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산과 속리산
버겁고 피폐한 삶에서의 모진 일탈
충청북도 보은군은 그 지세가 대부분 산지를 이루는데 동쪽은 소백산맥이 이어져 높고 험준하며, 서쪽은 노령산맥이 뻗어있으나 대체로 낮은 지세를 형성하면서 중앙으로 평야가 전개되어있다.
예로부터 보은에서는 속리산 천왕봉을 지아비산, 구병산을 지어미산, 금적산을 아들산이라 하여 이들을 삼산으로 일컬어왔다니 이들 세 산이 두루 보은군을 휘감고 있음의 표현일 것이다.
보은군에 자리한 구병산九屛山은 구봉산九峰山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속리산에서 떨어져 나와 웅장하고 수려한 아홉 개의 봉우리가 병풍을 두른 듯 동서로 길게 이어졌으며 그 능선이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시 일대까지 뻗어있다.
속리산의 명성에 가려져 유명세에서 많이 밀리고 있지만 1999년 보은군에서 속리산과 구병산을 잇는 43.9km 구간을 특허청에 충북알프스로 출원 등록하여 널리 홍보하면서 많은 산객들이 찾고 있다. 산객들 사이에 구전으로 전해져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부각된 영남알프스나 호남 알프스와 달리 충북알프스는 기존 등산로를 잇고 또 개설해 상품으로 특화시킨 것이다.
경남의 1000m 고지가 넘는 일곱 개의 산을 태극 모양으로 이은 종주 코스 영남알프스는 광활한 고원의 억새 지대를 특징으로 하며, 지리산과 덕유산의 주 능선을 바라보면서 100리를 넘게 걷는 호방한 산길 호남 알프스는 육산과 바위산을 고루 느낄 수 있는 묘미가 있다. 충북알프스는 다양한 바위로 이루어진 출중한 바위 봉우리와 암릉 산행이 매력적인 곳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 산을 이어 길을 터주었으므로 감사한 마음으로 그곳을 걷게 된다.”
그렇게 부러 산을 연계시키며 그 산들을 찾지만 결국은 겨운 삶에서의 일탈이다. 버거운 속세에서의 피난처는 안락한 휴식처가 아닌 보다 힘든 곳이었음 싶었다. 진정한 결핍을 겪었을 때 비로소 삶을 전환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게 되는 걸까. 처한 현실에 다시는 나빠질 일이 없어 보이므로 불가능하다 싶은 일을 해내려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즈음의 산행은 길고, 멀고, 험한 곳을 택하곤 했는데 극한적으로 피폐하고 비루해졌다고 자인했기에 오히려 편안한 상태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려 했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비우고 또 비워 더는 비울 게 없으면 그 사람은 이미 성자요, 부처일 것이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무엇엔가 분노하는 것은 아직 다 비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절대 긍정적인 현상이랄 수는 없지만 무언가 색다른 리듬을 추구하고 싶은 모진 일탈이 어느 때부터인가 삶의 한 부분이 되고 말았다. 그 한 부분을 채워주는 충북알프스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구병산으로 올라 속리산, 상학봉으로 이어지는 충북알프스의 숱한 바위 구간을 무박으로 단번에 종주하기는 여러모로 녹녹지가 않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처럼 산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통도 무척 불편하다. 산행 거리 약 24km 지점 피앗재 아래에 피앗재 산장이 있어 검색을 통해 거길 예약할 수 있었다. 두드리니 열리고 가고자 하니 길이 생긴다.
혼자라서 더욱 조심스럽다
주말 새벽 첫 고속버스를 타고 보은으로 가서 예정대로 장안면 서원리의 서원교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충북알프스 시발점이란 팻말을 보니 자치단체에서 애쓰는 노력이 충분히 느껴진다. 역시 감사하다. 결과적으로 산객들에게 편의를 주고 탐방 욕구까지 채워주는 게 아닌가.
안내판 옆의 나무계단을 오르며 긴 여정의 첫 단추를 끼운다. 늘 그랬듯 40km가 넘는 여정의 첫걸음은 들뜬 마음과 긴장감이 마구 버무려지면서 내디뎠고, 혼자일 땐 두려움도 없지 않았었다. 다섯 혹은 여섯 개의 산을 무박으로 홀로 종주하면서도 두려움을 떨쳐냈었는데 오늘은 두려움조차 무뎌지고 있는 것 같아 자신을 추스른다.
