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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냥이 Oct 01. 2023

페르디난드의 경우 : 확장하는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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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좋아하는 소 페르디난드』에는 ‘그저’ ‘그냥’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두 단어는 무성의해 보이고 문장을 힘 빠지게 만들지만, 이 이야기에서는 주인공 황소 페르디난드를 대변하기에 적합한 단어이다. 페르디난드는 꽃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고, 다 커서도 그렇고, 호전적인 장소인 투우장에서도 그랬다. 꽃을 좋아하는 소답게 어디에서나 그저 꽃을 좋아하고, 그에 어울리게 행동한다. 투우장에 나오기 전, 작고 귀엽게 표현된 페르디난드의 모습과 거대한 투우장이 비교되어 페르디난드는 더욱 순진무구한 존재가 된다. 단순한 이야기에도, 솜씨 좋은 흑백의 펜화에도 유머가 스며 있다.

우스운 것은 페르디난드를 둘러싼 주변의 행동이다. 투우소를 찾으러 왔던 사람들은 때마침 페르디난드가 벌에 쏘여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보고 거친 황소라며 투우장에 세운다. ‘공포의 페르디난드’라고 부르며 벌벌 떨기까지 하지만 투우장에서 페르디난드는 평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투우사나 관중들이 보기에는 말이다. 페르디난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 때문에 투우사들을 울렸다.

이 책을 둘러싼 세상의 반응도 딱 이랬었다. 야망이란 털끝만큼도 없는 페르디난드의 이야기는 격렬한 역사 현장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금서 지시와 갈채를 번갈아 받았다. 글 작가인 먼로 리프가 40분도 안 걸려 써 내려갔다는 이 단순한 이야기는, 1936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책의 배경으로 그려진 스페인에서는, 스페인내전이 일어나고 프랑코 장군이 정권을 잡자 이 책을 금지했다. 평화주의의 비유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독일에서 히틀러는 이 책을 불태우라고 지시했으나, 전쟁이 끝나자 독일은 평화 인식을 고양하려는 목적으로 3만 부를 찍어서 배포하였다. 스탈린 통치 하에 있던 폴란드에서는 유일하게 허용된 비공산주의권 어린이책이었다. 작가인 먼로 리프는 자신은 어린이를 위해 이 이야기를 썼지만 더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초기 판매 부수가 높지 않았다고 하나 1938년이 되자 1주에 3천 부가 팔렸다. 라이프 지는 1938년 최고의 동물이 페르디난드일 거라고 하며, 어른 4명 중 3명이 자신을 위해 이 책을 샀다고 했다. 꽃을 좋아하는 소 그림책은 출간 이래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다.

사람들은 페르디난드 이야기를 계속했다. 투우를 좋아한 헤밍웨이는 페르디난드를 비꼬았고, 간디, 엘리너 루즈벨트는 페르디난드를 좋아했다. 사람들은 페르디난드의 성향을 두고 평화주의, 아나키스트, 파시스트, 다름과 젠더에 대한 논쟁 등을 뻗어나갔다. 나올 만한 주제는 다 나오지 않았을까 하지만 모를 일이다. 이 책은 아직도 많은 사람을 매료시키고 작가가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주제로 이야기하게 만든다. 그 사이 이 책은 출간 100년이 되어간다. 

이 책을 둘러싼 여러 논쟁을 얘기했지만, 이런 주제에 파고들고 나오지 않아도 『꽃을 사랑하는 소 페르디난드』는 그 자체로 매우 아름답고 긴장을 허물어뜨리는 유머가 있는 책이다. 나도 이 책의 뒷이야기를 알아서 이 책을 본 것이 아니었다. 책을 펼치면 스페인의 벌판이 섬세한 흑백 드로잉으로 펼쳐진다. 흑백인데도 유럽 남부의 맑고 새파란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연상된다. 첫 장면의 그림이 아름다워서, 스케치북에 연필로 따라 그리려고 책을 빌려 왔던 것이 이 책과의 첫 만남이었다.     


2

책은 어느 정도는 예상된 범위에서 읽힌다. 작가가 쓰고 나면 책은 그의 손을 떠나 독자의 것이 되고, 독자의 감상은 작가의 예상을 넘어서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범주 안에 있다. 그 안에서 자기 삶과 밀착된 이야기를 꺼내어 연결하는 독자도 있고, 크고 작은 디테일을 발견하며 책 읽는 재미를 배가하는 독자도 있다. 

