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아들 시점
안락한 침실의 가정일까, 아니면 벗어나기 힘든 답답한 족쇄일까. 적어도, 나는 두 가지의 측면을 모두 만족했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의 에어컨이 나를 맞이했고 겨울에는 따뜻한 온실 속에 있었다.
그 세상이 전부일 줄 알았다. 그리고 전부여야 했다. 그곳을 벗어나는 것은 쉬웠다. 그러나, 벗어난 곳에는 닥치는 자연재해만이 존재했다.
험난한 길과 고생해야 하는 인생이 펼쳐져 있었다.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가야만 했다. 혼자 살아야 하는 구간이 존재했고 그 구간이 다가왔으니 말이다.
족쇄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 족쇄는 안락한 침실에서부터 비롯된 출발점이었다.
나를 계속해서 끌어당겼다. 아니, 내가 끌어당겼다. 왜냐하면, 그 족쇄에 출발점과 종착점은 내 고립의 여부였으니까.
사회라는 현실에 나가보니 그 족쇄의 끝이 너무나도 따뜻하게 다가왔다.
부모님은 그 족쇄를 가끔은 달게 해주었다. 하지만, 참는 데도 한계가 있듯이 결국, 놓아주어야 했다.
족쇄의 무게가 침실을 눌렀기에 나는 떨어질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족쇄가 풀리자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추락하듯이 미친 듯한 속도로 떨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좁아지고 할 수 있는 행동이 제한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아직도 침실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이불을 덮고 편안함을 누리고 싶었다.
그 마음을 버리지 못했고 그 마음만을 계속해서 바랐다. 현실이라는 바깥세상을 외면한 채.
다시 나갔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상처 입은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두려움에 휩싸였다.
두려움은 점점 커져 나보다 더 위에 있는 존재로 군림했다. 곧 있으면 잡아먹힐 게 분명했다.
잡아먹히는 순간 나에게 족쇄도 침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선택지 없는 문제에 갇혀 계속해서 맴돌 뿐이다.
부모님은 그 상황을 최대한 도와주려 했다. 두 가지 선택지 중 적절히 섞어가며 대처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잡아먹혀 그곳에 없었다. 애초에 없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존이란 본능만 남은 채 자아가 무너졌다.
이제는 즐겁지 않았다. 신나지도 않았다. 행복하지도 않았다. 어떤 영상을 봐도 목소리를 들어도 부드러운 촉감을 느껴도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는 나는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할 수 없는 노인과 같았다.
그저 남은 인생을 손가락으로 세어가며, 마지막은 편하게 가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나도 나의 마지막이 편했으면 좋겠다. 지금의 과정이 너무 힘들기에 고통스럽기에 말이다.
마치, 서커스를 강제적으로 하는 느낌이다. 남들의 시선에 발가벗겨져 추함을 드러내는 것 같다.
그럼에도, 주변의 압박에 꼭 행해야만 하는 행동과 선택이 정해져 있다.
그 행동을 하지 않으면 주변에서 따가운 시선을 보낸다. 따가운 시선은 뒤에서 단장의 모진 채찍을 발돋움하게 한다.
당근 없는 채찍은 그저 삶에 의미를 퇴색시키는 반복되는 굴레다.
그 굴레를 끊어내는 방법은 어쩌면, 부모님과의 완전한 단절이 아닐까 싶다.
그래야 혼자 자립하는 법을 배울 테니, 혼자 살아가야만 하는 인생이 남으니.
아니다. 어쩌면, 그곳에는 내가 없는 낙원이 펼쳐져 있을 수도 있겠다.
혼자서 살아갈 자신이 없는 만큼 자존감도 이미 손으로 느끼지 못하는 공기처럼 느껴지지 않으니까.
부모 안에 있는 공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족쇄와 같아지는 것 같다.
그 기로에 서 있다. 따뜻한 햇살은 온기를 주지만, 과도한 햇살은 화상을 주는 것과 같다.
어릴 때는 부모의 세계 속에 내가 존재했다면, 지금은 나라는 세계 속에 부모가 존재해야 한다.
그 방법을 계속해서 부모는 알려주려고 했지만, 거부하며 반발하는 나였다.
그 시절을 기억하며 인두로 지져 흔적이라도 남겨 적응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나에게 실망감이 크다. 지금 나는 족쇄를 선택하고 있다.
안락한 침실은 벗어난 지 오래였고 족쇄에 매달려 바닥에 있는 불구덩이를 회피하고 있다.
불구덩이는 점점 뜨거워지고 열기가 올라온다. 피부에서부터 화상을 입으며 천천히 고통 속에 빠진다.
좋지 않은 끝을 앎에도 족쇄에 달린 사슬을 놓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