그건 위험스러운 징조일 수 있다. 아예 긴장감이 없다는 건, 두려움이 솟지 않는다는 건 훨씬 큰 위험을 자초할 수 있다. 출발 전의 혼란을 털어버리고 나무계단을 오른다. 들머리 오르막부터 급경사의 계단이다.
30여 분 꾸준히 오르다가 올라온 길을 돌아보니 시골 마을 보은의 소담한 가옥들과 전답이 산과 산 사이에 빼곡하게 이어진다. 날씨도 쾌청하고 바람도 적당히 불어주어 초반 산행은 상쾌하게 시작하고 있는 편이다.
속리산 주 능선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첫 휴식을 취한다. 오른쪽 천왕봉부터 비로봉, 입석대, 신선대, 문장대에 이어 관음봉까지 왼쪽으로 줄줄이 펼쳐졌다. 볼 때마다 장쾌하여 눈을 치뜨게 하는 풍광이다.
구병산은 남쪽 경사면이 절벽이고 북쪽 사면이 육산이라 등산로는 거의 북사면으로 우회하여 이어지는데 어쩔 수 없이 바위지대를 타고 오르는 길이 많다. 그래서인지 곳곳에 밧줄이 흔하다. 칼바위 능선도 자칫 주의력이 흐트러지면 위험을 초래할 소지가 다분한 구간이다. 혼자라서 더욱 조심스럽다.
백지미 재를 지나 삼가저수지와 구병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또 줄을 붙들고 바위를 오른다. 아래로 네모나게 각진 삼가저수지가 조그맣게 보인다.
바람 굴, 여름에도 늘 서늘한 바람이 불어 나오는 산기슭의 구멍이나 바위틈새를 풍혈風穴이라 하는데 구병산 풍혈은 여름에는 냉풍이, 겨울에는 훈풍이 솔솔 불어 나온다. 구병산 정상에서 서원계곡 방향으로 약 30m 지점에 지름 1m의 풍혈 한 개와 지름 30cm 풍혈이 세 개 발견되었다.
2005년 1월 보은군 문화관광과 직원들이 충북알프스 등산로 정비를 위해 왔다가 발견했다는데 직접 보니 충분한 포상금을 받을만한 대발견이란 생각이 든다. 구병산 풍혈은 전북 진안의 대두산 풍혈, 울릉도 도동의 동래 폭포 풍혈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풍혈이라고 적혀있다. 풍혈 중심에 손을 대니 자연 에어컨처럼 시원한 바람이 나온다. 참으로 오묘하다. 상식적인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대자연의 섭리에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충북알프스는 종주 구간의 거리상 크게 구병산, 속리산과 묘봉의 세 구간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첫 구간인 구병산 정상(해발 876m)은 그리 넓지 않지만 멋진 고목 한 그루가 곡예하듯 매달려 있고 동서남북 사방을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다.
서원계곡, 만수계곡, 삼가저수지 등이 자리 잡은 구병산은 기암절벽과 어우러진 단풍이 장관이라 가을 산행지로 적격인 편이다. 서원계곡 진입로 주변에 속리산의 정이품송을 닮은 큰 소나무가 있는데 정이품송의 부인이라 불리는 암소나무로 수령 250년이 넘은 충청북도 지정 보호 수이다. 따로 떨어져 있는데 부부라니 아마도 한때 부부였다는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장거리 종주를 하면서 가야 할 길을 내다보면 자칫 움츠러들 수 있다. 끝도 없이 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야 한다.
“속리산에 위축되지 말고 어깨를 활짝 펴세요.”
“너나 잘하세요.”
곧 이르게 될 백운대와 아득하게 멀어 보이는 853m 봉을 가늠하고는 진솔한 충고에 익숙지 않은 구병산을 떠난다. 정상을 내려서면 바위의 연속이다. 우회로가 있긴 하지만 암릉의 오르내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한 명의 산객도 만나지 못했다.
엷은 속옷 같은 흰 구름과 가끔 들리는 새소리가 적적함을 달래준다. 날아가는 게 힘겨워 억지로 날갯짓하는 연미색 나비 한 마리한테서 지난 세월의 데자뷔 deja vu를 경험하는 듯하다.
삶의 흔적을 남기려는지 있는 힘 모두 실어 날개 퍼덕이건만 저 약한 기운으로 무후한 꽃술 중 단 하나에라도 끝을 남길 수 있을까. 어스름 노을은 한창때와 달리 마구 무너져 내리고, 평화와 고혹이 공존하며 여유로움으로 무한할 것만 같던 숲은 한계에 다다라 우울한 적막에 덮여있구나.
