한 자유를 누릴 것 같다.
녹음된 통화 내용은 삭제한 지 오래되었다. 그렇지만, 잔상은 남아있다.
잔상마저도 없애야, 기록된 음성이 하나씩 잊힐 때마다 난 완전한 혼자임에 가까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