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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빗물펌프장이 있다. 큰비가 올 때가 아니면 동네 운동장으로 쓰인다.
볕이 아주 잘 드는 곳이다. 가장자리에는 나무들이 바람을 맞고 살랑살랑 움직인다. 학교 끝날 무렵이면 엄마들이 아이를 데려온다. 아이들은 무리 지어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엄마들은 엄마들대로 한쪽에 모여 아이의 짐까지 주렁주렁 들고서 얘기를 나눈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고 걷거나 달리는 사람도 있다. 벽에 공 던지고 치는 연습을 하는 사람도 있다. 관리인은 운동장 한쪽 구석을 청소하거나 나무 그늘에 앉아 운동장을 바라본다.
그늘막 아래에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이 광경을 바라보다가, 여기가 천국인가, 생각이 들었다. 밝고 환하고 적당히 소란스럽고 적당히 정답다. 각자 일을 하는데 서로 방해하지 않았다.
운동장 바로 옆에는 도서관이 있다. 지난 겨울 리모델링을 마친 도서관은 아름답고 효율적이었다. 책이 아주 많은 곳은 아니지만 내가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흥미를 이어가기에 충분했다.
도서관을 들러 볕이 내리쬐는 운동장을 지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사라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무척 안타까워한 칼 세이건이 생각났다. 칼 세이건은 『코스모스』 내내 고대에 시작된 과학 정신의 번영과 계승, 인간의 자유롭고 합리적인 탐구 정신에 찬사를 보냈다. 인류와 과학에 한껏 애정을 보내는 글에 매료되어 읽다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자료를 보고 싶어 못 견디겠다는 그의 갈망을 읽을 때면 그가 지금은 천국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두루마리를 펴보고 있기를, 천천히 거닐며 사색하고 자료를 보며 다시 사색을 이어가기를, 나도 바라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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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전설에 가깝다. 기록은 있는데 뚜렷한 흔적은 없다. 소장했던 두루마리가 50만 부, 한때는 70만 부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그 많은 두루마리가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유적에 대해서도, 도서관이 이집트의 왕궁 안에 있었다지만 그 이상은 알지를 못한다. 지금 사람들이 공유하는 정보는 그곳을 방문했던 학자들의 책에 기록되는 방식으로 전해진다. 실재한 흔적은 남아 있지 않으나 글에서 글로, 말에서 말로, 기록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이곳에 대한 기억을 연장해가고 있다. 그 기록조차 조각조각이라는 점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흠뻑 빠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한다.
이러니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허구가 아니냐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이 존재했음을 확신하고 바라는 듯하다. 알렉산드리아는 대학 도시이기도 했다.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에 모여들었고 자신의 연구에 매진했다. 학자는 재정을 지원받아 연구 활동에만 몰두할 수 있었고, 이런 모든 조건의 결과 알렉산드리아에서 고대 지식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문헌학이 발달하여 많은 그리스 문학 작품의 이본을 비교 분석하여 표준 텍스트를 확정할 수 있었고 도서 목록, 용어집, 주석판 등 어학과 문학 연구가 활발했다. 또 도서관의 장서 정리 방식은 이때 정해진 방식을 기본 체계로 삼게 되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지동설을 주장했고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계산했다. 기하학자인 유클리드도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고 의술인 헤로필로스는 인간의 생각을 수행하는 것이 뇌라고 확신했다.
