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정냥이 Oct 01. 2023

Ⅱ 빵과 지도

‘빵과 지도’라는 제목은 두 가지 책에서 따왔다. 하나는 유리 슐레비츠의 그림책 『내가 만난 꿈의 지도』이고, 또 하나는 『빵과 장미』이다. 

『빵과 장미』부터 설명하자면, 캐서린 패터슨의 이 소설은 1912년 미국 로렌스 시에서 일어난 대규모 노동파업을 배경으로 한다. 소설의 주인공인 로사의 엄마와 언니는 공장에 나가지 않고 파업에 참여하고 6학년인 로사는 학교에 계속해서 나갔다. 임금 삭감에 맞서는 이 파업에 대해, 학교 선생님은 선동가가 벌인 일이며 폭력적이고 추악하다고 비난하고, 가족과 이웃들은 공장 경영주의 방침은 가혹하고 이대로는 일을 해도 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라며 파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파업에 나선 가족들이 다치지는 않을까, 로사는 전전긍긍했다. 그런 걱정에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어느 때보다 이웃들과 굳건히 연대하는 엄마의 모습까지, 로사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파업의 구호가 필요할 때, 엄마는 공부 잘하는 로사에게 피켓을 써 주기를 요청하는데 이때 나온 중요한 두 단어가 빵과 장미이다. 빵은 생활의 기본 필요 자원이다. 말 그대로 빵을 의미하며 더 확장해서 따뜻하고 아늑한 주거 환경, 계절에 맞는 옷, 급급한 식사가 아닌 영양 요소를 잘 갖춘 음식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따뜻하고 배 고프지 않은 삶과 더불어 우리는 아름다운 삶도 원한다. 푸치니의 노래, 마음의 양식이 될 이야기와 말들, 세상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과 지식, 그러니까, 우리는 장미도 원한다. 배뿐만 아니라 가슴과 영혼도 채우는 삶을 원한다. “우리는 빵을 원한다, 그리고 장미도” 소설에서 이 구호는 이렇게 탄생했다.

로렌스 파업은 실제로 빵과 장미 파업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타이틀이 탄생하는 실제 과정과 소설 속 이야기가 다르겠으나 작가는 이런 식으로 빵과 장미에 담긴 상징을 설명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또 다른 주인공 제이크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안정된 거주지와 제대로 된 일을 찾게 되었다. 빵이 확보되어있고 사람에게서 진솔하고 따뜻한 감정을 경험했으며 일로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기회가 생겼음에 제이크는 야릇하면서도 환희로운 기분을 느꼈다. 

우리는 빵이 필요하다. 그리고 장미도. 의식주가 충족되는 삶이 다가 아니라 더 아름답고 그것을 느낄 수 있는 충만한 삶을 원한다.     


두 번째, 유리 슐레비츠의 그림책 『내가 만난 꿈의 지도』는 전쟁이 나서 온 가족이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이의 가족은 중앙아시아 어느 지방, 먼지바람이 몰아치는 곳으로 이주해서는 흙으로 만든 작은 집에서 다른 가족과 함께 살았다. 어느 날, 아빠는 빵을 사러 시장에 갔다. 이 장면에 글은 “아빠가 빵을 사러 시장에 갔어요.” 이뿐이다. 이어 그림에서 아빠를 찾는 순간,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구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시장에 가기는 했으나 돈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 그림은 아이가 저녁을 먹지 못하고 잠드는 장면만큼이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아빠는 늦게야 돌아왔다. 그런데 장터에서와 달리 아빠의 표정은 밝았다. 옆구리에는 긴 종이 두루마리를 끼고 있었다. 지도라고 했다. 빵이 아니라 지도라니… 식구들은 매우 실망했지만 아빠는 그렇지 않았다. 

배고프고 서글픈 밤이 지났다. 아빠는 벽에 지도를 걸었다. 아이는 곧 지도에 홀딱 빠졌다. 여기에서부터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지면은 온통 지도에서 시작된 아이의 상상으로 가득하다. 낯설고 이국적인 지명을 주문처럼 외우며 아이는 멀리멀리 세계 곳곳을 여행했다. 어둡고 작은 방 안이지만 아이는 날고 날아 사막의 뜨거운 기운을 느끼고 북쪽 나라의 눈 덮인 산을 오르고 신비로운 사원에서 새들의 노래를 들었다. 빵도 제대로 살 수 없는 돈이어서 대신 산 지도였다. 그러나 지도는 아이를 풍부한 상상으로 이끌었고 낯선 이주 생활의 고단함도 잊게 했다. 지도를 사온 아빠를 황망히 쳐다보던 아이는 이제 말한다. “나는 아빠를 용서했어요. 아빠가 옳았으니까요.”      


작가인 유리 슐레비츠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만든 그림책이다. 유리 슐레비츠가 네 살 때 바르샤바에 폭격이 시작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었다. 슐레비츠 가족은 폴란드를 떠나 그때는 소비에트연방, 지금은 카자흐스탄에서 한 6년을 살았다. 이 이야기는 유리 슐레비츠가 카자흐스탄에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이후 슐레비츠는 파리와 이스라엘을 거쳐 미국 뉴욕에 정착했다. 아버지가 사준 지도는 잃어버렸지만 슐레비츠는 기억을 떠올리며 그 시절의 이야기를 그렸다. 

