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페이지를 찢었다. 다음 페이지도 찢었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첫 페이지부터 글이 잘못 쓰여 있었다.
첫 페이지를 찢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시작마저 부정하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첫 페이지를 유지해도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균열이 생기고 틈이 생기고 그 사이로 누군가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망치는 사회이자 도덕이자 사람들이었다. 균열과 틈은 자아의 분열이었다.
다짐했고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만악의 근원인 첫 페이지를 찢기로 말이다. 그런데 첫 페이지를 찢으면 새로 무엇을 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태까지의 행보를 보면 똑같은 페이지를 만들어서 개고생할 뿐이다.
즉 새로워질 수 없다는 것이다. 바뀔 수 없다는 것이다. 고통의 재창조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깊은 고민에 빠졌다. 첫 페이지를 문제 삼지 않고 두 번째 페이지부터 정리해야 할까.
틀렸다. 다음 페이지에 뜬금없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이유가 있고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흐름이라는 게 존재한다.
그 흐름을 깨기에 나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도, 용기가 있지도 않았다.
아니, 용기를 내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평범과 거리가 멀어졌기에 어쩌면 비정상에 가깝게 적응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주변을 바라봤다. 다른 이들은 손에 연필을 쥐고 이미 두 번째 페이지를 어떻게 쓸까에 관해 고민하고 있었다.
나만이 첫 페이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미련인지 후회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언젠가는 벗어나야 한다고 말로만 중얼거릴 뿐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정체라는 건 멈춰있다는 것이지만, 남들이 앞으로 갈 때 정체라는 것은 퇴보와 다름없었다.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며 미래를 꿈꾸는 이들이 있을 때 미래를 신경 쓸 여력도 없는 나였다.
그들을 둘러보면 특출나지도 대단한 무언가가 있지도 않았다. 그냥 내가 부족하고 모자란 것이었다.
자책은 죄책감으로 번졌다. 모든 것이 미안했고 내가 잘못한 것 같았다.
내가 없어지면 조금이라도 더 깨끗한 사회가 될 것 같았다. 사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다른 이들까지 힘들게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다른 이들은 부모님, 친구, 지인들이었다. 그들에게 언제나 푸념했고 걱정을 끼쳤다.
공감해 주고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나가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자살한다고 말했고 차도에 뛰어들기도 했고 대교 난간에 올라가기도 했다.
그리고 남들에게 이런 짓들을 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그들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에게 멀어지는 사람을 볼 때마다 문제를 직시했다. 그렇게 만든 건 그 누구도 아닌 나라는 걸.
페이지는 넘겨지기 시작했다. 사건이란 건 존재했으니 말이다. 그 사건들은 사회에서 고립되어 가는 일관된 내용이었다.
재미도 감동도 흥미도 없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에세이도 소설도 자기계발서도 아니었다.
초라하고 불쌍하며 한없이 작아지는 누군가를 보는 듯한 기분의 페이지들이었다.
내 인생의 페이지를 남들에게 보여줄 때 수치스러웠고 부끄러웠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의 페이지를 보고 원동력 삼아 삶을 살아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대부분 이런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저딴 새끼도 사는데. 나라고 못 살 게 있나.”
내게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꺼낸 사람은 없지만, 시선이 그랬다. 마치 도축 당하기 전에 돼지를 보는. 사람 취급하지 않으며 아래로 내려다보는 그 시선.
그들은 내 페이지를 읽음으로써 자신의 우월함과 자존감을 높였다. 내 페이지는 나의 인생이 아닌 다른 이들의 수단에 불과했다.
많은 관심과 받은 나의 첫 페이지는 사랑과 축복과 응원은커녕 처참함만이 남았다.
찢으려고 하면 겁이 났고 가만히 두자니 날 갉아먹고 어느 선택도 하지 못했다.
내 첫 페이지는 악랄하고 지독한 도수 높은 술이었다. 입에 머금은 순간 독한 냄새에 뱉게 되는 그런 것들.
물질적으로는 다른 이들과 별 차이 없는 페이지였다. 그러나 그 페이지에 적혀 있는 잉크, 내용은 너무나도 달랐다.
숨이 막힌다. 어쩌면 숨을 쉬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책을 닫아 페이지가 보이지 않게 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