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인생은 점수의 연속이다. 언제나 데이터를 수치화하고 그것에 따른 점수를 매긴다. 내 점수는 오십 점을 넘겨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무엇을 해도 결과가 좋지 않았고 불만족스러웠다.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남들 다하면 나도 해야지. 아니, 그것보다는 잘해야 하지라는 강박이 있었다.
그런 강박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그런 불안함은 점점 썩기 시작했다. 이윽고 우울로 빠지게 되었다.
점수라는 게 숫자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남들에게 인정받는 사회적 인정이 대표적이다.
그런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뒤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우울증마저 오자 평범함에도 미치지 못하는 점수가 되어버렸다.
남들은 위로하며 내게 말을 건넸지만, 나처럼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 말은 즉,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평가가 깔린 채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신과 남을 비교하며 상대적 성취감을 느끼기 위한 위로에 불과하다. 정신적인 것도 점수를 매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말을 줄이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마음을 터놓지 않는 법을 배웠다.
점수를 혐오하지만, 사회에 있어서 필요악이라는 게 한탄스럽다.
언제나 발전을 추구하는 사회에 있어서 낮은 점수의 사람은 환대받지 못한다.
이제는 능력만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정신적으로도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에 따라 의사는 병을 선고한다.
심리검사가 대표적이다. 얼핏 보면 치료의 일종으로 보이지만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걸 판별하는 중요한 자료로 이용된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사람 스스로가 초라해진다.
그래서 영원한 추락이 존재한다. 올라간 적이 기억나지 않아 내려가기만 한다. 그런데 내려가는 건 언제나 적응되지 않는다.
계속된 실패와 애매한 희망의 반복이다. 실패는 시도를 멈추게 하고 희망은 실망감을 높인다.
살아가는 것보다 버텨야 한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된 불행이 언제는 끝나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으로 말이다.
문제는 이것조차 애매한 희망과 계속된 실패라는 것이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게 되고 불행은 계속해서 갉아먹는다.
갉아먹는 불행은 다시 또 점수로 환원된다. 불행에도 등수를 매긴다. 의미 없는 짓들인 걸 알면서도 왜 그런 걸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쩌면 불행에 점수를 매겨 등수로 나타내는 사람들은 행복한 걸 수도 있다.
대부분 불행을 이겨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거나 아니면 불행에서 탈피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 이렇게 어렵게 컸어. 그런데 지금 이 정도다고 과시하는 것이다.
나의 시선에서는 그런 과시도 부러웠다. 그러면서도 거슬렸다. 내가 이루지 못한 어떤 것을 누군가 이뤘다는 점은 언제나 그랬다.
사회는 언제나 상대적이었고 그것에 딸려 오는 숫자들은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감정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잦다. 사회적 계층에서 내가 어느 위치인지 현실을 받아들이는 순간이 그렇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도 불행한 사람이 있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도 행복한 사람이 있다.
정리하자면 태어나자마자 점수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운명과도 비슷한 결이다.
점수는 정해져 있고 그 길을 따라 걷는 것이다. 출발점도 종착점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러 갈래 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고 삶이라는 하나의 길에서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걷는다.
약한 사람은 멀리 가지 못하고 강한 사람은 멀리 간다. 그 약함과 강함이 정해져 있다는 얘기이다.
그럼 나는 지금 얼마나 걸었는지 궁금하다. 제발 지금 이 상태가 다 온 거라고 믿고 싶지 않다.
그렇게 도태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실패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점수를 비난하면서도 점수에 제일 목매어 사는 삶을 살고 있다. 가장 싫어하는 무언가가 가장 거슬리는 무언가가 되듯이 지금 내가 그렇다.
이질적이게도 이 글을 쓰면서 나는 평가받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라지 않는다. 그저 내가 올라가고 싶은 마음만 있을 뿐이다.
그런 이중적인 생각의 충돌이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만악의 근원인 점수가 차라리 존재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물음을 던지고 싶다. 지금 당신의 삶에 점수는 몇 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