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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냥이 Oct 01. 2023

그림과 글

1

일하던 빵집 근처에 작은집을 구해서 살 때였다. 작은집은 처음 몇 개월은 다소 습한 기운을 다스리지 못해 두드러기가 나고 신경이 곤두섰지만, 어느 정도 길들이고 길들고 보니 괜찮은 집이었다. 그리고 정말 조용했다. 소음 유무는 따지지 않고 구했는데, 살고 보니 이렇게 조용한 곳이 있을까 할 정도였다. 다만 2층짜리 앞 건물과 거리가 너무 가깝다 보니 해가 정면으로 들지 않고 비스듬히 비추었다. 맑은 날도 오전 느지막이 빛이 들었다. 아주 화창한 날이어야 그렇다. 아닌 날은, 작은집에 있으면 하루종일 흐린 줄 안다. 

재미있게도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집이어서, 나는 이 책의 아름다움을 알았다. 『새벽』. 유리 슐레비츠가 그림을 그리고 단순한 문장으로 세상 풍경을 읊조린다. 그의 안내를 가만가만 따라가다 보면, 세상은 살며시 어둠이 옅어지다가 어느 순간 눈부신 빛의 세계에 들어선다. 복잡한 묘사와 사유 없이 바라보고 느끼는 감각만이 단순하게 이어진다. 작가는 세상도, 나의 사유도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저 멀리 서서 담백한 몇 문장과 그림으로 새벽을 전한다.  

작은집에서 잠들 때, 머리맡에 이 책을 두고 자는 날이 있다. 일어나는 순간 해가 세상을 비추는 찬란함을 느끼고 싶을 때면 그런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책장을 찬찬히 넘겨 세상이 빛으로 차오르는 광경을 보다 보면 어스름한 작은집에서도 눈앞이 환해진다. 눈뿐만이 아니다. 책에서 빛이 서서히 스며드는 과정을 바라보다 보면 설레기 시작한다. 호흡이 커진다. 수묵화처럼 담백하고 자신이 본 광경을 최소한으로 묘사한 겸손한 몇 문장이 있을 뿐인데 경이롭다.     


2

활자의 비중이 덜한 그림책에서는 머릿속에서 이미지가 편안하게 그려진다. 그 사이에 활자에 시달리던 뇌와 눈이 쉬는 시간을 누리는 기분마저 든다. 내게 그림책의 여백은 지면의 여백이기도 하지만 활자로 채워지지 않은 부분, 그림 자체이기도 하다. 그림 서사를 따라갈 때면 더 여유롭다. 시선을 한곳에 두고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한다. 정지된 종이이나 우리의 눈과 머리는 우리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이야기를 따라 능동적으로 움직이기에, 책 속 아이가 계단을 오르는 장면에서는 책 속 장면이 그 한 컷뿐이라도 내 이미지 세계 속에서 아이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지나 다음 장면으로 함께 이동한다. 

처음 그림책을 볼 때, 다양한 그림체를 보는 것도 좋았고 짧은 이야기에서 커다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점도 좋았다. 그림책을 조금씩 더 알아가며 욕심이 생겨 이 책 저 책을 보았는데, 오히려 혼란스러운 부분이 생기고 말았다. 글과 그림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어른은 글부터 어린이는 그림부터 본다는 문장을 읽은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른은 글자에 익숙하니 글부터, 어린이는 글자에 덜 익숙하고 그림에 더 익숙하니 그림을 먼저 봄이 당연할 텐데 그때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글에 먼저 눈이 가는 것 같았고, 그건 마치 내가 식상한 어른이라는 진단 같았다. 그 사실을 인식하며 그림책을 보려 하자 책을 읽는 게 부자연스러워졌다. 그림을 먼저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야기도 인식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창의적 독자이고 싶은데 눈은 한 번에 한 방향만 볼 수 있고… 이 어색한 시선 처리와 뻣뻣한 독서법은 성과 없이 흐지부지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편하게 그림책을 보았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지금도 한 눈에 한 면의 글과 그림을 한꺼번에 인식하지는 못한다. 한 시선 안에 담을 수는 있으나 글이든 그림이든 어느 한쪽에 더 집중한다. 제대로 보려면 한 순간, 그 다음 순간, 이렇게 두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글과 그림, 따로 또 같이 읽는다.  