그림책은 짧은 시간에 읽고 직관적으로 느끼고 찬찬히 여운을 음미하기에 좋은 장르이다. 어린이와 어른이라는 연령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어른이냐, 아이냐가 아니라 느낄 수 있을 만큼 느끼고, 볼 수 있는 만큼 본다. 어떤 장르든 그렇지 않겠는가. 그림책 작가 콜린 톰슨은 어린이책이라는 범주와 대상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며, 어른이 어린이책을 즐길 수 없다면, 그건 그 독자나 그 책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도 말했다. 

자신에게 감흥이 없는 책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콜린 톰슨 말대로 책이 문제일 수도 있고 독자가 문제일 수도 있다. 그보다 많은 경우는 그 시절 그 책과 그 독자 사이에 교감할 부분이 별로 없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무슨 책을 읽어도 교감할 부분이 없고 자신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자의 심드렁한 감상 습관에서 올 수도 있다. 그림책에 대한 안목이나 감식안을 갖추자는 말과 다르다. 피상적 느낌에서 멈추기를 반복하고 내 생각 밖의 세상을 탐색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의 이야기를 더 들여다보는가, 마는가, 그런 습관이 되어 있는가, 시도를 해 보았는가의 차원이다. 밖을 향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나를 향한 관심과 이해 능력도 중요하다. 

『꽃을 사랑하는 소 페르디난드』는 반응이 무척 다양하고 흥미로운 그림책이다. 종종 논란이 되는 그림책도 있지만 페르디난드 이야기처럼 해석의 갈래가 다양하지는 않았다. 페르디난드 이야기를 본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서 책을 대하고 격렬히 반응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무렵 격동의 세계사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고 그 이후에도 시대마다 떠오르는 새로운 주제로 작은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나치는 나치대로, 파시스트는 파시스트대로, 투우 찬성론자는 투우 찬성론자대로, 평화주의자는 평화주의자대로, 책을 해석하고 오해하고 분노하고 내세웠다. 한편에서는 책을 금지하고 한편에서는 이 책이 평화에 좋은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다. 

역사책에 다 기록되지 않은 개인의 감상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 그곳의 감수성을 그대로 따랐을 수도 있으나 아닐 수도 있다. 나치즘 하의 독일의 한 독자는 이 책의 은근한 유머가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성공을 구가하던 미국의 한 독자는 영광의 기회를 마다하는 페르디난드가 답답하다고 못마땅했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자신에게 충실한 이 황소의 삶이 너무 감격스러워 은둔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한 권의 그림책에 대한 이런저런 분분紛紛한 감상을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보여 주는 사례도 없을 것 같다.   

   

3

분분한 감상 중에 내 감상도 있다. 페르디난드를 읽고 난 뒤 내 느낌은 명쾌하지 않았다. 페르디난드의 온전한 삶에 마음이 편해지기보다 의심이 생겼다. 좀 심술이 난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결핍 없는 생이라니. 어려서부터 내 꿈과 남의 꿈을 구분하고 투우소가 되려는 다른 소들의 호들갑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 존재는 낯설다. 

그렇다고 페르디난드가 무엇을 한 것도 아니다. 페르디난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투우소로서는 정말 쓸모없었으나 그럼으로써 자기 생긴 존재 자체로 오롯이 남았다. 별 야망 없이 존재함으로써 존재가 드러나다니. 이 역설이 내게는 이 책의 가장 뚜렷한 특징으로 보였다. 내가 살아온 방식은 이 이야기에 미소 짓는 대신 혼란스러워했고 나도 기어이 페르디난드의 논쟁의 덫에 빠져 버렸다.  

페르디난드처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안하게 지내는 삶은 일단은 열심히 일해서 얻어야 하는 보상 같았다. 그러니까 노력 없이는 편안한 삶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깊게 있었다. 페르디난드는 태어나기를 그런 강박을 뛰어넘은 캐릭터이다. 내일을 기약하며 나를 괴롭히기보다 지금의 편안함을 편안한 대로 받아들일 수 있음이 신기했다. 이렇게 선택해도 되는 사람들이 따로 있는 것 같았다. 물질적 뒷받침이 된다거나, 그보다 더 중요한 조건은 특별한 성품을 갖춰야 하는 것 같았다. 어슬렁거리는 삶을 조급하게 여기지 않는 성품 말이다. 모두가 하나의 꿈을 좇는 속에서 다른 이들에게 휩쓸리지 않을 대범함도 그렇다. 

