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남자를 만났다

단편소설

by 집안의 불청객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이별의 슬픔을 마시면서 누군가와 만나야 한다는 강박감이 들었다. 이성적이든 아니면 우정이든 뭐든 종류는 상관없었다.


그러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는 오픈 채팅에 들어가 봤다. 작가 지망생들이 온라인 합평회를 하는 곳이었다. 나는 작가 지망생도 아니었고 글을 쓴 것도 고작 일기가 전부였다.


마침, 보이스룸이 열려있어 거기 무작정 들어갔다. 자기소개를 하고 나니 말할 것이 없어 가만히 들었다. 그중에서 힐튼이라는 익명을 쓰는 한 남자가 다음에는 나의 글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에 조금 망설였지만, 흔쾌히 대답했고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 이후에 내용은 대부분 사적인 얘기가 많았다. 좋게 보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고 나쁘게 말하면 친목질이었다.


온라인 합평회를 하는 채팅방이어서 지레 겁먹고 무엇을 쳐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사담도 꽤 많이 주고받는 것을 알았다. 간단한 안부부터 자신의 고민까지 털어놓는 이들도 있었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사람은 대표적으로 두 명이 있었다. 힐튼과 와이였다. 서로 존댓말이 원칙이기에 둘의 나이는 알 수 없었지만, 채팅으로 보아 만난 적이 있어 보였다.


금세 채팅방에 적응한 나는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글도 쓰는 걸 까먹지 않았다. 완성하고 나니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잘 썼다고 느꼈다.


합평하기로 한 날짜가 되고 보이스룸에 들어가자 나는 신나게 까였다. 설정 오류부터 부족한 자료 조사, 개연성, 재미 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까였다.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었고 조금 의기소침해졌을 때 힐튼이 말을 꺼냈다.


“웨이님 원래 처음은 다 이래요.”


처음은 다 그렇다는 말이 내 글의 성장과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이런 합평에 익숙해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가요. 좀 어렵긴 하네요.”


다른 사람들도 힐튼의 말에 동의하며 너무 자신감을 잃지 말라는 식으로 말했다. 그리고 합평이 끝나자마자 사담이 이어졌고 그와 동시에 힐튼은 모임을 가지자고 말했다.


사람이 고팠던 나였기에 당연히 참가한다고 했다. 사람들은 온라인에서 만나는 게 더 편한 건지 오프라인 모임에는 나오지 않았다. 고작 힐튼, 와이 그리고 내가 전부였다.


우리는 경복궁역 근처 미술관에서 만나 전시회를 본 후 점심을 먹고 그 이후의 일정은 그때 가서 정하자고 했다. 전시회는 유명한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입장료가 값이 꽤 나갔다. 점심은 그 근처의 맛집으로 정했다.




모임 당일 아침 일곱 시 반에 일어났다. 열 시까지였고 편도만 두 시간이나 걸렸기에 일찍 일어나 준비했다.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오랜만에 화장과 시계 그리고 반지를 착용했다. 버스를 타고 역에 도착해 지하철을 탔다.


원래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하는 버릇이 있는 나였기에 십오 분 정도 빨리 왔다. 오픈채팅방에서 서로의 위치를 물었고 딱 약속 시각에 그들이 도착했다.


와이는 키가 백오십을 조금 넘어 보이는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몸매가 드러나는 달라붙은 옷에 가을에 맞게 크림색 카디건을 걸쳤다. 힐튼도 남자치고는 백육십 정도 되는 작은 키였다. 그는 청바지에 와이셔츠 그리고 민소매 니트를 입었다. 두 개 정도 풀어진 단추에 그의 목선이 더욱 두드러졌다.


나는 생각보다 사람들의 외모를 따지는 편이었다. 그리고 양성애자이기에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외모를 중요시했다. 특히, 이번에 힐튼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나의 이상형과 매우 근접해 있기 때문이었다.


직접 만났기에 익명이 아닌 본명을 알아가야 하나 싶었을 때 힐튼과 와이가 자기소개를 익명으로 해버렸다. 그에 떠밀려 나도 웨이라고 소개했다. 힐튼은 스물일곱 살 대학원생이었고 와이는 스물세 살의 직장인이었다. 나는 백수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래서 취준생이라고 말했다.


