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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냥이 Oct 01. 2023

백과사전과 꿈이 만든 세계

1

백과사전 백과사전은 오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들여다보고 있으면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저 글씨일 뿐인데 그 글씨들을 읽으면 내 머릿속에서, 마음에서 활발히 작용이 일어났다. 기대감에 부풀고 호기심을 계속해서 자극하고 가끔은 세계의 비밀을 읽는 듯 긴장했다. 나는 꿈을 만들고 꿈속 세계를 헤매듯, 백과사전의 글씨 사이를, 행간 사이를 여행했다. 

나한테 백과사전은 놀이터 같은, 놀이터보다 더 재미있는 책이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지식은 상상의 재료였다. 백과사전의 흥미로운 항목 자체가 상상의 단서가 되고, 하나의 항목으로 끝나지 않고 단어를 따라 다른 항목으로 옮겨가면서 내가 고고학자라도 되는 듯, 단어의 틈새에서 인류가 몰랐던 힌트라도 알아낸 듯, 기대감과 탐구심이 샘솟았고 심장은 둥둥 울렸다. 

사전의 제1목적은 어떤 것의 설명을 읽고 지식을 얻는 것이지만 내게 사전은 ‘종횡무진’, ‘중구난방’, ‘미로’ 같은 특징을 가진 놀이이자 공간으로 떠오른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도서관이 있다. 책과 책 속에서, 책과 책에 전달되고 단어와 단어에 인도되어 누군가는 이미 지나갔을지도 모를 길을, 어쩌면 내가 처음 알아챈 길을 탐험한다. 알게 되는 기쁨은 그 하나를 아는 데에 그치지 않고 다른 호기심으로 넘어가며 관심거리가 되었고, 상상의 기본 작업이자 자극제가 되었다. 

열대여섯 살 때쯤, 잠잘 때면 머리맡에는 백과사전이, 베개 옆에는 펜과 종이가 있었다. 음악도 있었다. 밤에 하는 영화음악 방송이 배경으로 깔렸고 나는 이불 속에 누워서 백과사전을 읽고 흥미로운 항목은 종이에 썼다. 이스터섬의 모아이나 사라진 문명에 호기심이 동할 때여서 관련 항목을 모으고 혼자 심각하게 추리와 탐구에 나섰다. 

종이와 펜의 목적은 또 있었다. 꿈을 기록하려는 준비였다. 백과사전에서 읽은 항목 중 마음에 드는 장소, 옷, 인물 등은 한 번 읽고 눈을 돌리기가 아쉬웠다. 그렇게 인상적인 항목은 눈으로 꼼꼼히 읽으며 머릿속으로는 그것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그려보았다. 그러니까 백과사전의 무수한 항목은 상상의 시작점이었다. 호기심이 중구난방으로 튀어대니 내 산만함으로 소품 격의 판타지 이야기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신 그 재료들이 알아서 이야기를 만들어주기를 바랐는데, 단편적인 꿈에 그것을 기대했다. 잠들기 전에 한껏 받아들인 재료가 어떤 모습, 어떤 스토리를 입고 꿈으로 상영될지 기대하며 잠들었다. 마법사의 제자가 마법 세계로 빠져드는 기분이 이랬을 것 같다. 백과사전은 꿈으로, 마법으로, 상상 세계로 넘어가게 하는 주문서였다.     


2

 꿈은 내가 보고 들은 이미지의 모음이다. 하지만 각각의 이미지는 나만의 것이 아니다. 꿈속 이미지는 나를 포함한 인류가 살아오며 본 수많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다. 나는 인류의 보편적 이미지를 사진, 이야기, 그림, 영상 등으로 학습하고 받아들이고 흡수해왔다. 그것이 내 열망, 근심과 결합하여 꿈에서 서사를 갖추고 나타난다. 꿈의 서사는 특정한 지리를 배경으로 하여 감정의 탐험과 모험이 일어난다. 내가 분석한 내 꿈의 생성 과정은 이렇다. 

