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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 14일차 어김없이 시작된 탈모. 예외는 없다!

뒤늦은 발견, 나의 아름다운 뒷통수!

by 타샤 용석경


모든 항암 치료가 머리카락이 빠지지는 않는다. 다만 유방암, 난소암 등 여성암 치료에 쓰이는 항암 약은 대부분 탈모를 동반한다.


유방암 치료의 클라이맥스가 항암이었고, 그 항암 부작용의 최고봉이 탈모인 듯하다. 누군가는 ‘암에 걸렸는데 그깟 머리가 대수야’ 혹은 ‘머리카락은 다시 자라잖아’라고 한다. 나도 안다. 머리카락보다 목숨이 중요하다는 거, 치료 마치면 또 자라는 거. 그렇지만 여자에게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지 않는다는 건 상상 이상으로 꽤 큰 충격이다.


심지어 나는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은 버킷리스트 중 하나가 ‘멋진 빡빡머리’였다. 다만 사회적 지위와 체면상(이라고 하지만 실상 용기를 내지 못했다.) 실천은 하지 못했었다. 그랬기에 ‘옳다구나, 내심 이렇게 꿈을 실현하게 되었구나!’ 위안 삼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하는 것과 항암 약에 의해 탈모를 당하는 건 달랐다. 그러니까 주변에 항암을 앞둔 친구나 지인, 가족이 있다면, 머리로는 알지만 상처가 되는 위로보다는 예쁜 비니나 모자 선물에 걱정과 따뜻한 마음을 담아 보내는 센스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나의 항암 당첨 소식에 비니와 두건, 가발용 모자를 보내준 친구, 평생 그 마음을 잊지 못할 거다.


고백하건대 비록 객관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몸뚱이지만, 숱이 적다는 것만 빼면 나의 머리카락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곱슬머리인 친구들이 항상 부러워하던 참직모, 염색을 한 것처럼 새카만 머리색, 린스를 하지 않아도 찰랑찰랑 윤기 있는 머릿결. 병원 진료를 보기 전 근처 탄천 산책을 하던 어느 날. 딱 어깨 길이의 단발. 걸을 때마다 머리카락이 어깨의 패딩점퍼를 스치며 ‘사락사락’ 경쾌한 소리가 났다. 예전이라면 알아채지 못했을 텐데. 막상 곧 사라질 거라 생각하니 내 머리카락의 아름다움(?)을 새삼 찬양하게 된다.


각설하고 항암 13일 차부터 머리를 주의 깊게 살폈다. 살짝 잡아당겨도 보았는데 아직 이상 무. 시간이 다가올수록 느낌이 묘했다. 뭉텅이로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는 기분은 어떨지, 빠지기 전에 멀쩡할 때 쉐이빙을 하라는데 막상 하려니 아깝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항암 치료 시작 전에는 내 몸에 어떤 반응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면, 탈모는 어떻게 될지 아는데도 겁이 났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정상으로 철커덕철커덕 서서히 올라가는 느낌, 곧 급히 하강할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근두근 공포는 커져만 간다.


막상 디데이가 다가오니 머리가 빠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그렇지만, 현실적인 문제들이 몰려왔다. 머리를 어디에서 밀어야 하는지, 가발은 어디에서 해야 하는지. 동네 미장원에 가자니 민망하고 혹여나 아는 사람이 볼까 꺼려진다. 가발 전문점에 가자니 괘 고가인데 아무 데나 가기도 망설여진다. 일단 급한 대로 가발 없이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부분가발과 모자를 준비하니 왠지 마음이 좀 놓였다.


