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치료 풀세트로 절대박멸, 가즈아!
두근두근.
기다리던 항암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 채혈 없이 진료만 보는 거라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라디오 방송에서 나오는 팝송을 흥얼흥얼 따라 하며 운전을 하노라니, 목적지만 병원이 아니면 멋진 드라이브인데!
며칠간 항암을 하거나, 안 하거나 온통 그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차가 신호에 걸린 사이 갑자기 ‘재발률’이 떠올랐다.
‘아, 내가 너무 욕심을 냈구나.’
암에 걸리고 나니 확률은 0 아니면 1이란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쩌면 아픈 몸이어서인지 미래의 숫자에 심리적으로 더 의지하고 영향을 받게 된다. 재발률이 낮아지면 좀 덜 불안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순식간에 ‘항암을 패스하지 않아도 좋으니, 재발률이 낮으면 좋겠다’로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의 시간은 항암을 안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료를 받아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니까.
오늘따라 유난히 긴 대기 시간. 시간을 보내려고 가져간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드디어 진료실에 들어갔다. 항상 그렇듯 담담하고 평온한 교수님의 목소리.
“수술 결과가 아깝게 2기네요. 2.2센티미터라. 1.9센티미터만 되도 1기인데. 항암은 해야겠어요. 엔도 결과가 3.4 밑이면 안 해도 되는데 3.7이네요. TC 4차로 할게요. 오늘 주사 맞고 가요.”
두둥, 항암 당첨!
마음을 바꿔 먹었지만 충격은 충격이다. 마음의 준비를 미처 완벽히 마치지 못한 터라, 항암은 다음 날 하는 걸로 부탁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다음 진료 때 확인한 나의 엔도 검사 결과. 10년 이내 재발률은 대략 14~15퍼센트, 항암 치료 시 재발률은 8~9퍼센트로 낮아진다. 즉, 항암 치료 효과는 재발률 6퍼센트 감소. 누군가에게는 작게 느껴지겠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크고 의미 있는 숫자이다.
이미 예상했음에도, 사실로 확정이 되어 정확히 전달을 받으니 느낌이 또 달랐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고, 한 발 건넸을 뿐인데 헬게이트로 진입한 듯한 기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항암 치료 시작 전 해야 할 일들과 바로 이어진 외과 진료, 휴직을 위한 진단서 발급까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항암 교육, 항암 관련 조제약 처방, 주사 예약, 백혈구 촉진제 주사 처방, 진료의뢰서 발급 등등.
바로 이어진 항암 교육. 그간 책, 카페, 언니들에게서 들었던 무시무시한 단어들로 가득 찬 항암 교육 책자. 마치 쇼윈도에서만 보던 옷을 입고 무대에 올라야 하는 느낌이랄까.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설명에 열심히 대답은 했는데 멘탈이 나간 상태라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수납을 하고, 처방전을 받아 수술 부위 흉터치료약을 받고, 2동 5층 항암 병동에 가서 주사 시간을 예약하고, 1동 2층 협진센터에 가서 진료의뢰서를 받고, 제증명 센터에서 진단서를 받고, 인근 약국에서 부작용 약을 샀다. 살면서 이렇게 큰 봉다리 하나 가득 약을 처방 받는 건 처음이다. 그냥 항암 주사 한 대만 맞고 오는 게 아니었다. 분주했지만, 다행히도 해야 할 일들 하나씩 하다 보니 정신이 돌아온다.
집에 오는 길에 나보다 더 결과를 기다리고 있을 엄마에게 소식을 전했다. 마음 편히 가지라고, 3개월은 금방 간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이야기했다. 엄마는 말은 알았다고 하는데, 아마 머리를 밀면 엄청나게 충격 받겠지? 집에는 나보다 더 충격에 휩싸인 남편. 목이 메는지 말도 잘하지 못하면서, 그래도 나를 위로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짠하다.
항암 당첨으로 치료 기간이 길어지게 되었다. 작년 가을 암진단 이후 뵙지도 못하고, 괜히 걱정만 끼치는 것 같아 알리지 못했던 시부모님께도 암밍아웃을 했다. 많이 당황하고 놀라신 눈치다. 저녁에는 왠지 맛있는 걸 먹고 싶었다. 집 근처에 눈도장을 찍어두었던 태국 음식점에서 그간 조심했던 기름진 것들을 실컷 먹었다. 항암도 해야 하는데 이것도 못 먹어? 하는 마음으로.
결과를 들은 뒤 가장 힘들었던 건 무얼까? 항암 치료 부작용은 1년 전 8차까지 항암을 하신 시어머님을 곁에서 봤고, 책도 여러 번 읽어서 알고 있다. 수술 후 약 2주간 느꼈던 ‘소중한 일상’을 누릴 수 없다는 것. 마치 달콤한 사탕을 입에 넣고 행복이 최고조에 달하던 그 순간, 강제로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화가 나고 속상했다.
힘들겠지만 견딜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이겠지. 이 또한 지나가겠지. 지나고 나면 긴 인생에서 불과 몇 개월의 시간일 거니까. 잠시 힘든 시간 속에서 가족 모두 성숙해지고, 서로의 소중함을 알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마음을 추슬렀다.
오늘도 정신없었지만, 내일부터 내 생애에 다시 없을 스펙타클한 경험이 시작된다. 항암은 3주 간격으로 4회. 일정이 밀리지 않는다면 21일씩 네 번, 84일이다. 84일만 잘 견뎌내면 된다. 제대를 기다리는 군인처럼 달력에 하나씩 ‘X’자 긋기. 그래도 치료의 종료 시점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지.
기왕 이리된 거 표준치료 3종 풀세트로 가즈아!
암순이 절대 박멸 아자아자!
* 이 글은 22년 출간된 책 <유방암이지만 괜찮아>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