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정냥이 Oct 01. 2023

그림책 탐, 탐, 탐

다음 단어들을 보자.

탐험하다. 탐구하다. 탐사하다. 탐닉하다. 탐하다.

모두 탐으로 시작한다. 앞의 세 단어의 탐은 찾을 탐探이고, 탐닉하다는 즐길 탐耽, 탐하다는 욕심을 냄貪을 말한다. 무엇이 대상이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앞의 세 단어는 중립적 설명이나 공부하는 태도를 가르치는 뜻으로, 뒤의 두 단어는 무엇을 탐닉하고 탐하는지에 따라 부정적 뉘앙스를 띌 때도 있다. 내게 이 세 가지 ‘탐’이 의미하는 뜻은 연관이 된다. 감각적 즐거움을 얻고 그것을 물리적으로나 지적으로 갖고 싶고 알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그것이 탐사, 탐구, 탐험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내게 그림책이 이야기를 생성하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다양한 기법에 홀려서, 그다음에는 마음을 다독여주는 힘에 놀라워서 그림책을 찾았다. 지금은 그림책이 한 세계로의 관문의 역할을 많이 한다. 그림책에서 시작하여 더 자세한 지식으로 나아가거나 반대로 내게 매혹적인 세상을 이미지와 그림책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세 가지의 ‘탐’은 나를 그림책으로 이끄는 힘을 나타내는 말이다. 

나는 그림책을 탐닉하고 탐하고 탐구한다. 그 안에서 탐험하고 그러면서 내 세계를 넓힌다. ‘그림책 탐탐기’라고 제목을 붙이고 싶었지만 내게도 생소하여 쓰지 않았다.      


그림책은 내게 아주 유용한 장르이자 주된 독서 분야이다. 일을 위해 읽는 보조 독서라든가, 어린이나 타인이 목적이 되는 읽기가 아니다. 나를 위한, 나를 즐기는 독서이다. 독서이자 내 놀이이다. 

그림책은 독서의 주된 방법인 읽기만으로는 말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읽다’와 가장 강력하게 호응하는 단어는 ‘글자’이다. 그림책은 글자가 적기도 하지만 글자와 그림을 함께 보고 두루 인지해야 온전히 즐길 수 있으니 읽기만으로는 아쉽다. 읽기에 감상이란 방법도 추가할 때 충족이 된다. 글자와 이미지를 아울러 즐긴다. 

그림책을 읽고 내게 생기는 반응은 이렇다. 그림책을 계기로 내 속의 어떤 이야기를 발견한다. 그림책을 시발점으로 하여 일상 감정과 세상 이야기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반대로 주제가 먼저 생각나고 이 주제에 연관된다고 생각하는 그림책을 책장에서 꺼내기도 한다. 그림책과 나, 또는 그림책과 세상의 이어짐을 더 풍부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다른 주제의 책도 책장에서 같이 꺼낸다. 

그림책은 여백과 함축이 묘미인 장르이다. 나는 그림책의 여백과 함축을 좋아하면서 동시에 그 너른 벌판에 내 이야기를 펼쳐놓고 그 틈에 디테일한 이야기와 지식을 채우기를 좋아한다. 그림책만 읽지는 않는다. 정교하고 치밀한 사유와 문장이 빽빽하게 놓인 책도 읽는다. 그런 책은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의 여백을 채우고 함축을 풀어가는 역할을 한다. 그림책 읽기의 주석을 만드는 작업 같기도 하다. 막연히 그 책에 관심이 가고 필요해서 읽기도 하지만, 나의 독서 방식에는 그림책의 함축과 여백을 더 풍부하게 감상하고 싶어서 어른책을 읽거나 읽어둔다는 생각이 늘 깔려있다.