꿈속 세계는 내가 본 것의 합이었으나 내가 본 조합대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내가 보고 생각한 온갖 것들이 현실의 모습과는 다른, 어떻게든 변용을 거친 세계로 펼쳐진다. 내가 잠들 때, 내가 받아들인 이미지, 지식, 경험, 감정, 사유가 서로 엉키고 스며들고, 그 혼란에서 꿈이 생성되고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 

근사할 장면을 볼 때도 많다. 긴 풀이 무성한 초원이었다. 마른 풀빛이었다. 하마의 듬직한 등에서 학처럼 목과 다리가 긴 새가 날아올랐다. 그렇게 건조한 빛깔의 초원에 있다면 코뿔소가 어울리겠지만 꿈에서는 하마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꿈에서는 집에 가는 길에 별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파도에 조약돌이 굴러다니며 부딪히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짙은 보랏빛 밤하늘에서 별자리가 움직이는 것을 밤새 황홀하게 바라보던 꿈도 꾸었다. 더 최근에 꾼 꿈에서는, 투명 엘리베이터가 고속으로 아름다운 단풍숲을 지나 시퍼런 바다까지 나아갔다. 분명 눈을 감고 일어난 일이지만 꿈은 시각적이다. 단풍숲을 지날 때는 너무 아름다워서 경이로웠으나 바다까지 나가자 감정은 달라졌다. 바다는 짙푸른 색이었고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그 위를 나 혼자 있는 투명 엘리베이터가 시계추처럼 흔들리자 공포가 밀려왔다. 

어떤 때는 꿈에 보이는 이미지의 출처와 근원을 알지만 모든 꿈이 다 그렇지는 않다. 이 장소 저 장소가 섞여 있기도 하다. 내가 어디서 그런 곳을 보았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완벽히 낯설 때는 드물다. 내가 어딘가에서 보고 듣고 인상 깊게 여기던 것들이 어렴풋이라도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모양이다. 때로는 꿈을 꾸고 나서, 내가 인식하는 세상이 넓어질수록 내 꿈도 더 넓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천문학에 관심을 두기 전에는 꿈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거나 은하수를 본 기억이 없다. 천체가 나오는 꿈은 일 때문에 수많은 천체사진을 본 뒤에야 꾸었다.

가끔 깨자마자 꿈을 아직 기억할 때, 꿈의 내용을 제법 자세하게 메모해 둔다. 하지만 그림으로 남기지를 못한다. 시도는 했다. 꿈 세계의 형태는 기억 속에는 또렷한데 직접 손으로 그려내려니 모호했다. 머릿속 상상을 그림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이 나한테는 어려웠다. 그런데 이 책은 꼭, 꿈의 모호한 세계를 구체적이고 확실한 형상으로 제대로 그려내어 눈앞에 펼쳐놓은 것 같았다. 이야기의 배경, 세부 요소, 장소의 근거가 있되 각 요소가 가지런히 놓인 게 아니라 엉키고 스미고 섞여 있다. 그러니까 인류가 무의식에서 꾸는 꿈처럼 인류가 보아온 것이 온통 뒤범벅되어 새로운 이야기와 그림으로 나타난다. 내가 꿈을 만들어내는 과정과 닮아서인지, 나는 이 책을 꿈의 영역에 둔다. ‘오르배 섬 사람들이 만든 지도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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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배 섬 사람들이 만든 지도책’ 시리즈 앞에 백과사전과 꿈을 먼저 말하는 이유는, 이 책의 느낌이 딱 그러해서이다. 백과사전과 꿈의 합작이다. 백과사전의 ‘종횡무진, 중구난방, 미로’라는 특징과 꿈의 생성 원리가 맞물려서 작동한다. 내가 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읽던 백과사전처럼, 인류의 보편적이고 공통된 이야기가 모여 만들어낸 세계 같다. 