전시회는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있었다. 그림이나 예술 쪽은 잘 모르지만, 옆에 있는 설명서를 읽으면 이해가 되었다. 와이는 사진이 취미인지 무거워 보이는 카메라를 들고 마음에 드는 전시품을 찍었다. 그러다 우리 보고 나란히 서 있으면 한 장을 찍어준다고 했다.


나와 힐튼은 미술관의 로고가 적힌 벽 아래 나란히 섰다. 사실상 처음 보는 사람과 찍는 것이기에 어떻게 표정과 행동을 취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는 사이 힐튼은 일상이라는 듯 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시트러스 샴푸 향이 코를 타고 올라왔다.


점심은 간단하게 일본식 라면을 먹기로 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세 명이 같은 메뉴를 시켰다. 먹는 속도는 내가 빠르게 먹기에 그들을 맞춰주었다. 삼십 분 정도 흐르자, 국물까지 마신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이제 일정이 잡히지 않아 무엇을 해야 하나 싶었다. 둘은 나와 다르게 게임도 하지 않았고 돈이 많이 드는 특별한 것을 하고 싶어 하지도 않아 했다. 결국, 노래방을 가기로 했다. 이른 시간이기에 코인 노래방을 선택했다.


노래 취향도 다 갈렸다. 발라드, 랩, 팝송 등 맞는 것 하나 없었지만, 그래도 아는 노래가 나오면 코러스를 하거나 같이 따라 불렀다. 통하는 듯 안 통하는 듯하며 아슬아슬하게 우리는 거리를 유지했다.


한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서로 대화를 나누고 싶어 카페에 가자고 했다. 아직 뜨거운 여름이었기에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향했다.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세 잔 시키고 앉았다. 대부분은 책과 집필하고 있는 소설의 얘기였다. 역시 온라인 합평회고 합평회인지 이 주제만큼은 우리를 뜨겁게 달구었다.


소설집을 추천하고 요새뜨고 있는 작가들의 이야기 그리고 작품들을 계속해서 떠들다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지나 있었다. 시간은 오후 네 시를 가리켰다. 와이는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온 탓에 피곤하다고 숙소에 가서 쉬겠다고 했다. 힐튼도 둘만 남기는 어색했는지 이만 집으로 향했다. 혼자 남아 할 것이 없어 집으로 가는 도중 담배를 피우는 힐튼을 발견했다. 자연스럽게 그의 익명을 부르며 옆으로 가 같이 담배를 태웠다.


우리는 우연의 일치로 집이 서로 가까웠다. 같은 지하철을 타고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 들어가 각자 다른 동으로 향했다. 마지막에 나는 앞으로 자주 뵈면 좋겠다고 했으나, 그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며칠 후 힐튼에게 연락이 왔다. 잠깐 앞의 편의점에서 맥주 한잔 하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묘한 감정을 품고 있던 나는 그의 연락을 반가워했고 그대로 수락했다.


도착하자 최대한 신경쓴 나에 비해 그는 운동복 차림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땀 냄새가 나지는 않았고 오히려 처음 봤을때의 은은한 시트러스 향이 베어 있었다.


네 캔에 만천 원하는 맥주와 육포 그리고 과자를 샀다. 힐튼은 무언가 고민거리가 있어 보였다. 맥주를 잡더니 거의 반 정도를 벌컥 들이켰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가 테이블 위에 닿았다. 그는 내가 먼저 물어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무슨 일 있으세요?”


“와이님하고 좀 다투었습니다. 최근에 걔가 온라인 합평회에서 나간 것도 그 이유고요.”


둘은 친해 보였었다. 무슨 이유로 싸웠는지 궁금하기도 그리고 그의 말이 끊기지도 않기를 바랐다.


“혹시 왜 다투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별거 아니었어요. 걔가 쓴 소설이 너무 엉터리여서 심하게 말을 좀 했거든요. 그러다가 감정적으로 번지고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싸운 거죠.”