처음 보는 그림책을 잡으면 앞면지부터 뒷면지까지 다 본다. 면지에는 섬세한 변화가 숨어 있을 때가 많다. 앞면지를 넘기고 속표지를 넘기면 전체를 큼직하게 본다. 분위기를 파악한다는 느낌으로 본다. 그러다 눈에 띄는 말은 더 읽고 그 장면에 조금 더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눈으로 익숙해지는 과정을 마치면 처음으로 돌아와 순서대로 책장을 넘긴다. 한 펼침면을 한 번 쭉 본다. 문장을 읽고 그러다 그림을 보기를 반복한다. 문장을 다 읽으면 그림과 전체를 다시 보고 내가 빠뜨린 부분이 없는지 펼친 화면 전체를 찬찬히 바라본다. 눈길이 닿는 곳에서 조용히 더 머물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한 장을 넘긴다.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읽다가 아리송하면 앞장을 다시 보고 오기도 한다. 그렇게 한 차례 또 보고 난 뒤에는 아무 쪽이나 펼쳐서, 또는 궁금해지는 곳을 펼쳐서 다시 본다. 그러는 사이 이야기와 그림 장면이 마음에 스민다. 그림책 장면이 아련히 내 기억과 내 이야기와 스친다. 장면과 문장이 융합하여 만들어낸 이미지가 실마리가 되어 기억과 사색이 풀려나오고 이어지고 그 속에서 유영하듯 고요한 즐거움을 누린다. 기억 속에 있던 아릿한 감정이 찾아오기도 한다. 책이 준 파동이 쉬이 멈추지 않는 일도 생긴다. 그러면 나는 말을 멈추고 그 속에 가만히 머무른다. 문장을 머금고 그림을 본다. 

『눈의 시』를 읽을 때의 과정이었다. 책의 성격에 따라 읽는 목적과 과정은 다를 수 있다. 읽는 속도도 달라질 수 있다. 『눈의 시』는 느린 속도로 음미하며 읽고 그러다 여백에 한참이나 멈추는 것도 어울리는 그림책이었다.

내 일부를 관찰자 시점으로 두어 그림책 읽는 나를 관찰했으나, 그림책을 볼 때마다 보는 과정을 이렇게 인식하지는 않는다. 맥락을 파악하고 글과 그림을 다시 보며 디테일을 추가하며 이야기에 대한 감상을 강화해 가는데, 그러면서 책과 내가 통하는 길이 열리고 넓어진다. 

때로 글과 그림이라는 두 가지 언어 앞에서 혼란스러워할 때가 온다면 내 독서 과정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읽기가 반복되고 익숙해지면 그저 물 흐르듯 이어질 것이다.      


3

나의 그림책 감상 초창기에 보기 시작해서, 보면 볼수록 감탄을 하다 어느 순간 걸작임을 깨닫게 된 그림책이 있다. 『리디아의 정원』이다. 어깨가 좁고 단발의 아이가 나오는 그림책이다. 처음에는 이 아이와 내가 닮았다는 얘기에 관심이 생겨서, 그다음에는 이 아이의 건강함이 좋아서 가끔 이 책을 꺼내 읽었다. 닮고 싶었다.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성격, 꽃을 잘 키우는 솜씨, 무뚝뚝한 삼촌 성격에 주눅 들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모습도. 이 아이는 내가 나이가 들어도 롤모델로 삼고 싶은 캐릭터이다. 

리디아는 생활 속에서 길러진 원예사이다. 책표지를 넘기면 앞면지부터 야채 잎사귀와 열매가 풍성하다. 야채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리디아와 리디아의 원예 능력에 큰 영향을 주었을 할머니가 보인다. 바구니 가득 담긴 야채, 잎이 무성하게 자란 밭을 보며 풍요로운 식사와 적당한 노동으로 건강한 일상을 떠올린다. 

그러나 리디아의 일상에도 어려움이 닥친다. 

리디아의 아빠는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지 오래고 아무도 리디아의 엄마에게 옷 짓는 일을 맡기지 않는다. 식구들은 리디아를 도시에 사는 외삼촌에 보내기로 한다. 이 장면에서부터 리디아가 엽서를 보내는 형식으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골집에서는 외삼촌에게 보내는 엽서, 시골집을 떠나서는 시골집 식구에게 보내는 엽서에 리디아의 일상과 마음이 담겨 있다. 첫 엽서는 리디아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삼촌에게 보내는 인사이다. 날짜는 1935년 8월이다. 미국은 여전히 1929년 10월 검은목요일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어려운 시대를 견디는 한 가족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리디아의 엄마 아빠의 구부정한 어깨를 보며, 그들의 근심이 하루이틀의 것이 아님을 짐작한다. 