이 시리즈에는 A부터 Z까지 알파벳을 닮은 26개의 나라가 등장한다. 박물학적 지식을 엮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는데, 지식, 편집, 상상이 결합한 허구의 세계이다. 그러나 완전 허구는 아니다. 지구 속 세계나 죽은 자들의 도시 같은 게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가 그린 26개의 나라는 지구 위 어느 장소와 닮은 듯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인명과 지명이 현실과 겹치기도 한다. 지칭하는 대상은 똑같지 않지만 실제 존재와 비슷한 범주에 있다. 오르배 섬의 지리학자 오르텔리우스Ortélius는 16세기 유럽의 지도제작자인 오르텔리우스Ortelius와 이름이 같고, 바이칼바일란이란 이름 일부에는 바이칼 호수가 포함되어 있으며, 얄레우트인Yaléoutes은 알류산 열도Aleutian Islands 쪽에 거주하는 알레우트인Aleut들과 거의 비슷한 이름이다. ‘거인들의 섬’에서 땅에 반쯤 묻힌 거인석상을 보면 이스터섬의 모아이가 떠오른다. 다양한 문화요소에서 모티브를 따왔으나 실제 사실과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약간의 세계사와 문화 요소를 짐작할 때 더 재미있는데, 그럴 때 이 이야기들은 전설과 역사의 묘연한 경계에 놓여서 이야기의 매력이 살아난다. 지리적 미지를 향한 호기심뿐 아니라 마법, 전설, 무속 같은 정신적 미지에 대한 감성도 스며있어서 신비하고 불온한 매력도 있다. 이국적 풍경, 아름답고 기이한 문화와 그곳에 참여한 이방인이 신비하고 고조된 감정을 이어가며 풍기는 분위기는 낭만주의 이야기 모음집 같다. 

모든 작가가 이야기를 만든다. 이 시리즈의 작가 프랑수아 플라스는 그중에서도 지리적 배경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만든다. 제목에 등장하는 ‘오르배 섬’은 큰 섬이긴 하나 이 시리즈에 나오는 나머지 25개 나라를 대표하거나 다스리는 제국이나 왕국이 아니다. 26개 나라는 서로 교역하고 방문하며 소식이 오간다. C에 해당하는 캉다아 만은 교역이 발달한 항구이다. 이곳 공원과 항구에서는 바일라바이칼에서 왔다는 웃는 두꺼비, 셀다 섬에서 들여온 호랑이가 있고, 닐랑다라의 기린을 볼 수 있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또 다른 나라들이다. 연꽃 나라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 연꽃 나라 사람이 아닌 캉다아 사람 제논이다. 캉다아 선단의 선장이었으나 연꽃 나라의 자연과 문화에 매료되어 그곳에 오래 머물며 연꽃 나라의 일부가 된다. 26개 나라를 조절하는 하나의 커다란 정부는 없다. 개별 나라의 지도는 있으나 전체 세계를 담은 지도는 나오지 않는다. 각 나라는 독립적 문화와 체제를 유지하고 교역과 탐험 정도로 느슨히 연결된다. 그들에게 영향을 주는 가장 큰 요인은 땅이다. 땅과 기후, 즉 지리적 요소이다. 

오르배 섬의 지리학자들은 지도로 기록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지도를 만드는 것으로 세상의 이치를 알 수 있다고 믿었다는데 그들이 만드는 지도는 큰 땅의 지도만이 아니다. 한 지리학자는 뜰에 사는 개미의 세계를 수백 장의 지도로 만들었고, 다른 학자는 구름의 모양, 색깔, 만들어지는 과정, 이동 등을 구름 지도로 만들려고 했다. 이오니아 시대의 과학자들이나 알렉산드리아 도시에서 당대의 온갖 지식이 교류해서 갖가지 탐구가 이루어지던 것처럼, 오르배 나라에서 지도 만들기가 그랬던 모양이다. 이들에게 지도의 주제는 분방하고 탐구는 자유로웠을 것이다. 