내가 한 번 빠진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였나 보다. 어쩐지 채팅방의 분위기가 그 합평한 날 이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올라오는 말도 없을뿐더러 다들 고요한 침묵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힐튼은 계속해서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녀에게 무슨 감정이라도 느끼듯이. 그는 나와 함께 맥주를 샀기에 이 정도는 먹고도 안 취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각자 두 캔을 비우자, 그는 말꼬리가 늘어지며 행동도 느려졌다. 취한 게 분명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신에 관해 고백했다.


“사실 제가 웨이님 좋아해요. 저 동성애자거든요.”


그 말에 그리 충격받거나 거부감을 표하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냥 그렇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 또한 양성애자였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 둘 다 사귀어 봤으니 말이다. 그리고 아직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을 갈구하고 있었다. 마침, 오늘 집이 부모님이 여행을 가셔서 비었다.


“우리 집에 가서 한 잔 더 할까요? 저 혼자라서.”


너무 직설적으로 말했나 싶었다. 사람을 만만하게 보는 게 가장 싫었던 짓을 스스로 하고 있자, 그냥 그를 집에 데려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힐튼이 말을 꺼냈다.


“그러죠. 저도 한 잔 더 하고 싶네요.”


그는 내 이상형에 부합했다. 작은 키와 몸에 배어 있는 향 그리고 중성적인 목소리와 가느다란 선이 이유였다.

소주 두 병을 사고 그를 부축해 집 앞에 있는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가 취한 탓에 서로 잘 소통이 되지 않아 말하기를 멈추었다. 연속해서 담배를 피우니 혀가 아릿해졌다.


“인제 그만 들어갈까요?”


그 사이에 그는 술이 조금 깬 모양이고 아까 자신이 제정신이 아닐 때 한 말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아까 한 말은 죄송합니다. 만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어색하게 했네요.”


나는 그 말에 거짓말과 대답을 교묘하게 섞였다. 상대에게는 확신을 주는 동시에 스스로에게는 혼동을 주는 말을 뱉었다.


“아뇨. 저도 힐튼님 좋아해요.”


“아? 웨이님도 그쪽이세요?”


“그쪽이라고 볼 수 있죠.”


그와 반대로 내가 술이 취하는 것 같았다. 사람을 갈구한다지만, 이렇게 서로 갑작스럽게 노출하는 게 맞나 싶었다. 다시 어색한 기류가 흐르자 급하게 내가 말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시죠.”


같은 아파트 단지였음에도 그는 우리 집 안으로 들어오자 조금 놀랐다. 자신은 스물네 평의 집이라고 말하며 넓어서 탁 트인다고 했다. 그의 집을 보지는 않았지만, 예전에 어머니가 집 구조를 설명할 때 어떤지 대충 차이를 알고 있었다.


소주 두 병을 냉장고에 넣어놓고 집에 있는 식재료로 대충 안주를 만들었다. 다시 소주를 탁자에 올려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무슨 대화가 오고 가는지 바로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심하게 취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가 내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안으며 온기를 넘어선 뜨거운 열기를 나누며 포옹했다.


정신이 잠깐 차려진 나는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거부하는 이유는 갑자기 기억나지 않았으나, 이 상황을 상처 주지 않고 탈피해야 했다.


“담배 좀 피우러 바깥바람 좀 쐴까요?”


그는 대답 대신 비틀거리며 일어나 내 슬리퍼를 신고 흡연구역으로 같이 나갔다. 담배를 피우면서 그는 유독 침을 많이 뱉었고 한숨도 쉬었다. 한숨에는 아까의 시트러스 향이 사라지고 알코올 냄새가 퍼졌다.


집에 들어가서 그는 말도 없이 내 침대로 향해 누웠다. 땀이 많은 나는 샤워 후에 안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일어나자마자 숙취가 느껴졌다. 몸이 조금 열이 올랐고 속은 메스꺼웠으며 두통이 아려왔다. 그를 보러 내 방으로 들어갔지만, 없었다. 핸드폰으로 전화하려는 찰나 중간에 부모님의 전화로 집에 들어가서 미안하다는 연락 한 통이 와 있었다. 마음속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돌았다.