리디아가 도시로 떠나는 날, 작은 기차역에 가족들이 모인다. 할머니가 리디아와 눈높이를 맞춰 인사할 때, 아빠는 아예 다른 곳을 보고 있다. 형편이 어려워져 딸과 헤어져야 하는 아빠의 마음을, 먼 곳을 바라보는 그 눈길에서 더 애달피 느낀다.  

리디아는 홀로 도시에 도착한다. 기차역은 황량하고 거대하다. 리디아 주변에만 빛이 들 뿐 온통 어둡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의 형체도 뚜렷하지 않다. 처음 보는 압도적 크기의 건축물 가운데에서 리디아는 작기만 하다. 그곳을 오가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이지도 못하고 동떨어진 모습이다.     


4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천성이 원예사에다 긍정적이고 건강한 이 아이는 곧 기대에 부푼다. 외삼촌과 함께 새로운 동네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리디아가 시골집 식구들에게 쓴 말을 직접 들어보자. “보고 싶은 엄마, 아빠, 할머니. 가슴이 너무 떨립니다! 이 동네에는 집집마다 창 밖에 화분이 있어요. 마치 화분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림 어디에도 화분은 보이지 않는다. 건물들 사이 빨랫줄에 가득 널린 빨래들, 철제 사다리, 검은색 쇠 테라스에 빈 화분 받침대가 있을 뿐이다. 부모에 대한 속 깊은 소녀의 배려일까 싶었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리디아는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챘다. 무미건조한 건물과 거리는 앞으로 리디아가 꾸밀 큼직한 캔버스였다. 이 삭막한 거주지 앞에서 리디아는 눈이 반짝거렸을 것이다. 앞으로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으니 말이다. 원예사다운 야망이다.

외삼촌의 빵집에 꽃이 하나씩 생겨난다. 꽃은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다음 해가 되자 외삼촌네 빵집 건물의 틈이란 틈에는 온통 화분이 놓여 있고 빵집 진열대 앞에도 꽃이 가득하다. 도시는 회색빛이어도 리디아가 일하는 빵집은 환히 빛나고 꽃을 보는 사람들은 즐거움에 취해 있다. 꽃은 거렁뱅이로 보이는 사내도 빛나게 한다.

꽃과 리디아의 능력이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이 정도의 기쁨을 주었다면 함께 사는 사람에게는 어떻겠는가. 

외삼촌은 삶의 무게를 지고 묵묵히 수행하는 듯 무뚝뚝하고 말이 없다. 표정도 없고 웃음도 없고 일만 한다. 그러다 리디아와 지낸 지 몇 개월이 지나자, 빵집 창 너머 리디아를 보며 슬며시 웃는 것 같다. 표정이 희미하지만 이 정도도 삼촌에게는 드문 표정의 변화였다. 그러다 리디아와 빵집 식구들에게 아름다운 선물을 받자, 처음으로 정면을 향해 눈을 활짝 뜨고 눈썹이 치켜 올라간 표정을 보여 준다. 무표정했던 얼굴에 나타난 생생한 표정의 변화는 읽는 사람의 마음도 기쁨으로 채워 준다. 좋은 쪽으로 큰 변화이다. 

생활의 무게를 버티듯, 무거운 몸을 버티듯 바닥을 단단히 딛고 선 두 발 하며 무심히 나온 배, 깜짝 놀라 어느새 펼쳐진 다섯 손가락까지, 그림에서 인물과 주변의 디테일을 찾아낼수록 인물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고 이야기의 생동감도 더한다. 그림의 디테일은 장면을 보충하며 이야기를 풍부하게 한다. 또 한 장면 속에서 다른 작은 이야기를 찾아내고 덧붙여 더 큰 이야기로 만들기도 한다. 경쾌한 분위기에 거침없는 그림 스타일이지만, 그림 작가는 디테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에 응하여 독자는 작가가 그려 넣은 디테일을 발견하는 과정이 즐겁다. 

시골집의 사정이 좋아져 리디아가 돌아가게 된 날, 기차역의 풍경은 리디아가 이 도시에 도착했을 때와는 아주 다르다. 배웅하는 빵집 가족들이 함께여서 화면은 가득 차 있고 노란 빛이 환하게 퍼져 있다. 헤어지는 장면이지만 따스하다.     


