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아들 시점
몇 년, 몇 달, 몇 주, 며칠 곧 다가올 나의 현실이다. 바로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할 시간이 점점 가까워진다.
부모님의 품이 따뜻하지는 않다. 사실, 이미 정신적으로는 독립을 한 상태다.
다만 경제적인 상태는 녹록지 않다. 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취직도,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돈을 축내고 있다.
둘 다 자립해서 용돈을 드리지 못할망정 이 꼬락서니로 글을 쓰며 기대감만 잔뜩 부풀어 있는 상태다.
계속해서 하는 도전과 이어지는 실패는 나를 추락시키고 자신감을 점점 잃게 했다.
그로 인해서 감당해야 할 대상이 되었고 그걸 감당할 주체는 부모님이었다.
절대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러나, 마음속의 진실은 계속 지원을 바란다고 말을 건넨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일주일 중 오 일을 아르바이트하면서 글쓰기를 병행했다.
아르바이트를 개인적인 이유로 그만두면서부터 시작이었다. 개인적인 이유도 핑계였지 그저 글에 집중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선 것이었다.
내 판단에는 근거가 부족했다. 사 년 동안 받은 건 작은 문단에서의 당선 하나뿐이었고 출간된 책도 자가 출판이었다.
그렇기에 더욱 절실했고 더욱 열심히 했다. 하지만, 창작과 예술이라는 게 그렇듯 결과는 늘 알 수 없다.
앞으로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했다. 그런 마음이 나를 급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스스로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세뇌했다. 그래야 나를 내가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데 그 세뇌는 깨지고 말았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을 깨게 만든 장본인이 나를 감당하고 있는 부모님이었다.
“이것 때문에 안돼. 저것 때문에 안돼. 난 네가 자신감을 잃을까 봐. 그게 걱정이야.”
고개를 바닥으로 처박고 눈을 내리깔았다. 긍정의 대답도 부정의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건 저 말이 다 맞지만 인정하기 싫은 내면과의 사투 때문이었다.
사투도 아니다. 그저 고집이었다. 절대 꺾이지 않았으면 하는 꽃이 가시를 두르듯 말이다.
가시가 차라리 완전한 방패 역할을 했으면 좋았을까. 아니면 그 말을 듣고 자신감을 가져 헤쳐 나가는 게 좋았을까.
무엇이 더 나았을지는 모르지만, 난 둘 다 실패했고 방패도 자신감도 얻지 못했다.
부모님의 쓴소리에 방패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현실감이라는 창이 방패를 관통했다.
근데 나를 찌르지는 못했다. 관통한 방패는 구멍이 뚫린 채 이도 저도 아닌 쓰레기로 몰락했다.
그 쓰레기를 버리지 못했다. 계속해서 들고 내 앞에 세워놨다. 남들 보기에 초라할 정도까지 말이다.
앞으로 나를 돌볼 자신이 없었다. 가끔 오는 공황과 우울증은 어쩌면 나를 돌봐달라고 광고하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수단처럼 쓰지는 않는다. 광고처럼 조금이라도 홍보하려는 목적도 아니다.
그저 정신과를 다니는 불쌍한 아들의 존재로서 남는다. 아직은, 지금까지는, 조금만 더 라고 하며 스스로 책임질 미래를 부모님에게 양도한다.
남들의 것을 강제로 빼앗는 강도와 사실상 다를 게 없다. 착취와도 다를 게 없다.
부모님의 돈을 뺏고 경제력을 뺏고 감정을 노동시키고 공감하게 만들어야 하는 그런 존재가 되었다.
잘못과 옳음을 판가름할 필요 없이 한쪽으로 치우쳐 매몰되어 있다.
당연히 잘못되었고 이 고리를 끊어내야 하는 의견은 나도 동의한다.
머리는 이성적으로 마음은 감정적으로 활동한다. 적어도, 나는 마음이 더 앞섰고 머리는 늦게 출발하는 후발 주자에 불과했다.
아까의 핑계처럼 감정으로 호소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 어느 정도는 허용된다지만, 이건 도가 지나쳤다.
이제 점점 지치기만 하는 나이에, 새로운 걸 시작하기 늦은 나이에 나라는 존재를 떠받치는 게 얼마나 어려울까.
그들의 눈에서 내 나이는 새로운 걸 도전하고 생기가 넘치고 활발할 때라고 인식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안 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없다. 이것도 어쩌면 감정적인 걸까.
누군가에게는 제일 큰 강점이 감정적이라는 말이다. 근데 나에겐 그것이 제일 큰 약점이다.
나는 앞으로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그 물음에 관한 꼬리표는 계속해서 괴로움을 느끼게 한다.
총을 머리에 맞아 즉사한 동물이 아닌, 하이에나에게 산 채로 뜯어 잡아먹히는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고통을 호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