개의치 않고 괜찮다고 답을 한 후 해장하기 위해, 라면을 끓여 먹고 밖에 나가서 뜨거운 햇살 아래 땀을 흘렸다. 집으로 와서 샤워하자 몸이 좀 개운해졌다. 에어컨을 틀고 노트북을 켰다.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지금 일어났는지 어제 실수한 것은 없냐고 했다.


그 고백을 실수로 치부해야 할지 아니면 진실로 믿으며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만취한 사람을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결국, 본마음을 숨긴 채 아무 일도 없었다고 했다.


글을 쓰기 위해 켰던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잡생각들이 많아졌다. 나만 불편한 관계로 남는 듯했고 아까 진실을 말해줄 걸 싶었기도 했다. 그의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 진지하게 묻고 싶었지만, 마음속에서 울컥하고 한 번에 토해낼 용기는 없었다.



둘의 어색함을 남기기 싫어 내가 모임을 주최해서 만들었다. 매번 사람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힐튼과 둘만 있는 상황은 나오지 않았다. 그를 만나며 불편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방어 수단이었다.


힐튼은 거의 나와 마지막에 남아서 술이든 카페든 어느 공간에 함께 머물려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부모님의 독촉이라는 핑계로 그 자리를 함께하지 않았다. 매번 후회와 안도감이 반복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제대로 대하지 못하고 있다는 후회와 그와 이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만이 어디냐는 안도감이 말이다.



힐튼 그리고 나의 작품으로 두 시간 동안 합평회가 열렸다. 서로의 작품을 평가하고 부족한 점과 만족한 점들을 나열했다. 그리고 사담으로 이어지자, 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힐튼은 내게 물었다.


“웨이님 혹시 저한테 뭐 불편하신 거 있으세요?”


그 말투는 거부감을 나타내는 게 아닌 매우 공손했다. 어쩌면, 저번에 둘만 남아 맥주를 마시고 소주를 마셨을 때 한 행동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던 것 같다. 단둘만 있어도 말하기 불편한 상황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있어서 대충 부정의 답을 했다.


“아니요. 없어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그러자 힐튼은 약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말투로 답했다.


“다행이네요.”


그렇게 외줄타기를 시작했다. 심지어 밧줄은 굵지도 않았다. 외줄타기를 잘해도 밧줄이 끊어질까 염려했고 중간에 넘어갈까도 불안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어쩌면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있지만, 마음속에 무언가 걸려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둘 중 한 명은 끝장을 어떻게든 봐야 했지만, 용기는 없었고 나중에의 관계를 보장할 수도 없었다. 그런 무서움에 사로잡혀 우리는 가까운 우정이라는 표현으로 아슬아슬한 관계를 유지했다.




결국, 먼저 다가가기로 한 것은 나였다. 용기를 마음먹고 쳐내진다 하면 방에서 나가면 그만이다. 어떤 소문이 퍼질지 모르지만, 그것마저 고려하기에는 지금 내 시간이 낭비되고 있다. 먼저 그와 약속을 잡아야했다.


힐튼은 전시회나 구경거리를 좋아했다. 선뜻 연락을 하자 누가 더 나오냐는 물음없이 알겠다고 했다. 내일 당장 만나기로 했고 나는 무슨 옷을 입어야할지 계속해서 번갈아 갈아입었다. 어떤 옷을 입어도 성에 차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약속장소로 향했다. 그와 같이 출발하고 싶기도 했으나, 알 수 없는 거부감으로 십오 분 일찍 도착했다. 예상대로 그는 나보다 한 발 느리게 도착했다. 물론, 지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전시회를 보며 우리는 서로의 감정에 집중하지 않았다. 작품에 관해서 더 얘기하고 사진도 찍으며 어색한 기류가 흐르지 않게 자연스러워졌다. 마침내 밖의 정원에 도착하자, 사진을 찍는 도중 우리는 동시에 운을 띠웠다.


“사실….”


그 이후에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또 한 번 말했다.