5

그림책은 꼭 글로 다 말하지 않는다. 이 책은 그 특징을 장점으로 잘 이용한다. 그림을 잘 보다 보면 이야기를 이해하는 폭이 더 넓어진다.  

『리디아의 정원』은 미국 대공황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대공황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그림책의 배경을 직접 설명하지는 않았다. 이 그림책은 평면적 서술 대신 리디아가 보낸 엽서로 진행되는데, 엽서의 내용에 대공황이라는 말은 없다. 다만 엽서 아래에 적힌 보낸 날짜를 보면 1935년으로 미국대공황의 시련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기이며 그림이 시대 배경을 뒷받침한다. 자동차, 옷차림, 집안의 가전제품, 무엇보다 빵집에 걸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액자를 보며 독자는 이 이야기의 배경을 1930년대 미국으로 상정하고, 그 시절 어려웠을 리디아 가족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그 가족만의 사정으로 어려울 수도 있으나 이야기가 대공황이라는 역사 사실로 이어질 때 이야기는 또 다른 커다란 배경 이야기를 끌고 오기에 작품을 바라보는 시야가 좀 더 흥미로워지는 점이 있다.

리디아가 1935년 크리스마스에 할머니에게 보낸 엽서에는 수선화 알뿌리를 보내 주어 고맙다는 인사가 있다. 테이블 위에는 할머니가 보낸 알뿌리가 보인다. 다음 펼침면, 1936년 2월에 보낸 엽서에서 리디아는 할머니에게 크리스마스에 보내 준 알뿌리에 대해 다시 고맙다고 한다. 두 달이 지나 또 고맙다고 하는 이유는, 그때 보내 주었던 알뿌리가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글로만 보고 지나갈 법한 작은 소식이지만, 빵을 만들고 있는 주방을 둘러보자. 리디아 뒤편 선반에서 활짝 핀 수선화와 히아신스를 볼 수 있다. 글에서 꽃 화분을 어디에 두었는지까지는 구체적으로 하지 않지만 우리는 주방을 둘러보며 할머니가 보내 준 알뿌리들이 얼마나 튼실한 꽃을 피웠는지를 보고 감탄할 수 있다. 그러면 비로소 리디아가 한 다음 말, “할머니가 지금 이걸 보셔야 하는데!” 이 말이 가리키는 바를 알아챈다. 비록 시골에서처럼 식물을 키우지는 못하지만 원예사로서 리디아의 능력은 녹슬지 않았다. 

리디아가 시골집으로 돌아와 다시 원예일을 시작한 뒤에는 이들의 바지런한 뒷모습만 보여 주지만, 또 하나의 변화가 있다. 오티스다. 빵집 고양이 오티스도 리디아와 함께 시골집으로 온 것이다. 이런 부분을 문장으로 일일이 밝히면 사소한 부연 이야기가 많아지지만, 그림으로 포함되면 숨은 이야기 찾은 듯 재미있다. 

모든 것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니 표현하는 작가에게는 함축일 수도 있고, 글과 그림에 적절히 배분하니 절약일 수도 있고, 그들의 노련한 그림책 작법일 수도 있다. 읽는 사람이 글과 그림의 적절한 배분과 각 역할을 알아내는 순간 그림책은 더 큰 즐거움이 된다. 

처음에 나와 리디아가 닮았다는 이유로 보기 시작한 이 책은, 20년 동안 시기마다 꺼내어 보고, 또 보고, 찬찬히 보며 이 책의 디테일과 그림책으로서의 묘미, 글 작가와 그림 작가가 다름에도 마치 한 사람의 작품처럼 잘 녹아든다는 점을 깨닫고 감탄을 했다. 책의 내면도,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도 어그러짐이 없이 잘 아울려 있다.     

6

이 책의 글 작가 사라 스튜어트와 그림 작가 데이비드 스몰은 부부이다. 데이비드 스몰은 다른 글 작가와도 함께 작업하며 많은 책을 냈다. 그가 그림을 그린 책들은 엉뚱하면서도 무례하지 않고 유머 넘치면서 발랄하다. 무엇보다 따뜻한 정서가 깔려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편안하게 독자를 이끌어준다.