도서관의 자료는 연구의 바탕이 되었고 그들의 연구는 정리되어 다시 도서관에 보관되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던 학자들과 그들의 학문에 대해 읽다 보면 그곳에 있었다고 한 자료가 전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굉장히 아쉬워진다. 인간의 창의적 활동이 꽃피고 장려되었던 그 시절, 그 장소의 분위기는 어떠했을지에 대해서도 기대와 환상을 품게 된다. 이런 면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과거의 유물을 넘어서 인류가 늘 도달하기를 바라는 하나의 이상적 모델이다. 학자들은 지원을 받는 만큼 제약이 따랐을 것이나, 그런 면보다 지성의 창조적 에너지가 가득했던 공간으로 더 받아들여지고 있다. 합리적 이성과 자유로운 연구를 상징하는 고대의 이 도서관은 실제로도 존재했겠으나 견고한 신화로도 존재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 중 한 명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 때 소장 도서를 모으고 도서관의 건립을 추진했으나 본격적으로 규모를 늘린 것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로 보고 있다. 이어서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들어오는 배를 모두 수색하여 두루마리를 찾아내고, 압수하고, 복사한 뒤 원본은 도서관에 소장하고 복사본을 돌려줬다. 칼 세이건은 한 나라가 나서서 그렇게 게걸스럽게 지식을 추구한 적은 없을 거라고 표현했다.
칼 세이건은 이 도서관에 바빌론 사제가 쓴 세계사 책이 있었다고 한다. 베로소스의 3권짜리 세계사로 기원전 2세기 후반에 쓴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책에서 천지창조부터 대홍수까지의 기간은 43만 2000년이라고 한다. 그때 세상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쓴 내용으로 보면, 40만 년 전이면 여러 인간 종이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을 것이고 아직 불을 잘 활용하지 못했으며 대형 동물을 정기적으로 사냥하기 시작할 정도였다. 고대 바빌론 사제가 신화와 실제 역사를 섞어 세계사를 구성했다고 해도, 이 시간 동안 어떤 사건이 일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쳤을지 궁금하다. 그리고 이 고대의 세계사를 궁금해하다 문득 깨달았다. 고대에는 그때의 고대가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지금의 기준에서는 바빌론이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니 하는 문명이 몇천 년 전의 고대에 속하나, 그때에는 그때대로 오래된 옛날이 있었다. 바빌론 사제에게는 자신의 시대가 역사의 가장 끄트머리이고 문명의 전성기였다. 우리는 그 사람만큼 그 시대의 고대를 모를 것이다. 그가 알고 있는 더 오래된 이야기가 무엇인지 듣고 싶다.
고대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보여주는 그림책이라면 얼마나 역동적이고 아름다울까 싶은데 그런 그림책을 찾기가 어렵다. 작업이 어려울 것 같다. 도면도, 유적지도 남아 있지 않다. 지금까지는 기둥이 늘어선 긴 회랑이 있고 기둥 옆쪽으로 두루마리를 보관했을 방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소개하는 그림책이 한 권 있기는 하나 지금은 절판된 상태이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흥망성쇠에서 사실인지 아닌지 분분한 부분이 있고 그것을 고려한 문장은 사려 깊으나 그림은 다소 경직되어 있다. 이와 더불어 후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탁월한 학자이자 교수였던 히파티아를 소개한 그림책 『히파티아』도 절판된 것을 보면, 고대의 찬란했던 탐구 문화가 어린이나, 책의 구매자에게는 큰 매력이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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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에서는 도서관을 친근한 장소로 소개한다.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으로 낭만과 놀이가 서려 있다. 도서관의 규칙을 지키면 사자도, 인형도 즐겁게 있을 수 있는 곳이 도서관이라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책이 가득한 집을 통째로 기증하여 도서관으로 만들어버리며 도서관의 낭만과 공공성을 즐겁게 보여주는 그림책도 있다. 일단 도서관으로 오게 하는 책들이다. 판타지 요소를 끌어들여서 도서관이 즐거운 일이 가능한 장소라고 기대하게 한다.
이런 도서관이 공공형, 개방형 도서관이라면 나는 미로형, 책들의 연결과 확장형으로 묘사되는 도서관의 모습도 좋아한다. 그 안에서 지식이 다양한 각도의 이미지로 표출되고 지식과 지식이 만나 변형하며 익숙하고도 낯선 풍경을 만들어낸다. 오르배 섬 지도책과 『지구를 상상하다』가 좋은 예이다. 오르배 섬 지도책의 작가는 많은 역사, 문화 자료를 그려내는 작업에서 그것을 가지고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단계로 나아갔다. 『지구를 상상하다』의 작가 기욤 뒤프라는 일관된 맥락으로 자료를 모으고 편집하고 인류의 이야기를 탐구했다. 자료 사이에서 길을 만들고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로 재구성해냈다.