오르배 섬 지리학자들은 모든 것을 지도로 기록하기 좋아했다고 하지만 정작 오르배 섬의 지도는 명확하지가 않다. 오르배 섬은 알파벳 O처럼 동그랗게 생긴 섬인데 섬의 안쪽땅은 밝혀지지 않았다. 오르배 섬의 학자들은 안쪽땅에 탐사대를 보내고 진귀한 동식물을 채집해 오지만 그곳을 제대로 탐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섬의 원로는 그 방법이 안쪽땅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약속이고 그 이상을 보려 함은 금기라고 분노했다. 그런데 금기에 매이지 않고 탐험을 감행한 지리학자 역시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리학자는 오르배 섬의 안쪽을 밝히려다 쫓겨난 뒤에도 신비의 장소를 찾아내려고 무던히 애를 썼으나 안을 향해서는 눈을 감고 바깥을 찾아 헤맸다. 눈을 뜨고 꿈을 꾸고 싶다고 외쳤으나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굳은 생각에 갇혀 자신이 한쪽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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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 아마조네스의 나라에서 Z의 지조틀인들의 나라까지, 26개 나라의 이름은 전설이나 실제 지리를 응용하거나 작가가 새로 이름을 붙였다. 이곳들은 지구의 다채로운 섬, 육지, 평원, 산, 사막, 바닷가, 호수, 동굴, 화산 등을 지리적 배경으로 한다. 세계 곳곳의 부족과 문명, 샤먼, 건축 양식 등 문화 요소를 이야기의 지리‧기후 배경에 어울리게 매치했다. 공통점은 있다. 탐험의 주인공이 인간이라는 점이다. 인간 또는 인간들이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환경을 모험하고 충돌하고 변화하고 성장한다. 그대로 몰락하거나 별 소득을 얻지 못하는 이야기도 있다. 

이 매혹적인 이야기들은 20세기 전후의 제국주의 시대를 경계로, 그때까지의 세계를 배경으로 삼았다. 시대는 다를 수 있으나 산업화 영향이 닿지 않은 땅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골랐다. 자연에서 태곳적 신비와 본능, 두려움의 감정을 더 잘 느낄 수 있는 설정이다. 탐험가들은 낯설고 기묘한 문화에 스며들고 적응해가며 아예 그 땅에 뿌리내리고 머물기도 한다. 실재했던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결말이다. 이 책에서는 탐험가 집단이 타민족과 타문화를 무시하고 파괴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지금은 사라지거나 흡수된 문화를 존중하고 억압과 지배를 거부한다. 

이야기 중 프랑수아 플라스가 좋아한다고 하는 E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보자. 프랑수아는 E로 ‘에스메랄다 산맥’이란 지형을 지어냈다. 이야기의 배경은 중남미 아메리카의 안데스 산맥을, 이야기의 설정은 에스파냐의 탐험 겸 침략과 잉카와 아스테카 문명의 몰락을 생각나게 한다. 

에스메랄다 산맥에는 다섯 도시 제국이 있다. 이 나라들의 현자와 영주들은 잔인한 무리가 나타나 제국을 어지럽히는 꿈을 꾸는데, 이 무리의 정체는 붉은 수염 오랑캐였다. 제국의 지도자들은 용감하고 지혜로운 이틸랄마튀라크를 대장으로 하여 원정대를 꾸렸다. 붉은 수염 오랑캐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오는 것이 원정의 목표였다. 이틸랄마튀라크는 전사들을 이끌고 고된 여정을 거쳐 붉은 수염 오랑캐가 머무는 지역에 도착했다. 그들은 스무 명 남짓이었다. 이틸라마튀라크는 그들에게 황금을 주어 마음을 얻고 연회를 마치자 ‘꿈을 여는 풀’을 태워 그들의 잠으로 들어갔다. 붉은 수염 오랑캐들의 꿈에서 먼 곳에 있는 그들의 나라, 그들이 사는 모습을 보았다. 이틸라마튀라크가 꿈 속 여행을 마치고 깨어났을 때도 붉은 수염 오랑캐 군대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자 이틸랄마튀라크는 마법으로 그들을 더 깊은 잠에 빠지게 하고, 한 명씩 배에 옮긴다. 배에 모두를 태우자 배를 그들의 땅으로 돌려보냈다. 