나와 페르디난드 사이의 큰 간격 때문에 나는 페르디난드를 그저 꽃을 좋아하는 소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신 페르디난드가 세상 물정 다 알고 그것을 조정하는, 능청스러운 캐릭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러면 내게 이 이야기가 명쾌해졌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쓸모 있기도 힘들지만 쓸모없기도 참 힘들다. 세상에 필요한 온갖 구실을 갖다 붙여 주니 매우 고마운가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쓸모를 갖추어야 하나 싶을 때도 있다. 쓸모없음조차도 쉽지 않은 세상이기에, 쓸모없어짐으로써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 자유를 획득한 페르디난드를 보며 세상살이에 능란하다는 생각마저 들고 만 것이다. “투우소가 되기 싫어요!”라는 투쟁은 고사하고 억지로 끌려 나오는 몸짓도 없이 스스로 걸어 나와 꽃향기를 맡았을 뿐인데 페르디난드는 자유로워졌다. 가장 격렬한 현장에서 일어난 가장 평화로운 행동이었다. 실제로 순진함을 가장한 능란한 수였든 아니든, 이 발칙한 존재들은 스스로 소외되지는 않을 것 같다. 자기 없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 같다. 누군가의 쓸모이기 이전에, 페르디난드족族은 스스로 존재하고 살아간다. 결핍 없는 생이다.     

 

4

페르디난드 정도로 휘말리지 않는 영역의 존재는 태어나기 전 도를 닦아서 타고나기를 그렇게 강하고 무심한 유형일 것이다. 나는 페르디난드를 개인주의자나 파시스트라고 하는 의견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렇게까지 세상 시류나 영웅심에 휘둘리지 않기도 어려울 것 같다. 어쩌면 그저 느긋함이고 안정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엄마의 영향이 분명 있다. 

페르디난드의 엄마는 기다린다. 세상 흐름과 달리 가더라도 재촉하지 않는다. 지켜보되 기다리고 아이의 성품대로 둔다. 지금이 농경사회처럼 자식을 가업 노동력으로 여기던 시대와 달라졌다는 점은 획기적 도약이지만, 자본주의 세상은 만만치 않은 굴레를 만들어 냈다. 노력하면 될 수 있다는 믿음과 약속이 장점이나 사회적 약속은 약해지고, 그럴수록 성공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조급함으로 팽배한 세상이 되었다. 자식에게 애정을 갖고 지켜보면서 동시에 관대하고도 인내심 많은 엄마의 덕목을 기대하기가 어떻게 쉬울까. 

『꽃을 좋아하는 소 페르디난드』는 다른 그림책보다 분량이 많다. 이 중 페르디난드의 엄마는 3컷만 등장한다. 잔잔한 모습이다. 엄마 소는 페르디난드가 늘 혼자 있으니 외롭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엄마가 페르디난드에게 이 걱정을 비치자 페르디난드는 그저 꽃 향기를 맡는 게 더 좋다고 답했다. 이 말에 엄마는, 페르디난드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내버려 두었다. 

“엄마는 페르디난드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어요.”라는 문장에서 나는 한참을 벗어나지 못했다. 엄마가 걱정한 것은 페르디난드가 남들처럼 뛰어놀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남들처럼 투우소라는 목표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아이가 외로울까 봐서였다. 네가 외롭지 않다면 그 모습도 괜찮다며 뒤돌아서는 모습은 너그럽다는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깊은 감정을 일으켜서, 한참이나 저 문장을 보고 있었다.     


5

이외에도 이 책을 보며 생각한 것들은 이렇다.     


- 흑백의 펜화가 매우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사실적이면서도 소의 표정, 코르크마개가 달린 코르크나무, 원형 경기장 장면은 우아하게 유머러스하다. 이 책만이 아니다. 20세기 초중반의 미국 그림책을 보며 어떻게 이렇게 잘 그렸을까, 하며 감탄할 때가 많다. 작가가 자신이 택한 매체를 다루는 솜씨와 개성, 드로잉의 자연스러움과 역동성, 이야기와의 어울림이 탁월하다. 지금보다 제한된 미술 재료에 인쇄기술로 보여 줄 수 있는 색도 한정적이었으나 몇 가지 색채만으로, 때로 흑백과 컬러가 교차하는 구성으로도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 

- 페르디난드 말고 다른 소들은 투우소가 되고 싶어하고 영광을 누리고 싶어한다. 틈날 때마다 박치기 연습을 하고 투우사들 눈에 띄기를 바란다. 페르디난드는 벗어나 있다. 모두 획일적으로 같은 꿈을 바라고 같은 삶의 모습을 이어가는데 내 모습과 내 생각만 다르다면 어떨까? 인식하지 못하면 모르겠지만 인식하는 이상 그의 삶은 어떨까?