도서관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도서관이 살아 숨 쉰다고 한다. 밤이 되어 사람의 발길과 입김이 잦아들면, 도서관의 책들이 그 공간을 지배하고 아우성치고 미로가 된다고 한다. 경비마저 일을 마치고 불을 끄면, 책들이 살아나고 또 다른 도시가 펼쳐진다고 한다. 『영원히 사는 법』은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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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도시에 사는 피터가 우연히 『영원히 사는 법』이라는 책의 기록카드를 발견하고 그 책을 찾으러 밤마다 책장과 책꽂이 사이사이를 탐험한다. 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책과 책꽂이, 그 사이 공간의 무한한 변신은 경이롭다. 특히 밤이 되어 도서관 책장이 살아있는 세계로 펼쳐지는 장면은 유머러스하고 아름답고 정교하다. 책장에는 주제별로 모인 책과 잡동사니가 빼곡하고 사이사이 틈새 세계도 숨어있다. 책장마다 주제별로 꽂힌 책들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아는 책은 하나도 없지만 익숙한 제목으로 가득하다. ‘골짜기의 백금’ ‘베어링의 상인’ ‘위대한 유화’ ‘달과 육면체’ ‘모사딕’… 더 쓰고 싶지만 그러면 허구의 책 제목에서 실제 책 제목을 떠올리는 즐거움을 뺏어버리는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다.
작가 콜린 톰슨은 딸과 함께 기존의 책 제목을 이용해서 이 책들의 제목을 지었다는데 특히 『채털리 부인의 연인』이 응용하기 좋았는지, 유난히 ‘채털리 부인의 OOO’이 자주 눈에 띈다. 자연 코너에는 ‘채털리 부인의 사냥’, 복식 코너에는 ‘채털리 부인의 오버’, 육아 코너에는 ‘채털리 부인의 기저귀’, 주류 코너에는 ‘채털리 부인의 술잔’이 있다. 이것 말고도 다른 책꽂이에 채털리 부인의 뭔가가 또 있다. 작가의 장난에 번역가가 우리말 느낌에 따라 약간의 장난을 더 보태어서, 패러디가 절묘하고 흥미진진하다. ‘오이 펴기 고급반’은 어리둥절했는데 자꾸 보다 보니 희한하게 궁금해지고 유용한 책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파일 대왕’이 좀 궁금한데 일에 파묻혀서 세상에서 도태되고 계속 파일로 파고드는 한 사무원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아니면 파일에 집착하는 폭압적 상사가 나오는 소설 제목으로도 어울린다. 어찌 됐든 현대 사회의 단절과 소외와 과열과 분열 양상을 그린, 읽으면서 다소 속이 쓰려오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어이없는 패러디에, 능청스럽게 계속되는 가짜 이름의 행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번역가의 말대로 원래 책들을 몰라도 상관이 없다. 다만 알면 패러디를 어떻게 했는지 보이니, 그것이 이 그림책의 또 다른 재미가 된다.
정작 이야기는 꽤 멜랑콜리하다.
피터와 고양이 브라이언이 『영원히 사는 법』을 찾으려는 탐험이 2년간 이어졌다. 드디어, 아무도 찾지 않는 다락방 찬장 아래 책장에서 피터는 이 책을 가진 노인을 만나지만 책 제목에 무색하게도 노인은 매우 늙은 모습이었다. 노인은 피터를 영원한 아이에게 데려갔다. 영원한 아이는 아이가 맞지만, 그 모습은 괴이했다. 아이의 체형에 삶에 지친 어른의 얼굴이 어울리지 않은 채로 한 몸을 하고 있었다. 아이 특유의 활기는 물론 사람의 생명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영원한 아이는 『영원히 사는 법』을 읽고도 미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 그 책을 읽고 그 의미를 모르는 채로 아이는 시간 속에 박제되어버렸다. 영원한 아이에게 시간은 멈춰졌다. 삶은 주변으로 흘러가고 영원한 아이는 그 삶에 참여하지 못했다. 영원한 아이는 영원히 아이다움을 획득했다기보다 늙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존재로 보는 편이 맞겠다.