침략자를 우아하게 물리치는 방법. 실제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침략 이후 급속히 몰락한 아스테카나 마야 문명과 달리 프랑수아의 이야기에서 원주민들은 그들의 방식으로 그들을 지켰다. 이런 전개는 다른 이야기에서도 반복된다. 작가는 외부의 침략으로 몰락한 문명에 만회할 기회를 만들었다. 원주민이 그들의 삶을 외부인에게 무력하게 뺏기지 않고 그들의 방식으로 맞서도록 했다. 그래서 문명의 신비는 보존하고 폭력은 스스로 거부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놓았다. 또는 원주민의 문화와 새로 유입되는 문화가 화해할 여지를 남겼다. 이런 전개 덕에 이 이야기들은 지배욕, 탐욕으로 한때 세계 일부를 망쳤던 인류 역사의 만회극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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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 나라는 꼭 한 지역의 지리‧문화와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했는데, 하나의 이야기에도 여러 지역의 인문‧지리‧생물 특징이 혼재되어있다. 배경이 무엇인지 불분명하거나 여러 시대와 문화 양식이 혼합되었는데, 이 역시 작가가 의도한 바이다. 작가는 지역색이 강한 이야기로 흥미와 관심을 갖게 하기를 바랐지, 한 편의 완벽하고 닫힌 장소를 만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작업을 ‘허위 다큐멘터리’라고 불렀듯, 오르배 섬 사람들의 지도 이야기는 여러 지식을 노련하게 이용했다. 실화나 전설, 탐험담을 읽는 기분이 든다.  

작가는 1987년부터 1990년 사이에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나온 Decouverte du monde(세계의 발견) 시리즈에서 항해자, 정복자, 상인, 탐험가를 주제로 책을 작업하며 지리, 역사, 복식, 동식물, 건축물 등을 다루었고, 다음 작품인 그림책 『마지막 거인』부터는 본격적으로 상상의 장소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지막 거인』에도 오르배 섬 지도책처럼 탐험, 미지와의 조우, 폭력적 개발의 대가가 무엇인지 이야기 전반에 퍼져 있다. 이다음으로 ‘오르배 섬 사람들이 만든 지도책’이 출간되었다. 

프랑수아 플라스는 이 시리즈 이후에는 오르배 세계의 일부를 더 정교히 풀어내어 소설 『오르배 섬의 비밀』을 썼다.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소설가로서도 자신의 세계를 시도하고 확장한 셈이다. 스스로는 글과 그림, 두 매체로 전달하는 이야기꾼이라고 한다.

독자를 온갖 신기한 세상으로 끌어들이면서 정작 작가 자신은 여행을 즐기지는 않는다는데, 대신 책에서 막대한 양의 지식을 얻고 상상력을 키웠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 있던 서재가 그 역할을 했고 청소년 시절에는 투르Tours의 도서관이 그랬다. 처음에는 삽화가로 경력을 시작하였는데, 작품을 거듭할수록 그림뿐 아니라 글에서도 창작자로서 그의 영역을 키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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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정보와 이야기가 섞여 있기에 창작 과정이 궁금했는데, 인터뷰에서 프랑수아는 B의 바일라바일카를 예로 들어 자신의 작업 과정을 설명했다.

처음부터 이야기의 구조를 정하고 정보를 모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처음에는 여러 정보와 관심사가 흩어져 있었다. 작가는 알파벳 26자 중 B를 보았다. B에는 동그라미가 두 개 있다. 그는 두 개의 상반된 호수를 떠올렸다. 혼란스러운 호수와 평온한 호수. 이곳에 두 눈의 색이 다른 사람이 태어났다. 한쪽은 혼란스러운 호수처럼 검은색이었고 한쪽은 평온한 호수처럼 맑았다. 이곳에서 두 눈의 색이 다름은, 무당이 될 사람이 태어났음을 알리는 표식이다. 작가는 실재하는 바이칼 호수를 떠올리고 이로써 바이칼 호수의 샤먼 전통까지 이야기 속으로 끌려왔다. 