그림책을 읽고 나면 막연히 좋거나 내 안의 이야기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두근거리거나 감정이 말랑해져서 온기가 퍼질 때도 있고 때로는 이야기의 날카로움과 비범한 기법에 충격을 받는다. 나는 그 감정을 가만히 놓아두면서 그게 무엇인지 파악하려고 천천히 움직인다. 그림책은 내게 생각하게 하고 그게 뭔지 말하고 싶게 한다. 이것은 조급한 작업이 아니다. 꼭 해야 하는 과제도 아니다. 다만 읽고 나면, 감정의 아우라에서 머물다 말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차마 내가 설명하지 못하는 말은 시간이 흐르면 천천히 알아차리기도 한다. 나는 그림책의 세계에서 풍성한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느끼며 살았다. 더 거칠고 더 모난 내가 될 수도 있었는데, 그림책이 내 화를 다독이고 까칠한 마음을 다듬어주었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림책을 권한다. 그림책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강력하고 아름다운 매체이다.     

책의 효용은 매우 확실하다. 하지만 책 읽기를 주장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목적지는 책과 내가 상호작용하는 지점이지 책 그 자체가 아니다. 책으로 얻을 수 있는 효용, 즉, 느끼고 생각함을 멈추지 않기를 바라고 나를 둘러싼 수많은 목소리와 미디어의 교란 속에서 나를 알아차리기를 바란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원래의 생각을 더 확장하거나 변주하거나 아예 방향을 틀어 버림으로써 정신의 모험을 해야 함은 맞다. 다채롭고 유연한 생각이 감각에도, 세상을 수용하고 바라보는 범위에도 영향을 준다. 생각은 안 변할 것 같지만 어떤 부분은 조금씩 변하고, 그 생각은 다음 단계 생각의 기반이 된다. 그래서 나는 느낌과 생각과 자극의 매체로서 그림책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그렇게 이르게 하는 수단이 책이 아니어도 된다. 음악이든, 영화이든, 드라마이든, 애니메이션이든, 연주이든,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매체가 있을 것이고 그런 매체 중 하나로서 그림책을 권하는 것이다. 긴 글 대신 그림책을 펼치고 느껴보기를 권한다. 책상에서 책을 들고, 책장에서 책을 꺼내어 읽듯, 그런 동작으로 그림책을 펼쳐 읽으면 된다. 그 책이 별로면 다른 책을 꺼내 보아도 된다. 옷이 그렇고 음악이 그렇듯 취향을 따라가면 된다. 너무 빨리 말고, 조금 천천히 그림책을 읽고 기회가 되면 시간이 지난 뒤에 그 책을 또 봐도 좋겠다. 그림책은 꽤 편안하고 그러면서도 마음을 움직인다. 당신이 만들지 않았어도 당신의 책이라 부를 만한 이야기를 찾는 경험을 하면 좋겠다. 그림책은 준비되어 있다. 당신만 오면 된다.      


그림책에 애정을 듬뿍 담아 말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술술 써 내린 것은 아니다. 글쓰기는 글을 쓰는 주체인 나를 무시하고 진행할 수 있는 활동이 아니고 쓰는 내내 나는 혼란스러웠다. 한때는 편집자였고 최근 몇 년간은 빵집에서 일했다. 빵집 일은 너무 즐거워서 처음에는 시간의 흐름도 다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일상을 지내며 글쓰기는 내게서 멀어졌다. 다시 글을 쓰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글쓰기는 예전처럼 내게서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다. 글쓰기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아니다. 치열하게 생각하고 글 쓰던 편집자 시절에는 야망이 있었고 야망을 목표로 하며 몰두했다. 지금은 그런 야망도 없다. 몰두하는 힘도, 생각이 뻗치는 힘도 무뎌졌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서 충돌하고 지금의 나에게 적응하지 못한 채로 오락가락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나는 번득임 대신 미련함이 어울리는 작업자가 되었음을 인정했다. 그러고 나니 미련함은 지금 내게 괜찮은 덕목이었다. 미련하게 한 자 한 자 밀어붙이며 그래도 끝까지 왔다.

용케 그 시간 동안 나와 놀아준 친구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긴 시간 동안 결과 없는 활동을, 나라는 인간을 흥미롭게 보고 끝까지 해보라고 해준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사실 많이 답답하셨던 것 안다. 출퇴근 시간 아껴 글 쓴다고 일터 옆에 작은집을 구했다가, 작업실에서 썼다가, 결국은 엄마 아빠 집에서 마쳤다. 두 분의 집에서, 두 분이 해주는 밥 먹고 썼다. 두 분께 드린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