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안젤리나 졸리 있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수술 직후에는 링거만 빼면 살 것 같더니만, 시간이 지날수록 배액관이 미치도록 불편했다. 불편하기만 한 게 아니라 관에 눌린 자리가 너무 아프고 따갑고 간지럽다. 벅벅 긁고 싶은데 그럴 수도 없고. 남들 보기 민망한 배액관을 조심조심 허리에 매달고 남방으로 덮고 다녔다. 마치 반쪽 임신부처럼, 걷다가 혹여 누군가와 부딪힐까 봐 달걀처럼 소중히 손으로 품고 다녔다. 요양병원에서도 배액관을 달고 있으니 간호사 샘도, 주변 언니들도 다들 안타까워했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배액관을 떼는 외래 진료 날이 되었다. 오예!!!
신나는 마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전신 마취 후유증이라 주장하는 나의 실수로 진료 시간을 헷갈려서 병원에 3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괜찮다. 그럴 수도 있지 뭐! 병원에 익숙해진 나는 혼자서 밥도 잘 먹고, 한적한 곳에 짱 박혀서 책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잘 놀 수 있다.
배액관 제거는 전문의 선생님이 해주셨다. 관을 뺄 때 아프다는 말에 긴장 반, 기대 반 진료 베드에 누워 대기했다. 선생님이 가까이 오시더니 갑자기 뜬금포 질문.
“어디 사세요?”
(순간 당황)
“예? 저요? 수원이요.”
이 무슨 상황인가 싶었는데, 제거할 때 아프니 말을 걸어서 긴장도 풀고, 정신을 다른 데로 분산시켜 주려는 나름의 노하우와 배려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초반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중간에 뭔가 펜치 같은 걸로 실을 확 잡아서 뽑는 느낌이 났다. 너무 아파서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진다.
“아파요? 에이~ 이건 안 아픈 거예요.”
(진짜 아픈데)
“요거, 요기는 좀 아플 거예요.”
(여기고 저기고 다 아프고만)
“5일 후에는 샤워하시면 돼요.”
“진짜요? 일주일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니고요? 수술 부위에 물 닿아도 돼요? 겁나는데~”
(참았던 통증과 긴장이 풀어지면서 폭풍 질문)
“다들 씻게 해달라고 아우성들이신데, 샤워하기 싫으신 거 아니죠?(웃으면서) 그렇게 허술하게 해놓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수술 부위에 붙인 테이프만 떼지 마시고요. 모양 예쁘게 되라고 붙여 놓은 거예요.”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나에게 선생님이 살짝 머뭇거리며 서지 브라에 피가 좀 묻었다고 하셨다. 배액관을 떼서 살 것 같은 마당에 그깟 게 대수인가, 흔쾌히 괜찮아요! 라고 외치고 돌아왔는데, 피가 정말 꽤 많이 묻어 있다. 헉.
배액관 하나를 뗐을 뿐인데 자유로움과 자신감이 팍팍 상승한다. 이제 더워도 꼭꼭 잠그던 지퍼를 열어도 된다. 자다가 돌아누울 때 배액관을 더듬거리며 눌리지 않았나 살펴보지 않아도 된다. 수술 후 회복을 위한 체조를 할 때도 관이 빠질세라 조심조심했었다. 아하하하! 배액관 안녕! 다시 만나지 말자!
참,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추억거리 하나. 수술 부위 압박을 위한 서지 브라는 속옷보다는 탱크톱 느낌이 난다. 거기에 옆구리로 빠져나온 수류탄 모양의 배액관 2개. 샤워는 못 하지만 땀이라도 닦아보려고 환자복 상의를 벗고 세면대 앞에 섰는데.
‘어맛, 와~ 왠지 걸크러쉬! 툼레이더 같아!’
나도 안다. 나의 뻘상상과 자뻑 기질이 만들어낸 말도 안 되는 조합이라는 걸. 하지만 어떠랴. 이렇게 또 한 번 웃는 거지. 나름 한창 새벽 수영을 열심히 할 때 식스팩도 살짝 있었다고 항변해 보지만 뭔가 어설프다.
그래도 자신감 뿜뿜 셀카로 인증샷도 남겨 놓았다.
* 위 글은 22년에 출간된 책<유방암이지만 괜찮아>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