영원히 늙지 않음을 기대했으나 그건 그리 단순하지도 축복받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눈앞에서 그 기회를 놓아버리는 일 또한 쉽지 않았다. 그러나 피터는 그 책을 읽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우리도 영원히 사는 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작가는 알고 있을까? 이 책을 출간한 뒤에도 작가는 계속해서 늙어가고 있다.
영원히 사는 법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서운하지는 않다. 오래전에 보았던 이 그림책을 산 이유는 영원히 사는 법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콜린 톰슨의 자잘한 그림을 보고 싶어서였다. 자잘한 디테일과 상상이 가득한 그의 그림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작은 물건과 뭔지 모를 존재를 찾아내며 놀았다. 책에서만 보기는 아까운 즐거움인지, 콜린 톰슨은 퍼즐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책꽂이 그림도 퍼즐 제품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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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책에서 책은 집이 되고 생활 터전이 된다. 책들이 모인 책꽂이는 마을이자 도시이자 미로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확장하고 세부 항목과 이야기를 더할 수도 있다. 내가 지금 하는, 책을 읽고 생각하고 그러다 또 다른 아이디어가 떠올라 그 주제를 찾아 책을 찾고 생각을 옮기고 더하고, 그것을 글로 쓸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 생각의 형상을 만드는 이 행동도 그렇다. 책에서 생각을 이어가고 책 속 문장과 감정을 확장하여 책들의 마을을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번에는 콜린 톰슨의 『영원히 사는 법』,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등을 모아 하나의 마을을 구성했지만, 이 책들을 각각 다른 마을을 구성하는 데에 쓸 수도 있다. 콜린 톰슨의 그림은 내가 지금 생각하는 도서관, 독서 여정, 백과사전의 원리를 가장 잘 드러내어 준다. 완벽하게 부합하지는 않는데, 여기에서 책이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지식이 확장되며 점점 커지고 하나의 마을로 형성되는 장면을 보고 싶다. 내가 그 장면을 글로든, 그림으로든 또는 다른 수단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한편으로는 누군가가 정확히 구현해낸 그 세계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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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톰슨의 그림책에서 『영원히 사는 법』은 영원히 존재하되 누구도 보지 못하는 닫혀있는 책이다. 유일하게 이 책을 본 자는 이 책이 해롭다는 생각에서 권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없애지도 않는다. 도대체 이 이상한 존재 방식은 무엇일까.
책은 읽을 때도 읽지만 읽지 않을 때도 읽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때는 책장을 덮고 글자를 보고 있지 않은 순간에 책을 더 잘 읽을 수 있기도 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림책은 그림책대로 책상에 펼쳐두고 이불 위에 드러누워 알베르토 망구엘의 『밤의 도서관』을 읽었다. 이 책은 고대의 두 상징물, 바벨탑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으로 서두를 시작한다. 이 중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해, 세상은 어지러운 정도로 다양하지만 그런 다양성에도 심원한 질서가 있다는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세워졌다고 말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내가 철학과를 선택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나는 이 복잡한 세상을 관통하는 심원한 질서가 있을 것 같았고 철학을 공부하면 그 질서를 알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 심원한 질서를 알아내지 못한 것은 물론이요, 철학의 언어에 익숙해지지도 못했다. 애써도 모르겠으니 때로는 학문에서 튕겨 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걸 이해하고 싶다고 다시 다가가는 내 모습이 서글퍼 보였다.
