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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와가치 Sep 06. 2021

비즈로 힐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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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집안에서 꼼짝도 못 하니 심심했던 아이들이 쇼피(Shopee)로 비즈를 주문했다고 했다. 여기저기 봉쇄 상황이고, 상품을 받기가 어려운 틈에도 아이들은 열흘 가까이나 기다렸다. 물건이 도착한 날, 마치 행운권 추첨에서 저희들만 당첨된 것 마냥 둘이서 신나 가지고 번개같이 나갔다 들어오더니 내 앞에 비즈를 쫙 펼쳐 놓는다. 헉! 왜 이렇게 많이 샀어? 오, 도대체 몇 개나 산 거야? 0.8mm 사이즈를 각 색깔 하나 당 천 개씩 샀단다. 아니, 조금씩만 사지, 왜 천 개 씩이나? 17 종류를 천 개씩 사는데 170,000동(우리 돈으로 8,500원) 들었다며 무척 흡족한 표정들이다. 와, 너무 싸다. 이 금액 받아서는 어디 비즈 공장 사장님 운영비는 나오려나, 또 쓸데없는 오지랖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구슬로 반지를 만들어 본 적은 있었는데 어른이 된 후로 처음으로 만져본다. 그 시절에는 모두들 그저 구슬이라고 불렀었다. 친구들마다 손가락에 구슬 반지를 끼고 자랑하던, 그것도 유행이던 때가 있었다. 세월이 흐르니 이제는 구슬이라는 이름보다는 비즈라는 영어 이름을 사용해야 더 어울리고, 어떤 작품을 만들어도 그 이름에 맞게 더 세련되어 보이는 단어가 되었다. 비즈 팔찌, 비즈 반지. 듣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비즈라는 단어가 더 예쁘긴 하다. 이 조그만 구슬이 이렇게 다시 유행하게 될 줄이야.


두 딸들과 머리 맞대고 무언가를 같이 만드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인데 문제는 당최 눈이 침침한 거다. 엄마랑 함께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면서 어쩌자고 우리 딸들은 0.8mm 사이즈를 주문했을까? 거기다가 비즈 크기들이 제각각 다 달라서 너무 작은 비즈들은 골라내면서 작업해야만 했다. 아이들은 속도도 빠르고 비즈 하나를 끼울 때마다 재미있어하는데, 나는 옛날 나 어릴 때 우리 할머니께서 실을 바늘구멍에 꽂을 때 짓던 그 표정과 몸짓으로, 정확하게 우레탄 줄을 통과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돋보기를 새로 맞춘 지 2년도 안 됐는데 이 돋보기도 곧 바꿔야겠네, 하면서. 


만들다 보니 요령이 생겨 밝은 구슬은 어두운 색 바탕의 수건에 올려놓고, 어두운 색 구슬은 밝은 수건에 올려놓고 줄에 꿰니 훨씬 수월하고 더 선명하게 보인다. 비즈 꿰기 하다가 시력이 더 좋아질 수도 있겠다 싶다. 또 은근히 집중이 되는 게 우레탄 줄에 비즈가 쏙쏙 들어갈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읽으려고 책상에 쌓아둔 책들, 책들 옆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작업 중인 한국어 수업 자료들, 열린 컴퓨터 화면 위로 쓰다 만 글들도 정리도 해야 하고, 거실에는 걷어두기만 하고 아직 개지 못한 빨래들도 기다리고 있어서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남아있구먼 모두 다 제쳐두고 딸들과 이렇게 앉아 놀고 있으니 세상만사 아무 관심이 없고 그저 평온하다. 이래서 다들 비즈 공예에 빠지나 보다.


오늘 목표했던 각자의 팔찌들을 다 만들고 일어나는 순간, 폴짝 일어서는 딸들과는 달리 나는 등, 허리, 다리가 저리고 아팠지만 그래도 비즈 팔찌를 만드는 그 길지 않은 시간에 느꼈던 평온한 마음과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한 유치한 느낌이 좋았다. 잠시 집중했고, 머리가 맑아진 듯하니 시간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방 막힌 코로나 상황에 생각지 못했던 새로운 취미를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네. 


내게 힐링이 필요한 시간이었나 보다. 어, 우리 딸들이 코로나와 갱년기를 동시에 맞은 엄마를 위해 준비한 깜짝 선물이었나? 


2021년 9월 4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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