데이비드 스몰을 알고 싶다면 그의 자전적 작품 『바늘땀』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제목인 '바늘땀'은 그의 몸에 남은 수술자국을 뜻하지만, 동시에 바늘로 찌르는 듯 가혹했던 어린 시절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어울린다. 워낙 그림체와 색채가 밝고 경쾌하기에 그의 가족사, 성장사가 너무 날카롭고 어두워서 놀랄 수밖에 없다. 데이비드는 십대에 후두암을 앓고 한동안 목소리를 잃었는데, 후두암 수술 뒤 적절한 상담사를 만나 현실을 직시할 힘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적 재능에 매진하며 자기 세계를 만들었다. 부모 대대로 내려온 담벼락 안의 병든 세계에서 벗어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멀찍이서 돌아볼 수 있었고 그것을 풀어놓은 책이 그래픽노블 『바늘땀』이다.

그리고 사라 스튜어트. 사라 스튜어트는 대학 시절에 데이비드 스몰을 만났는데, 데이비드에게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꼈고 마치 헤어졌던 자신의 샴쌍둥이와 다시 만나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글을 쓴 사라 스튜어트는 자신이 내성적인 아이였다고 기억한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정원에 누워 하늘을 보거나 곰인형과 일기장을 들고 옷장 속으로 들어가던 아이의 모습과 사라 스튜어트의 그림책 속 캐릭터는 닮았다. 여린 듯해도 나름의 강함과 즐거움을 지닌 내면뿐 아니라 외면도 그렇다. 사라 스튜어트의 사진을 보면 『리디아의 정원』의 리디아나 『도서관』의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작가인 사라를 모델로 삼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도서관』의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사라의 외면을 그대로 그린 게 아닐까 싶도록 머리 모양부터 닮았다. 어떻게 이토록 작가와 작중 인물이 자연스럽게 겹칠까. 글 작가의 영혼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림 작가가 리디아와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모습을 창조해서일까. 두 작가의 창작 과정을 상상하다 보면 사라 스튜어트가 자신의 남편이자 작업 파트너인 데이비드 스몰을 ‘샴쌍둥이’라고 한 데 대해 진심으로 동의하게 된다.     


7

『리디아의 정원』도 『도서관』도 모두 무겁지도 않은 내용이요, 따스한 데다 보는 사람에게 수월하게 감동을 전달하되 너무 가볍거나 인위적이지 않다. 두 이야기는 화려한 모험 없이도 완벽하고 영혼의 자유로움이 드러난다. 그림책의 완성도는 높지만 갈등이나 역경을 극적으로 표현한 이야기가 아니어서 호감과 감동 정도로 그칠 뿐 파괴적인 독서 경험에는 미치지 못할 것도 같다. 하지만 두 그림책을 읽다 보면 또 다른 영역에서 책의 놀라움, 책읽기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책 읽기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 세계가 그렇다. 어떤 책이든, 특히 그림책이라면 이미지 세계의 연출이 당연하나 이 두 그림책에서 글과 그림의 어우러짐의 묘미와 깊이, 자연스러움은 그림책의 수작으로 꼽을 만하다. 

그림책 작가들은 그림책이라는 장르로 여러 주제와 이야기를 담아내지만, 화합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때로는 글과 그림을 조합하는 공식이 지나쳐 일정한 도식을 따른 모양새가 되는 경우도 있다. 사라와 데이비드 부부처럼 한 명도 아닌 두 작가가 이만한 융합 효과를 거두는 것은 놀랍다. 게다가 이 대단한 능력이 이야기 속 주인공들처럼 욕심 없고 소박하게 펼쳐진다. 온 건물을 꽃으로 도배하고 집을 도서관으로 만들었다면 큰 야망이자 업적일 법도 한데, 주인공들에게는 그저 자연스러운 생활이고 삶의 흐름일 뿐이다. 

그림책을 전자책으로 만들며 애니메이션처럼 움직이는 효과를 넣기도 하고, 모니터 속 그림을 터치하면 꽃이 핀다거나 사물이 움직이는 효과를 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 과정이 궁금하고 관심을 두기도 했으나, 더 깊은 속마음을 말한다면 나는 그림책에서 인터랙티브 반응이 아쉬웠던 적이 없다. 얇은 종이에서도 생생히 전달되는 감각이 있어서이다. 평면의 종이에서 물소리를 떠올리게 하고 밤의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 효과가 놀라웠다. 『새벽』처럼 글과 그림만으로도 심상을 건드리기에 그 외의 장치가 필요하다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림책은 보편적 이미지로 전달하기에 맥락을 만들어내는 관점이나 시선은 다를 수는 있어도 이미지 자체에 대한 수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림책 이미지는 인간이 쌓아 온 보편적이고 불변하고 이미지 세계에 출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어슐러 르 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무도 드래곤을 만나 본 적이 없지만 알아볼 수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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