그림책 속 『영원히 사는 법』도 그렇게 보였다. 우리는 볼 수 없으나 밤의 도서관에는 커다랗고 다양한 세계가 있고 각자의 질서와 많은 이야기가 있다. 밤마다 살아나는 책의 도시는 사람살이의 현장 그 자체이기도 하고, 우리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되 서로 다른 세계를 영위하는 또 다른 세계인지도 모르겠다. 그 안에서 『영원히 사는 법』이라는 책으로 상징되는 영원한 진리를 항상 찾으려 하나 유한한 인간은 영원한 진리, 하나의 진리를 추구할 뿐 다다를 수 없고 단 하나의 진리란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닿을 수 없는 존재인데도 영원함, 세상의 진리와 진실함에 대한 갈망은 없어지지도 않는다. 없어질 수 없는 것일까? 영원은 유한한 인간의 삶에 비추어 가치가 있고, 인간의 유한함은 영원에 비교하여 의미를 더하고 영원을 따르는 과정에서 숭고함을 남긴다. 그렇게 영원함과 심원한 질서에 대한 갈망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전설로 존재하는 무엇이 된다. 『영원히 사는 법』은 닫힌 책이지만 존재는 한다. 거의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실제로 영원함과 심원한 질서를 알아내고 누리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어서이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영원히 사는 법』을 포함하여, 이 책에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볼 수 없는 책이 아주 많다. 책장 가득 꽂혀 있으나 이 제목의 책들은 누구도 읽은 적이 없다. 처음에는 유머러스했던 책꽂이 장면이 책을 읽고 난 뒤에는 허망함을 증명하는 요소 중 하나가 된다. 이 책의 멜랑콜리함은 스토리뿐 아니라 책장 가득한 책이 모두 허구라는 점에서도, 다채롭지만 음영이 깃든 색채에서도 온다. 그런데 이 멜랑콜리함도 누군가 자신의 가상 세계에 지은 도서관이라고 생각하면 흥미로워진다. 기묘하고 흥미진진한 남의 도서관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불온해 보이는데 들여다보고 싶고, 수수께끼처럼 뭔가 해석해보고 싶은 아이러니한 도서관이다. 모든 것이 허구여도 허무맹랑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익숙한 우화 형식의 이야기를, 정성스럽게 그린 디테일로 채우고 있어서일 것이다. 멜랑콜리와 오밀조밀함이 잘 맞아들어간 그림책이다.
재기 넘치는 패러디와 틈새를 메우는 작은 그림들로도 이야기에 내려앉은 긴 침묵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콜린 톰슨은 모든 것이 꽉꽉 넘치는 현실과 텅 빈 허무, 그 둘을 동시에 보고 있는 듯하다. 콜린 톰슨은 아이러니한 면이 있는 작가이기는 하다. 이렇게 다채로운 색을 구사하지만 적록색맹이다. 아스퍼거 증후군에 20대에 지독한 우울증을 앓다가 극적으로 나았고 그 이후로는 다시 우울증이 나타난 적 없다는 작가. 이유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한다. 48세에 어린이책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영국에 살던 콜린 톰슨은 1995년에 호주의 한 학교에 방문했는데 그곳에 홀딱 반해서 2주 뒤에 다시 그곳으로 갔다. 이번에는 아예 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자신을 이 학교에 초대했던 사서 선생님과 결혼해서 지금껏 쭉 호주에 살고 있다. 어린 시절의 마법을 믿고 인생을 올바르게 산다면 그 마법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해주는 작가. 그의 인생과 말을 읽다 보면 적록색맹도, 지독했던 우울증도 그에게는 삶의 마법을 알게 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콜린 톰슨은 또 다른 그림책 『태양을 향한 탑』에서는 호주의 울룰루 위에 세계의 온갖 건축물을 쌓아 올려 두터운 오염층을 뚫고 명징한 태양을 마주하는 장면이 나온다. 커다란 기계로 세계의 유명 건축물을 들어 나르는 모습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아마 이 그림책 속의 세계는 그 건물을 다 갖다 써서라도 다시 태양을 보는 경험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상황에 이른 것 같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남자는 이 꿈을 위해, 결국은 자신의 부도 소진했을 것 같다. 『영원히 사는 법』에서는 책꽂이 장면마다 자잘한 재미를 뽐내듯, 이 책에서는 바벨탑부터 시작하여 셰익스피어 하우스, 모아이, 롱샹성당, 크라이슬러 빌딩, 모스크, 이글루 등등에, 틈새마다 실제이거나 실제는 아니지만 그럴듯한 형상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바벨탑과 달리 이 탑은 다행히 무너지지 않고 사람들의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건물 틈새에 자꾸 보이는 맥스카페Max Cafe는 콜린 톰슨 가족이 기르던 개 맥스의 이름을 따서 만든 곳이다. 그의 다른 그림책에서도 볼 수 있다.