- 시대에 따른 바라봄의 차이: 투우를 하나의 문화라며 비판을 거부하거나 투우라는 격렬한 과정을 제의와 카타르시스라 하여 높이 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잔인한 경기 과정을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 헤밍웨이는 1951년 「할리데이」 매거진에 ‘The Faithful Bull.’이라는 짧은 우화를 올렸는데 이 이야기는 ‘페르디난드라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한 황소가 있었는데, 그 황소는 꽃에 관심이 없었어요.’로 시작하여 ‘그 황소는 훌륭하게 싸웠고 모두 그를 존경했으면 그중에서도 그를 죽인 사람이 그를 가장 존경했어요.’로 끝난다.       


짧고 긴 생각 중에 몇 가지를 추려 보았다. 짧은 생각도 쓰다 보면 목록은 길어진다. 여기에 사람들이 먼저 제시한 주제까지 더해 본다면, 먼로 리프가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해석될 여지가 참 많다는 것을 또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야기뿐 아니라 페르디난드의 표정, 페르디난드의 근육, 페르디난드의 성향까지 모두 어떤 암시로 해석되고는 한다. 먼로 리프는 딱히 의도한 것 없이 모든 해석을 흥미로워했다지만 그래도 그가 의도한 것이 있다면, 그건 유쾌한 웃음이었을 것이다. 너그러운 이야기에 수많은 번외 이야기가 생겨났다.      


6

감상은 다양하다. 

가끔 맥락에 맞지 않고 뜬금없이 무례한 감상도 있다. 엉뚱한 감상은 있을 수 있고 나만의 맥락을 탈 수도 있다. 다양함이 무례함이 되지를 않기 바랄 뿐, 그런 감상은 막아야 한다거나 좋은 감상을 위해 고급 독자나 필자가 아니면 감상을 드러내지 말자고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안 된다. 전혀 의외의 주제에서 감동받는 것, 우연히 발견한 글귀에서 지금의 나를 읽어내는 것, 과잉 감정과 생각 등등이 다 내 생각, 내 느낌에 진솔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오히려 남의 이야기만 하는 방식을 더 경계한다. 남의 이야기만 읽고 남의 말만 전하다 그게 그의 생각인지, 남의 생각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경지를 경험할 때가 있다. 그것을 넘어서면 어떤 의견에 대해 감흥도 없고 실제로는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생각도 그러한 듯 말하게 되는 것 같다. 이것은 모든 게 경계가 없는 열린 경지가 아니다. 나의 의견, 나의 지성, 나의 판단 능력을 쓰지 않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럴 때도 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고 말하면서 속으로 뜨끔 하는 순간이 지나간다. 내 생각과 다른데 나는 왜 이렇게 말을 꺼냈던가… 순간 튀어나온 가벼움일 수도 있으나 때로는 더 깊은 이유일 때도 있다. 내 속마음과 욕망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은 게 있는지 살피며 내가 말하며 느낀 괴리를 찾으려 한다. 

남의 이야기와 남의 감상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 감상 또한 책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 타인에 대해, 나에 대해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하지만 그로써 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도움을 받는 것이지 그 말을 똑같이 내 말로 받아들이는 버릇을 들이고 싶지는 않다. 남들이 남긴 감상은 그것으로 됐다. 그것은 그들의 이야기이다. 

마음껏 읽고 마음껏 오해하고 그 오해의 과정에 있는 이야기를 살펴보는 게 내가 그림책을 보며 잘 하는 일이다. 나의 이야기라고 해도 언어도, 표현 방식도 세상의 것을 공유하고 영향을 받았으니 완벽히 나만의 것이라고 하지는 못한다. 세상의 언어와 이야기 형식을 취하는, 한 방식의 글과 생각이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는 지점은 완벽히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나에게 진솔하게 도달하고 그것을 탁월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글로 쓴 흔적과 생각이 아집과 철벽같은 무변화가 아니기를 바란다. 느릿하나 나는 변화하고 한 그림책을 십 년, 이십 년 동안 가끔씩 꺼내어 보며 그 변화를 감지하기도 한다. 

그림책에서 나와 닮은 주인공을 따라가며 내가 그 이야기가 되는 순간, 또는 그림책을 단서로 내 생각과 감정이 시작되는 기분을 즐긴다. 그림책 특유의 선함이 안정감을 주는데 그 안정감을 기반으로 나는 상상하고 공부한다. 그러니까 이건, 놀이이자 나의 마음의, 정신의 모험이다. 

내 글이 내 즐거운 놀이터를 잘 드러낼 수 있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내 놀이터에 매료되었다면 나는 영광이겠으나 그렇다고 내 놀이터를 그대로 이용할 수도 없다. 우리의 생각이 똑같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각자의 즐거운 놀이터를 꾸미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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