“먼저 말하세요.”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말을 꺼내기가 애매했다. 대충 까먹었다고 둘러댔다. 전시회를 다 보고 사진을 넘겨 가며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서로 같은 메뉴 그리고 맞춰진 식사 속도 거기에 기본적인 예의까지 더했다. 어쩌면, 우리는 남모르게 서로가 배려하고 있을 수도 있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런 생각한 탓인지 나는 말을 잘하지 못했다. 그의 질문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잡생각에 잡아먹혔다.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으나, 그를 바라보면 다시 시선이 무너지고 말았다.


우리는 남자 둘이 함께 향수 공방에 갔다. 그곳에서 수십 가지 종류의 향을 맡고 향수를 만드는 데 집중하느라 거의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다. 조향사는 우리에게 남자 두 명이 함께 오는 걸 보고 우정이 돈독하다고 말했다. 그 말에 기시감이 느껴졌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게 흔들렸다.


그 후 저녁을 먹을 겸 술도 한잔하러 전집에 도착했다. 둘 다 소주가 잘 맞았으나 취기가 오르는 데는 탄산이 가득한 막걸리가 제격이었기 때문에 결정이 났다. 서로 무슨 말하려는지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사람들이 많은 탓인지 전이 나오는 데는 좀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서로 취하는 게 목적인 것, 마냥 막걸리 한 통을 비웠다. 속이 조금 쓰려와질 때 그때 도착했다. 힐튼은 배가 아주 고팠는지 두 개씩 집어 입에 넣어 오물오물 씹었다. 햄스터처럼 부푼 그의 볼이 나의 마음을 더 자극했다.


두 통을 비웠을 때 우리는 둘 다 팔 하나를 탁자에 기대어 몸을 실었다. 볼이 붉어진 게 어떤 효과 때문인지 헷갈렸다.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 그가 먼저 내 볼에 손을 올렸다.


“왜 뜨거워요?”


어떤 말을 꺼내야 할까. 지금이 좋은 타이밍인가. 섣불리 말하지 못했다. 침묵을 유지하자 그가 한 번 더 말했다.


“저도 뜨거워요. 너무 뜨거워서 주체가 잘 안돼요. 정신도 몽롱하고.”


말을 계속해서 돌렸다.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는 말을 뱉었다. 그는 내가 먼저 다가가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잠깐 쉴까요. 우리?”


그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좋아요.”


쉰다는 의미는 사실상 숙소로 가자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숙박업소 애플리케이션을 켰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어떠냐고 말했다. 어디든 나는 상관없었다. 다만, 대실이냐 숙박이냐는 조금 큰 차이였다. 대실일 경우 솔직히 실망감을 감추지 못할 것 같았다. 잠만 자는 사이로 치부될 수도 있기에 감정이 상할 것 같았다. 제발 숙박이라는 마음으로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가 예약을 마쳤다고 할 때 나는 보여달라고 하며 그의 폰을 강탈하듯이 재빨리 내 손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대충 사진을 보다가 결제 금액을 봤다. 그 순간 마음속의 폭죽이 터졌다. 숙박이었다.


그와 나는 전집에서 나와 편의점으로 향해 컵라면 두 개와 과자 두 봉지 그리고 소주 세 병을 샀다. 아마도 저걸 다 마시면 기억이 끊길 것이다. 나든 그든 둘 다 말이다. 숙소로 향해 체크인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자, 그는 적극적이었다.


“찝찝해서 좀 씻을게요.”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그가 씻고 나서 속옷 한 장과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오자 얇은 핏줄이 비치는 가슴이 드러났다. 그 시선을 급하게 떼고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그의 얇은 몸에 비해 내 몸은 굵은 선의 각진 얼굴과 잔근육과 대근육 사이의 몸매가 보였다.


가운 하나만을 걸치자, 마음의 벽이 얇아진 것 같았다. 그대로 소주와 가져온 안주들을 준비하고 마셨다. 처음에는 요즘 일상 얘기를 하다가 대화 주제가 점점 성적으로 이루어졌다. 여태까지 사귄 사람들, 취향 등 그러다가 이야기 갑자기 뚝 끊겼다.


그가 내 옆에 다가와 앉았다. 가운 사이로 드러난 젖꼭지가 보여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것은 유혹이었다. 악마일지 천사일지 아니면 인간일지 모르는 무언가의 유혹 말이다. 만취 직전까지 간 나는 그것을 뿌리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