도대체 이 작가의 도서관에는 어떤 책이 꽂혀있으며 그 책들이 어떻게 작용했길래 이 잡다하고도 멋진 조합이 이루어졌을까? 멜랑콜리하면서도 낙관적인 정서가 궁금하여 작가의 책을 더 찾아 읽고 싶지만, 그의 많은 책이 해외에서도 절판되어서 마음껏 읽기 어렵다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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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들고 퍼뜨리는 것은 작가와 출판사와 서점의 일이나 각각의 책들 사이에서 길을 발견하거나 길을 놓는 일은 읽는 사람 각자가 할 일이다. 이 일은 즐거운 탐험의 길이고 물리적 도서관과는 다른 정신의 도서관이다. 나는 그 사이에서 헤매고 쉬고 머무르고 이야기를 엮는다.
아직 세상에 없는, 물리적으로는 아직 없는 나의 도서관은 『영원히 사는 법』 속 도서관처럼 크지는 않다. 도서관이라고 하고 싶지만, 책방이나 서재라고 하는 편이 맞는 크기일 것이다. 가정집 수준에서 큰 방 한 칸 정도면 좋겠는데 이보다 크기가 더 커지면 책을 채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내가 읽는 이상으로 책을 사서 채우려고 분명 욕심을 부릴 거다. 작은 방 한 칸 정도에 내가 좋아하는 책을 모아 놓아도 모든 책을 다 읽지 않았고 읽은 내용을 다 기억하지도 못한다.
내가 상상하는 내 도서관은 이렇다. 조금 큰 방에 햇빛이 잘 든다. 한쪽 벽에는 창이 시원스레 나 있어서 늦은 오후까지 해가 잘 든다. 낮에는 전등을 켜지 않아도 된다. 책을 사랑하는 한 친구는 햇빛이 잘 들면 책등이 바래서 안 된다고 얘기했다. 평소에는 유한데 여기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친구 말이 맞는 줄 알면서도 도서관이자 나의 작업실이기도 한 그곳에는 햇빛이 잘 들면 좋겠다. 늘 빛이 잘 드는 곳이 좋았다. 차라리 책장 앞에 스크린을 내리거나 얇은 커튼을 치는 방법을 찾으련다.
창문 아래에는 1단짜리 낮은 책장을 두고 책장 위에 푹신한 덮개를 깔아,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 생각이다. 한쪽 벽은 3단 정도의 중간 높이의 책장을, 다른 쪽 벽은 5,6단 정도의 높은 책장을 둔다. 낮은 책장이 있는 벽에는 지도를 붙일 거다. 세계 지도, 달 지도, 그리고 다른 지도도 번갈아 붙여둔다. 언젠가는 내가 그린 상상 세계의 지도도 붙이고 싶다.
가운데에는 크고 튼튼한 책상이 있다. 책꽂이는 따로 없는, 창문을 향해 탁 트인 책상이다. 이곳에 책들을 늘어놓고 메모를 하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그러다 밖을 한참 내다보는 상상을 한다.
