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아름다운 세상이여~
기다리고 기다리던 감격스러운 날.
막항. 4차 중 4차 항암 vs 막항.
같은 말인데 왜 느낌이 다를까? 막항에 대한 설렘 때문인지 잠을 설쳤다. 급기야 새벽에 알람을 누르고 자는 바람에 병원 진료를 놓칠 뻔 했다. 허겁지겁 나서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비가 내려도 좋다. 막항으로 이미 기분도, 텐셥도 업업! 아침부터 온통 감사로 가득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새벽 빗길에 운전해서 안전하게 병원까지 데려다주신 기사님, 기계에서 해도 되는 수납까지 한 번에 해주신 데스크 직원분, 하나도 안 아프게 채혈 잘해주신 채혈실 직원분, 막항까지 고생했다고 격려해주신 친절한 간호사 샘, 막항 축하파티 하라고 케익을 선물해준 룸메이트 언니. 점심 식사를 못 했는데 고소한 단팥빵을 건네주신 기사님, 막항을 축하해주는 요양병원 간호사샘, 모두 모두 감사해요.
드디어 TC 4차 주사 투여. 그간 많이 찔렸는데도 혈관통도 없이 잘 버텨준 나의 오른 팔뚝, 예쁘고 사랑스럽다. 주삿바늘이 들어가는 순간 괜히 마음이 격해져서 눈물이 찔끔 났다. 4번을 언제 맞나 멀게만 느껴졌는데, 어느새 그 순간이 되었다. 정말 시간은 이렇게 가는구나.
‘스테로이드, 똥꼬 찌릿, 이제 안녕!’
‘도세탁셀, 나를 치료해줘서 고맙지만, 이제 너도 안녕! 이제 다시는 만나지 말자. 때로는 만나지 않는 게 더 아름다운 결말인 거 알지? 바이바이~’
‘사이톡신, 수영장 못 가서 아쉬워한다고 대신 코 맵게 해준 거, 이제 그만해도 돼. 그래도 고마웠어. 너도 안녕!’
손목에서 바늘을 뽑는데 또 혼자 감동해서 눈물이 찔끔.
‘정맥 주사, 영양제 말고는 다시 만나지 말자~’
피부 보호 밴드를 떼면서도 인사를 했다.
‘안녕, 굿바이, 바이바이~ 다시 보지 말자~’
작별의식으로 하나하나 사진을 찍었다. 심지어 식별표인 핑크 팔찌도 이젠 안녕!
치료를 마치고 약을 짓기 위해 밖으로 나섰는데, 비가 내려서인지 공기가 청량하다. 나뭇잎도 더 푸릇푸릇하다. 병원 앞은 차로 붐비고, 약국은 손님으로 붐볐지만, 지금의 나에게 온통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세상은 아름다워라~ A whole new world!
다만 이렇게 신나고 감사했던 마음은 요양병원 도착과 동시에 순식간에 피로감으로 바뀌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거의 한 시간을 기절해서 잤다. 일어나니 당황스럽게도 보통 2~3일 차에 나타나는 증상들이 벌써 조짐을 보인다.
몸과 혀의 부기, 다리도 묵직하다. 마지막이라 호락호락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인가? 나와의 이별이 그리도 아쉬웠더냐? 그래. 한 번 맺은 인연. 열흘, 길어야 2~3주면 사라질 터이니 내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너를 맞아 주리라. 제발 다시 만나지만 말자꾸나.
* 실은 항암 부작용은 꽤 오래 지속되기도 한다. 특히 손발 저림과 같은 말초 신경계의 부작용은 짧으면 6개월 길게는 2년까지도 지속된다. 당시 순진하기 그지없던 나는 막항을 하고 한 달 정도 후에는 모든 부작용이 사라지고 내 몸이 뿅 하고 예전처럼 돌아가는 줄 알았다.
이렇게 호기로움으로 가득 찬 마음과 달리 역대급 근육통을 겪었다. 마치 이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다는 듯이 세고 강하게 찾아왔다. 대체로 항암 중 사람마다 여러 가지 증상을 겪는데, 한 가지 주된 부작용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그게 근육통이었다.
5일 차에 진통제를 먹고 누웠는데 근육통과 함께 열감도 후끈. 한참 지난 듯해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옆으로 돌아눕지도 못할 만큼 통증은 심해졌고, 똑바로 누워있는데 갑자기 양팔이 저렸다. 열감으로 식은땀이 나고, 목도 타고,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갔다가, 다시 끙끙 앓다가. 어두운 밤, 모두 잠든 시간. 통증을 견디고 시간을 채우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다. 날이 밝는다고 아픔이 사라지는 게 아닌데, 얼른 해라도 떴으면 하는 마음으로 밤을 견뎠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던 긴긴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 보니 어느 순간 어슴푸레 날이 밝아왔다. 얼굴은 붓고 통증은 그대로지만 어둠을 벗어나는 하늘이 어찌나 반갑던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밤새 잘 견뎌준 스스로를 토닥였다. 힘들었던 밤은 아마도 고생하며 치료한 시간을 잊지 말라고, 그 마음으로 앞으로 오래 건강하게 잘 살아야 한다고 일깨워 주려던 게 아니었나 싶다. 힘들었지만 해는 다시 떴고,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
마음은 이렇게 무장을 했지만, 현실에서 나에게 필요한 건 약이었다. 항암을 하면서 깨닫게 된 중요한 사실. 여자에겐 옷빨, 화장빨이 아닌 ‘머리빨’, 항암에는 약발이 최고다!
막항 진료를 보면서 3차와 같은 약을 부탁했는데, 웬걸 필요한 약들이 죄다 빠져서 약봉지가 아주 슬림해진 걸 나중에야 발견했다. 괜찮다. 나에게는 다양한 항암 경험으로 무장한 든든한 동지들이 있으니까. 초강력 근육통에 대항하는 센 진통제를 공수했다.
선명한 빨강과 초록으로 나뉜 타원형의 알약. 다만 마약성 진통제라는 말에 살짝 겁이 나서 망설였다. 빨간 알약과 초록 알약 앞에서 고민하는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 네오처럼. 고민의 순간, 전날 밤의 공포가 떠올라 과감하게 약을 삼켰다. 결과는 대박! 통증도 덜하고, 아프지만 잠이 들어서 실제 느끼는 고통이 덜했다. 의료기술이 이리도 좋은 것을, 아플 때 먹으라고 만든 건데 아껴뒀다 뭐에 쓸라고 그렇게 맨몸으로 버텼는지 미련한 주인 덕분에 고생한 몸이 안쓰럽기만 하다.
비록 막항은 항암 치료만 마지막인 거고 뒤에는 다른 치료들이 주르륵 대기하고 있다. 2주 뒤 방사 치료 계획 3주 차에 골밀도 검사와 호르몬 치료, 방사선 치료 시작, 그 뒤에 산부인과 진료.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지만 거대한 항암산도 넘었는데 잘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시간은 가고 있고, 치료의 부작용은 점점 사라질 거니까.
나는 오늘 조금 더 건강해졌고, 내일은 더 건강해질 것이다.
* 이 글은 22년 출간된 책 <유방암이지만 괜찮아> 내용 중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