빵은 너무나 부족했으나 지도로 견뎠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 그림책에서도 빵은 『빵과 장미』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기본의 의식주 자원을 말한다. 시선을 지금으로 돌려보자. 지금은 유리 슐레비츠가 이야기하던 시절보다 빵을 구하기 쉬워졌다. 빵으로 상징되는 의식주 자원은 다양해지고 많아졌고 섬세해지고 호화로워졌다. 지도도 그렇다. 구하기 쉬워졌다. 또 지도 속 많은 장소를 직접 가볼 수도 있다. 지리적으로 확장되었고 문화적으로도 넓어졌다. 쉽게 많은 정보를 모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 슐레비츠보다 지도에서 풍부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을까? 어린 슐레비츠가 지도를 보고 상상하고 자신의 이미지 세계를 신나게 넓혀가던 것과 비교하면 지금 우리의 호기심, 탐구하는 버릇,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힘은 어떨까? 어린 슐레비츠보다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으니 슐레비츠처럼 즐겁게 상상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이 글을 시작했다. 여기에서 지도는 실제 지도이자, 온갖 머릿속 탐구와 탐험 활동이 일괄적으로 그려진 데이터이며, 이것은 다시 우리의 생각과 상상 활동의 기반이 된다. 시각화된 지도가 가장 일반적이지만 그건 우리 사회가 시각 위주로 되어 있기 때문이지, 촉각, 청각 등 다른 형태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현대에 들어 교육과 미디어 영향으로 시야가 넓어지고 상상의 세계를 넓힐 재료가 훨씬 많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이 상상의 기능을 활발히 쓰는 것 같지는 않다. 일상적 탐구로 자신의 세계를 즐겁게 넓히지도 않는다. 오히려 상상할 필요가 없어진다는 생각마저 드는데, 상상 이미지가 너무 잘 구현되기 때문이다. 드라마, 게임, 영화, 가상현실 설계자 등 상상 전문가가 있고 이들이 상상을 현실의 이미지로 내놓는 솜씨는 놀랍다. 상상은 만인의 것이고 상상력은 만인의 능력인데, 특정 직업인들이 상상을 구현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만들어놓은 상상을 즐기고 소비하는 모양새 같다. 그들의 상상을 평가할 뿐이다. 상상 전문가의 능력에 웅장한 상상을 맡기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상에서 한 치 앞의 생활 상상에 매달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상상이 현실과 동떨어진 놀이는 아니다. 상상의 역할은 일상에서도 중요하다. 업무에도, 문제 해결에도 다각화된 상상은 필요하다. 삶의 이해력에서도 그렇다. 삶의 모습이 다양함을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자신의 인생 경로 안에서 자신의 잣대로밖에 보지 못한다. 자신의 경로 이외의 삶을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 자신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모으는 과정이 된다는 사실도 간과한다. 자신의 세계를 넘어설 수도, 넓히기도 힘들고 늘 같은 우물로 되돌아간다.

상상의 재료도 풍부해졌고 표현법도 다양해졌으나 현대인은 이래저래 상상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쓰지 않는다. 이 적극적 놀이를 이끌어가기에 우리는 너무 피곤하다는 사실은 안다. 그렇다면 다소 느릿느릿 놀더라도 이 상상과 지도 만들기 놀이를 해나갈 수 있다. 빵이 필요하듯 지도도 필요하다. 이 놀이는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게도 하고 세계를 더 크게 보게 하며 멈춰야 할 지점에 멈추도록 돕는다. 지금 당장 나의 좁은 공간을 넘어설 방법은 상상뿐이다. 상상은 내 좁은 현실을 넘어서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일상에서 시적 삶을 돕는다. 

물론 감상에서 장미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런데 그림책은 이미 장미의 역할을 잘하고 있다. 미적 체험, 감정의 정화, 감성의 자극제로서 그 역할을 잘하고 있기 때문에, 장미보다 지도로서 그림책의 기능을 제안한다. 상상력, 자신의 세계를 넓혀가는 힘도 장미의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접근 방식이 다소 다르다. ‘빵과 장미’ 대신 ‘빵과 지도’를 말하는 이유이다. 

그림책에는 지식 욕구, 탐구심, 호기심을 건드리고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지도의 요소도 많다. 이 그림책 중 몇 권을 짚어가며 정신의 지도, 마음의 지도, 상상력의 지도를 확장해가려고 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상상의 재료가 등장할 것이다. 상상력과 이해력은 경험과 지식이 융합한 드넓은 대지에서 더 잘 작동한다. 이 책의 2부에서는 그림책 작가들이 만든 가상의 세계를 탐험해보려 한다. 그들을 따라 다른 나라로, 먼 옛날로, 상상의 대지로, 우주로 떠날 것이다. 그리고 돌아올 것이다.     

이전 04화 그림과 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