B라는 문자에서 지형을 떠올리고 주인공이 될 만한 인물을 떠올렸음에도 작가는 계속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 호수의 모습을 그리며 크로키 더미를 만들었다. 이쯤 되자, 작가는 생각했다. ‘어느 지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작가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아이가 태어났다. 호수처럼 두 눈의 색이 달랐다. 두 눈의 색이 다른 아이는 무당으로서 성장했다. 열다섯 살이 된 아이는 연어, 여우, 까마귀의 가죽으로 만든, 살아 날뛰는 외투를 입는 가혹한 의식을 거치며 무당으로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무당은 자신의 마을과 백성들을 보살피는 데에 일생을 보냈다. 무당이 늙었을 때, 마을에 흰 얼굴-검은 옷의 이방인이 등장했다. 그는 선교사로 사람들을 개종시키려 했다. 사람들은 이방인의 가르침에 혼란스러워졌고 산에서 홀로 지내던 무당에게 이방인을 만나 주기를 요청했다. 무당은 3일에 걸쳐 마을로 내려왔다. 무당은 이방인의 연설을 듣고 이방인의 책과 그를 살폈다. 이방인의 성경책은 늙은 무당의 망토만큼이나 이질적인 여러 재료가 합쳐져 만들어져있었다. 자신의 부족이 무지의 암흑 속에 있다 하며 나무나 물을 섬기는 미신을 그만두라는 이방인의 말에 늙은 무당은 분노하나 곧, 이방인의 두 눈도 자신처럼 호수의 표식을 지녔음을 보았다. 늙은 무당은 이 사람이 후계자의 조건을 갖춘 사람임을 깨닫고 자신의 외투를 그의 앞에 던졌다. 무당의 상징인 외투를 입음으로써 이방인으로서가 아니라 마을의 진정한 수호자이자 안내자로서 그 짐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 것이다. 

프랑수아는 이 부분에 역사 속 사실을 염두에 두었다. 16세기에 유럽에서 예수회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파견되어 중국 사람들을 개종시키려 했다. 예수회는 중국에서 한참을 활동했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했고 중국 본토에 발을 들이지 못했다. 고초를 겪고 쫓겨나기도 했다. 동기와 의도는 충만했으나 방법이 문제였다. 초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원주민의 문화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언어를 익히지도 않았다. 다행히 한 세대가 지났을 무렵, 선교사들은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의 문화, 관습에 적응하는 방법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들은 중국식 옷을 입으라는 중국 관리의 조언을 듣고 처음에는 또 다른 종교 수행자인 승려의 옷을 입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 승려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그 옷으로는 지적이고 품위를 갖춘 종교인의 이미지를 보여줄 수 없었다. 게다가 가장 먼저 개종시킬 계층으로 삼은 관료나 지식인을 만날 때도 예를 갖출 수 없는 복장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주교에게 비단옷의 착용을 허락받고 중국의 유학자처럼 옷을 갖춰 입기 시작했다. 16세기에 중국에 파견된 유럽 선교사들이 행한 바를, 프랑수아의 이야기에서 무당이 선교사에게 요구한 셈이다. 이야기에서 낡은 외투는 단순히 무당의 오래된 외투가 아니었다. 부족의 문화, 부족의 생활 환경, 사람들을 돌보는 무당의 책임감과 고독이 압축된 물건이었다.  

장소와 시대는 다를지라도 프랑수아는 이런 식으로 세상에 실재했던 사건과 정보를 이야기의 바탕으로 깔거나 이야기에 맞게 변형했다. 어린 시절부터 보던 책 속 이야기와 정보가 그에게 체화되고 변형되어 저장되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한 작가의 상상과 역사․지리 정보가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서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단순히 지식이 결합한 결과는 아니다. 이 재료들을 끊임없이 구상하고 정리하고 적당한 자리를 맞춰가고 있음이 더 맞을 것이다. 적극적 기다림이다. 