창문 아래의 1단짜리 낮은 책장에는 음식과 제빵 책을 둘 생각이다. 세계 음식 레시피를 알려주는 책도 여러 권 꽂아두려고 한다. 음식책은 사진과 편집이 정갈해서 시각적 욕심에 자꾸 펼쳐본다. 보는 즐거움이 크다. 이 낮은 책장에 그림책 중 판형이 큰 커다란 책도 꽂아둬야겠다. 옆 벽면의 3단 책장에는 그림책, 그림책 이론서, 글쓰기 책, 책에 대한 책을 둔다. 지식그림책을 많이 갖다 놓을 것 같다. 지식그림책은 각 주제의 지식이 압축되고 있어 한 주제에 대해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는 점이 좋다. 또 편집과 구성에서 지식을 전하는 방식, 시각적 전달 방식을 참고할 수 있어서 직접 도움이 된다. 나는 새로운 주제의 일을 시작할 때면 의상이든 세계 문화든, 관련 지식이 있는 그림책을 찾아보았고 일을 하는 내내 여러 그림책에서 정보의 배치 방식, 화면의 레이아웃을 참고했다.
높은 책장에는 하나에는 사전류를 둔다. 백과사전은 무거우니까 아래쪽에 전질을 꽂아둔다. 단어를 찾을 때는 온라인 국어사전을 주로 보지만 그래도 종이가 얄팍한 실제 국어사전을 꼭 구비해둘 거다. 세계 곳곳의 신화, 우리나라 신화와 전설, 그림형제 이야기, 아서왕 이야기 같은 두꺼운 옛이야기책, 고대 문명, 미처 기록도 다 못 남긴 사라진 문명, 지리, 세계 문화, 각 지역의 역사와 이야기를 다룬 책을 풍부하게 꽂아 주고 싶다. 여기에 원예, 우주관, 음식, 민속에 대한 우리나라의 고서를 현대 한글로 풀어놓은 책도 마련해 둔다. 철학책을 몇 권 두고 그 옆에는 상상력과 이미지 이론 도서를 모아 둔다. 르 귄과 톨킨의 소설을 두고 판타지와 SF 소설을 더 모을 생각이다. 망구엘과 보르헤스의 책도 꽂는다. 그간 좋아했던 소설이 두 칸 정도를 차지할 것 같다. 상상 세계에 대한 책과 잃어버린 세계 이야기를 모아놓은 책, 유토피아에 대한 탐구서도 빼놓을 수 없다. 세 칸 정도는 과학 분야에서 여러 소재의 책과 과학사, 과학자 관련한 이야기책을 꽂아야겠다. 남는 책장은 비워뒀다 채우면 된다. 일은 일을 부르고 책은 책을 부른다.
이것은 현재의 관심사이다. 이전이라면 다른 책들을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그 전이라면 또 다른 책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관심 주제들이 변함없이 활활 불타지는 않는다. 잠잠히 사그라져있다가 다시 타오른다. 웬만해서는 완전히 꺼지지 못한 채로 꺼질랑말랑하며 저만치 물러나 있다가 다시 다가온다. 지금 고른 책들은 여러 매체를 접하며 비어있는 정보와 지식을 채우고, 나의 이미지 세계의 원형을 찾으려는 탐색의 목록이기도 하다. 그리고 방 한 구석에는 와인도 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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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들을 읽고 생각을 엮어가다, 또 궁금한 점이 생겨 이 책 저 책 징검다리를 놓으며 이어가다 새로운 인물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속에 ‘영원히 사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있을 수도 있으나 나는 그 방법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느 날 나는 콜린 톰슨의 그림책을 읽다가 내 머릿속에 떠오른 도서관의 이미지를 더 알고 싶어서 알베르토 망구엘의 『밤의 도서관』을 꺼내어 읽고, 어김없이 나오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읽으며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서술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떠올렸다. 그로부터 고대 이오니아의 찬란한 문명 → 그리스 문명의 몰락과 그때 그리스의 학자와 문화를 받아들인 페르시아 문화권 → 그것을 계승하여 꽃피운 중세 이슬람 문화 → 인류 역사상 많지 않을 이민족 포용과 계승의 사례를 더 알고 싶었다. 어느 날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그의 부인 앤 드루얀의 『코스모스』를 떠올리며 세대를 이어 같은 제목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도 사랑의 방식이라는 것과 이야기의 이어짐, 과학의 대물림을 생각했다. 『지구를 상상하다』를 읽으며 『코스모스』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지구와 우주를 알아가는 여정을 담았기 때문이다. 또 어느 날인가는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를 읽다가 그중 한 단편에 나오는 일본 학자의 근대 연애론이 궁금해졌다. 참된 연애가 세상을 평화로 이끈다는 식의 말은 어쩐지 일리 있어 보였다. 더 알고 싶어서 검색했더니 번역본이 있었다. 혁신적이지만 한계가 뚜렷한 근대의 연애와 여전히 골치 아픈 현대 사회 어른들의 연애를 보며 내가 사랑하는 그림책 속 커플의 모습, 좋아함의 모습을 비교했다.