맨홀처럼 퀭한 어둠 속에서도 아직 숨결 남아있지만, 생채기 투성이 나래는 더 힘을 싣지 못한다. 그저 타오르는 숨결을 찾아 헤맬 뿐이다. 결국, 더 높이 솟구치지도 못하고 낮은 솔가지에 제 몸뚱이를 얹은 나비를 빤히 관찰하다가 처진 어깨를 곧추세운다.
“이 세상을 잘 마무리하고 떠나거라.”
바위를 타고 올라 853m 봉에 이르렀다. 돌탑이 쌓여있고 나뭇가지에 무수히 많은 리본이 달려있다. 여기서 목을 축이고 바로 방향을 잡아 적암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에 닿는다. 구병산만 단일 산행한다면 신선대를 둘러보고 다시 돌아와 하산할 수 있는 길이다.
외갓집 같은 피앗재 산장에서 여장을 풀다
충북알프스 시발점을 통과한 지 4시간 30분 여가 지나 신선대(해발 820m)에 다다랐다. 여기서 형제봉까지도 먼 길인지라 걸음을 재촉한다.
신선대를 내려와 갈림길부터는 형제봉 방향으로 능선이 이어진다. 산행로는 헬기장까지 무난하다. 헬기장에서 바라본 속리산 천왕봉의 삼각 봉우리가 유난히 뾰족하다. 다시 좌측으로 내려서서는 리본을 유심히 찾게 된다. 산객들의 발길이 뜸해서인지 길이 흐려져 등산로를 놓칠 우려가 없지 않다. 묘지도 지나게 되고 낙엽송 조림지를 거치면서 장고개로 내려선다. 2차선 차량 도로인 장고개에서도 차량은 보지 못하고 통과한다.
흐르는 땀을 훔치며 올랐다가 헬기장에서 다시 내려서며 잘록한 안부에 이르렀고, 여기서 허름한 시멘트 가옥을 만나게 되는데 율령 산왕각이란 팻말이 걸려있다. 산신각인 것 같은데 밤에 혼자 지나치면 율령 산왕이 불러 세울 것처럼 스산하다.
열심히 걸어 백토재를 지나고 또 꾸준하게 걸어 못재에 도착한다. 장고개와 백두대간 비재로 갈라지는 구간이다. 못재에서 땀깨나 흘리며 갈령재 삼거리를 지나고 비재 삼거리에 도달해서야 형제봉까지 700m 남았다는 이정표를 접한다.
백두대간 상의 형제봉(해발 832m), 아무리 둘러봐도 형제인 듯한 봉우리가 하나 더 있지는 않다. 아무튼, 여기까지 걸어온 길이 길고도 지루하지만 여기서도 바로 움직인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라 할 수 있는 피앗재에서 1.2km 내리막 지점에 하룻밤 묵어갈 피앗재 산장이 있다. 걸음이 빨라진다. 눅진한 피로가 몰려들어 쉬고 싶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만수리 쪽으로 1km가량 내려가니 임도로 이어지고 그 앞으로 물 좋은 계곡이 보인다. 그리고 10여 분 더 지나 피앗재 산장에 당도하자 어릴 적 외갓집 싸리문을 열고 들어서는 기분이다. 충북알프스 중간지점이며 산 꾼들의 쉼터라고 적혀있다.
백두대간과 충북알프스를 걷는 산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산장이라 리본도 많이 달려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저녁과 아침 식사에 숙박, 게다가 점심 도시락과 식수를 보충할 수 있으니 든든한 지원센터가 아닐 수 없다.
산등성 녹음 내 가슴 깊이
햇살처럼 번지니
향수에 젖어 고향 그리는 시
푸른 그림자 번진 저 하늘에 쓰리라
떠나는 이 애달파하다
미처 못 한 이야기
타는 가슴 누르는 애절한 시
진홍 립스틱 찍어 물드는 노을 위에 쓰리라
어느덧 계절 바뀌어
피앗재에 알록달록 단풍 들면
낙엽 부스러지는 슬픈 시
애잔한 맘 찬찬히 문지르며
흐르는 계류 은빛 여울 위에 쓰리라
그리움 다시 새겨 짙은 감성
눈물 흐를 듯 설운 바이브레이션
그렇게 갈잎 노래 부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