옛이야기와 전설처럼 짤막짤막하지만, 옛이야기나 동화보다 소설의 문장이고 짧은 이야기임에도 복합적 상황이나 인물의 미묘한 심리가 선명히 전달된다. 삽화가로 먼저 활동을 시작했기에 글의 전달력이 그림에 못 미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프랑수아는 그림으로도, 글로도 이야기꾼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오르배 섬 지도책과 『마지막 거인』의 형식은 비슷하다. 글이 주가 되고 그림은 삽화의 형식으로 글을 설명한다. 『리디아의 정원』처럼 글과 그림이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는 그림책과는 구성과 결이 다르다. 오르배 섬 지도책은 현대적 의미의 그림책이라기보다 삽화가 탁월한 이야기책이라는 설명이 더 어울린다. 이런 책은 이 나름의 장점이 있다. 그림만 보아도 이야깃거리가 풍부하고 이야기만 읽어도 감정이 물결친다. 둘을 결합할 때, 심상의 이미지가 훨씬 풍성해짐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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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배 섬 사람들의 지도책은 하나의 세계, 군도, 또는 대륙에 속한 나라를 설명하는 상상의 백과사전 같다. 백과사전처럼 알파벳 순서를 따라서일 수도 있고, 이 이야기들이 실제로 백과사전 속 지식의 융합과 변주가 일어난 이야기 모음집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사전의 형식은 단순 명료하다. 단어 설명을 글자 순서대로 나열한다. 구성은 단순 명료하되 다루는 범위는 방대하며 기획자나 편집자의 욕심에 따라, 투자자가 동의한다면, 더욱 방대해질 수도 있다. 수많은 세계, 인물, 사건은 다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서로 연결될 수 있다. 이렇게 사전을 보기 시작할 때, 사전은 미로가 되고 그 안에서 능히 세계를 창조해내기 시작하며 독자는 독창적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오르배 섬은 사전 항목끼리의 결합으로 생긴 새로운 상상의 땅이면서 26개의 이야기끼리도 한 지역이 다른 지역 이야기에 슬쩍 등장하거나 주인공이 겹치는 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소설 『오르배 섬의 비밀』에서는 캉다아와 인디고 섬의 등장인물을 끌어내어 그가 만든 영토를 탐험하게 함으로써 상상의 부지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작가가 만든 허구의 장소, 허구의 명칭은 알베르토 망구엘의 상상 사전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에 많은 항목을 보태게 되었다. 오르배 섬 이야기는 단지 프랑수아 플라스의 시리즈로 닫히는 세계가 아니라, 상상 세계의 지명이 되어 망구엘의 백과사전을 읽은 사람이라면 흥미를 느끼고 상상의 탐험을 나설 수 있는 또 다른 상상의 부지가 된 것이다. 

한 편의 이야기는 많은 요소의 혼합이다. 많은 정보가 작가의 상상력의 흐름을 따라 합쳐졌다. 꿈이 만들어지고 나타나는 방식 같다. 인류의 기억 창고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작가의 리서치, 편집, 상상력을 거쳐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그리고 프랑수아의 솜씨로 구체적 형상을 입고 눈앞에 펼쳐졌다. 그는 이 세계를 그려냈고, 나는 많은 가상의 도시가 등장하는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나 치밀하게 창조된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을 할 때면 오르배 섬 사람들이 탐험한 땅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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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책은 2004년 번역본으로 전체 6권 시리즈이고 2021년에 3권으로 편집되어 나왔다. 전체적 느낌부터 말하고 들어가자면 이 책은 근사하고 아름다우며 황홀하다. 진지하나 그래도 결국은 허구이다. 허무맹랑하니 싫다는 사람도 있을 테고, 좀 더 정교한 허구이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을 테고, 흥미롭지만 푹 빠지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나 같이 홀딱 빠진 사람도 있을 테다. 나는 작가가 상상 세계를 만들어가는 작업 자체에 흥미를 느끼고 이 세계를 만드는 데에 재료가 된 콘텐츠를 찾아내기를 좋아한다.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며 상상 세계의 확장, 지식의 융합의 묘미를 만끽하면 좋겠다. 양장본에 판형이 크고 그림이 많다며, 그러니까 애들이 보는 그림책이라고 밀어놓을 사람도 있겠으나, 이 책에서 감행하는 상상력의 시도, 박물학적 지식이 바탕이 되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낭만과 모험심을 깨운다.