이런 식이다. 이렇게 주제를 옮겨가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러면서 내 세계는 넓어지고 촘촘해지는데, 나는 이 과정이 재미있다. 책, 꿈, 상상이 오가는데, 지금껏 비중을 두어 말한 세 작가에게서 모두 이런 점을 보았다. 프랑수아 플라스, 기욤 뒤프라, 콜린 톰슨. 물리적 도서관의 콘텐츠를 융합하거나 재가공하고 자신의 이미지 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이다.
머릿속 세계, 또는 이미지의 세계, 혹은 상상 세계 때로는 내 내면의 이야기를 지리적 장소로 변환시키고 시각적 지도로 그려내고 싶은 욕심이 있다. 르 귄이나 톨킨의 지도, 게임의 시나리오와 탐험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욕심과 연관이 있다. 가상의 세계를 눈에 보이는 지도로 구현해내고 그것을 대지 삼아 이야기를 채워나가는 것은 쉽게 끝나지 않고 질리지도 않을 놀이처럼 보인다. 지도 속 장소마다 서린 이야기도 매력적인데, 그 세계 안에서 캐릭터와 장소는 서로 교류하고 오가며 또 다른 이야기도 만들어낸다. 그 세계를 창조하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다. 오롯이 작가가 시작한 세계이지만 어느 순간 캐릭터와 장소가 이야기를 엮어내는 기분이 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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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그림책의 역할과 위상도 변화한다. 오랫동안 그림책은 감상의 대상이었다. 위로의 수단이기도 했고 영감과 자극의 원천이기도 했다. 지금 그림책은 내 놀이, 탐구의 시작이 될 때가 많다. 그림책에서 시작된 호기심, 관심, 미묘한 느낌에 주석을 덧붙여서 더 풍부한 이야기로 만들고 그 과정을 거치며 내 세계가 확장됨을 즐긴다.
그런데 그 세계란 결국은 가상이고 상상인데도 이곳의 물리적 모양새는 고지식하다. 지구인에게 익숙하고 지극히 상식의 수준이다. 마을이 있고 산이 있고 바다가 있다. 겨우 벗어나서 외계 행성이라고 해도 지구 모습을 닮은 곳을 상상한다. 상상 세계를 넓히려 해도 지구 밖 공간을 상상하고 구체적인 활동 장소로 인식하기란 쉽지가 않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평면적이고 지구화된 이미지인 것 같다. 수많은 천체 사진을 보았고 별과 행성에 관심을 가져도, 내 상상 세계에서 우주까지 아우르는 이야기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주는 내 감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는 아니다. 애써 상상해 보아도 잘 닿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의 단위를 글자로 읽으며 우주의 생성과 지구의 변모를 천천히 짚어나간다.
내 세계의 지리적‧물리적 확장은 탐험가들의 실제 탐험에 기반한다. 가장 먼 곳은 실제가 아니라 상상으로 간다. 쉽게 인식하지 못해도, 직접 탐험할 의지는 없더라도,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책을 찾는다. 같은 내용이라도 여러 버전의 그림책으로 보고 싶은데, 작가들의 해석과 전달 방식이 제각각이어서 여러 방식으로 보는 것도 재미있다. 나의 이해력과 상상력이 새로운 영역을 빠르게 받아들이지 못해도 나는 이야기를 읽고 그림을 보기를 계속한다. 깊은 바다, 지구 어느 신비한 곳, 동물, 우주, 사람의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