14일 차 아침, 눈을 뜨자마자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기고 쓸어보았다. 아직은 양호하다. 하루 더 버텨주는 건가? 아니면 혹시나 내가 최초의 예외가 되는 건가? 하지만 탈모는 순간이동처럼 순식간에 찾아왔다. 아이들과 오후에 신나게 놀고 돌아와 세수를 하면서 머리를 스윽 넘기는데


‘두둥, 왔구나 왔어’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느낌적인 느낌. 뭉텅이가 아니라 아니고 서너 가닥에 불과했지만, 알 수 있었다. 예상과 달리 ‘뽑히는’게 아니라 스르륵 힘없이 손에 묻어나는 게 더 당황스럽고 무서웠다. 혹여나 정신력으로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은 이렇게 항암 약에 지고 말았다.


“드디어 시작됐어.”

나의 고백에 흔들리는 남편의 눈동자.

겁이 많은 남편은 내가 머리카락에 신경이 쓰여서손으로 스윽스윽 문지르는 걸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수술 때도 나보다 백배는 더 긴장하더니만, 왠지 쉐이빙 때도 위로를 받는 게 아니라 해주어야 할 것 같다. 미리 알아본 가발 전문샵에 연락하니 다행히 바로 예약이 잡혔다. 아이들에게도, 엄마에게도 내일 까까머리가 될 거라고 미리 공지했다.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막상 눈으로 보면 놀라겠지.


‘나의 고운 머리야, 지금까지 나와 항상 함께 해줘서 고마워. 약이 얼마나 독하면 견디지를 못할까.

잠시만 있다가 우리 다시 만나자. 예쁘게 잘 밀어줄 테니 그때까지만 잘 버텨주렴’




남편과 함께 가발샵으로 향하는 길. 머리는 내가 깎는데 왜 남편이 더 심각하고 비장한 거지.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동영상으로 찍을까 하다가, 좀 넘사스러울 것 같아 사진만 찍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니 아쉽다!!) 가발샵 안 쉐이빙 룸, 밝은 실내 공간, 익숙한 미장원 의자, 맞은 편의 대기 의자, 머리를 감는 세면대, 프라이빗하게 분리된 공간. 동네 미장원처럼 누가 들어올까 불안하지 않으니 좋다. 머리 깎는 것도 서러운데, 그런 것까지 신경쓰이면 더 서러웠을 것 같다.


20대 초반의 쾌활하고 예쁘장한 디자이너 샘, 왠지 밝은 느낌이 좋다.

“마음의 준비는 되셨어요.?”

잠시 후 가운을 걸치고, 마스크를 교체하고, 준비를 마치고 바리깡을 손에 들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이제 시작할게요. 잠깐만 안녕 하는 거에요.”


윙윙~ 짧은 대화였지만 배려가 느껴졌다. 가발샵을 찾는 여성 고객의 절반 정도는 항암 때문이라고 하니, 아마도 어떤 마음인지를 헤아리게 된 게 아닐까 싶다. 바리깡이 스윽 한 번 지나가자 머리카락이 뭉텅 잘려 나갔다. 아, 솔직히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두세 번 반복이 되고, 거울을 보고 있노라니 순간 영화 <라스트모히칸>이 떠올랐다. 내 평생 살면서 이런 용맹한 전사의 모습이라니 남겨두었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샘의 능숙한 솜씨에 미쳐 스톱을 외치지 못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바리깡. 점점 깎인 부분이 늘어날수록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이건 또 무슨 감정이지. 불과 몇 분 사이에 휘리릭 의식은 끝났다.


순간 돌 때쯤, 엄마가 머리숱이 많아지길 바라는 마음에 날 빡빡이로 만들고 찍은 추억의 올누드 사진이 떠올랐다. 그때 그 아기가 40년 만에 다시 비슷한 모습이 되었다. 비록 그때의 뽀송함은 사라졌지만 적어도 머리는 똑같아졌다! 이어진 샘의 칭찬은 나를 더욱 황홀하게 했다.


“두상이 정~말 예쁘세요. 동양인들은 보통 뒷면이 옆으로 퍼져서 머리가 크거든요. 저도 그래요. 그런데 정말 뒤가 작고 동그란 게 딱 서양인 머리에요!”