이야기만으로도 즐겁고 아름다운 상상에 감정이 너울지는 책인데, 나는 이 허구의 세계에 매혹되어 자꾸 궁금한 게 많아진다. 상상의 땅을 더 알고 싶어서 말이다.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를 읽을 때도 이렇다. 이야기의 고고학자라도 된 양 사물 하나, 문장 하나도 곰곰이 톺아보고 그 속에서 가치 있는 이야기를 발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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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개의 이야기를 거치며 참 여러 감정으로 두근거리고 기대와 흥분에 휩싸였다. 가슴 저릿한 사랑도 있고 우아한 묘사에 그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 나라도 있었다. 

책 앞부분에는 가상의 안내문이 달렸다. 오르배 섬의 지리학자들은 지도를 만드는 것으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파악했다고 믿었단다. 그래서 다양한 지도를 만들었으나 오르배 섬은 사라졌고 지금은 그곳 지리학자들이 시도한 지도책 중 몇 권만 남았다는 말이다. 

이 말을 보다 보면 이 세계가 허구인 줄 알았으면서도 진짜로 그 기록을 잃은 듯 서운하다. 이 쓸쓸한 기분은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 전집’ 마지막 권 『또 다른 바람』의 끝을 읽을 때와 비슷하다. 르 귄의 소설에서는 죽음과 삶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를 온전히 만들기 위해 인간이 마법을 포기했다. 용이 서쪽 하늘로 날아가 인간 세계와 용의 세계가 완전히 분리되고, 인간은 힘이 깃든 고대의 언어를 쓰기를 포기하며 마법의 시대는 끝났다. 그렇게 해서 다소 불합리하고 위험했으나 신비하고 낭만적이고 이야기가 풍성했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도시와 비즈니스의 세계, 지금 우리의 시대이다. 그렇지만 합리적 방식을 내세우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여전히 마법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전설과 신화의 이미지를 그린다. 꿈의 방식으로 마법의 시대를 계속해서 재생산하고 이어간다. 지구상 어딘가를 닮았어도 오르배 지도책 속 나라는 지구에 실재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보편적인 이미지로서 우리의 무의식에 깊게 저장되어있는지, 우리는 그 실체 없는 세계를 이해하고 막연한 향수와 지식을 공유한다. 오르배 섬의 명망 높은 우주학자였으나 한순간에 추락한 오르텔리우스가 지조틀인들의 나라에서 느꼈던 감정을, 우리도 한번은 느꼈거나 언젠가 한 번쯤은 느끼게 될 것이다.      

‘오르텔리우스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향기와 색깔에 대한 표현이 풍부한 지조틀인들의 언어를 그는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뭐랄까, 마치 시간 저편에 묻어두었던 오래된 기억들이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신비로운 느낌이었다.’      


신화와 전설과 모험에 뿌리를 둔 세계는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고 매혹한다. 아무리 우주시대가 시작되었어도 지구를 기반으로 한 지리적 특징과 문화 요소, 역사 속 다채로운 사건은 계속해서 결합하고 재생산되고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구현되고 있다. 상상과 동경에 휩싸여 우리가 가상으로 세운 세계를 소비한다. 한때 존재했고 이제는 게임과 영상 속 가상이 되어 버린 세계는 언젠가는 현실 세계에 실제로 세워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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