오!! 비록 몸뚱이는 전형적인 동양인이지만, 사십이 넘어 삭발을 통해 내 몸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머리를 밀지 않았으면 평생 알 수 없었을 비밀의 보물 같은 느낌. 이야기를 듣고 보니 동자승 같은 까까머리의 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동글동글 귀여운 게 나름 만족스럽고 흐뭇하다. 혼자서 막 셀카도 찍었다.


나와는 거리가 멀던 센 언니 느낌에 신이 났다. 그런데 밖에 나가기 위해 두건을 쓰니 순식간에 약해 보이는 나의 모습. 그렇다고 아직 민머리로 다닐 용기는 없었다. 눈물과 슬픔의 삭발식을 예상했건만, 나름대로 무탈하게 지나갔다.


기왕 밀었으니 스님처럼 광이 나고 반들반들한 머리가 되는 줄 알고 꿈에 부풀었는데, 나 같은 초단기 빠박이는 이를 수 없는 경지였다. 기간이 짧으면 머리카락들이 빠지다가 다시 나서 완벽한 민머리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쉽지만 일단 삭발을 해본 걸로 만족. 이제 머리카락으로 보호받던 머리 피부는 더 이상 보호막이 없으니 보습을 해주어야 한다. 두피에 로션을 착착 바르는 이 기분이란.


집에 오니 아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곧 날도 더워지는데, 계속 집에서 비니를 쓰고 있을 자신이 없다. 에이 모르겠다. 꼬맹이 앞에서 비니를 휙 벗었다. 3초간 보더니

“엄마, 두건 쓰는 게 더 낫겠다.”

“왜? 안 써도 이쁘지 않아? 엄마 이쁘잖아~”

“아니 그게, 안 써도 되는데, 써도 된다고~”


웃으며 도망을 간다. 살짝 신경이 쓰인 6학년 아들에게는 의도치 않게 민머리를 보였는데 쏘쿨~ 무심하게 휙 지나간다. 아마도 속으로는 놀랐겠지만. 그러나 나의 장난기는 멈추지 않고 아이를 붙잡아 말을 건넸다.

“아들, 엄마 머리 밀어도 이쁘지~?”

“아. 어... 머, 응.”


실은 주변에는 가족들, 심지어 남편에게도 민머리를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환자로서 맞닥뜨리는 많은 선택처럼 이것 또한 정답은 없다. 내 마음이 편한 대로 하기. 당황스러움은 잠깐, 집에서의 편안함은 길 거라 믿고 나는 편한 쪽을 택했다. 이렇게 적어도 겉으로는 태평스러운 나와는 달리, 엄마는 나의 삭발에 큰 충격을 받더니 이틀을 크게 앓았다. 나의 민머리를 보고 엄마는 한참을 엉엉 우셨다. 딸아이가 휴지를 건네며 엄마를 토닥토닥 안아주었다. 붙잡고 같이 울 수도 없고 괜스레 너스레를 떨었다.


“아유, 머리 이쁘게 낳아줘서 고마워. 덕분에 밀어도 이쁘네, 머리카락 나면 머리숱 두 배 된대. 안 그래도 머리숱 적어 걱정이었는데 잘 됐잖아. 울지 마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나도 만일 나의 딸이 아프다면 같은 마음이겠지. 아이가 희귀병을 앓았던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우리 애 머리 밀던 날, 둘이 붙잡고 펑펑 울었어.”


자식이 열 살이든, 마흔 살이든 부모 마음은 다 똑같은가 보다. 엄마는 그렇게 한참을 울더니만, 항암 전에 잘 먹어야 한다고 분주하게 장어를 굽더니 한 상을 차려주셨다. 호중구를 올리는데 장어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는 냉장고 가득 쟁여 놓으셨단다. 나도 아이를 낳고 키우며 엄마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항상 넉넉히 품어주고 살뜰히 챙기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기에는 아직 모자라는가 보다.


* 이 글은 22년 출간된 책 <유방암이지만 괜찮아> 내용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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