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애써 자주 보지 않아도 편안한 존재가 있다. 햇수로 17년이 된 소꿉친구들이 내게는 그러한데, 작년부터 서울에 터전을 잡게 되면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두 친구와 퍽 왕래가 잦아졌다.
어제저녁에는 모처럼 우리도 분위기란 것을 내볼 겸, 미리 예약해둔 재즈바를 방문한 날이었다. 셋이 모여 약속 장소로 향하는데 두 뺨을 가르는 바람이 짐짓 선선했다. 어느덧 한여름이 지나고 목 끝에 서늘함을 느끼는 계절이 오고 있었다.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는 계절.
두세 발자국 앞서 걷던 두 친구가 이야기했다.
"진짜 처서 지나자마자 바로 시원해지네. 이게 바로 처서 매직인가 보다."
"1년 365일 이런 날씨였음 좋겠다. 맨날 행복할 것 같아."
또 이런 감흥 섞인 대화의 문맥을 끊어주는 것에 희열을 느끼는 자가 여기 있다.
"맨날 이런 날씨면 익숙해질걸. 가끔씩 느껴야 행복하지."
로비의 두꺼운 중문을 지나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우리의 불금을 책임질 공간이 펼쳐졌다. 충무로역 인근에 위치한 이 공간은 낮에는 펍카페로, 저녁엔 재즈바로 운영되고 있었다. 공간이 주는 생경함에 압도당한 탓에 세 친구는 다소 쭈뼛대며 자리를 잡았다.
고개돌려 마주한 창밖으로는 해질녘 남산의 풍경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재즈바에 방문한 모든 이들이 일제히 황홀한 전경을 보며 경탄하는 순간이었다. 휴대폰 배터리가 2% 남은 친구의 필사적인 카메라 셔터 소리가 유독 절박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재즈바에서는 웰컴 드링크로 위스키, 맥주, 와인 중에 원하는 주종을 선택할 수 있었다. 메뉴판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우리는 주류선택의 건으로 모의를 시작했다.
"맛있게 먹으려면 맥주인데… 와인도 땡긴다."
"나는 에일 맥주 마실래."
"그래? 아 고민이네. 웰컴 드링크는 한 잔만 주냐?(속닥)"
소란스럽게 고른 웰컴 드링크와 가벼운 스낵류를 뒤늦게 가져오는 사이, 재즈 보컬의 리허설이 끝나고 라이브 공연이 시작되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니 각 테이블 위에 있던 작은 조명들이 공간의 안온한 분위기를 더욱 조성시켰다. 잔잔하게 들리는 재즈와 함께 술을 홀짝이는 모습에 썩 멋진 어른들이 된 것 같아 으쓱해지던 찰나였다.
"저 언니 노래 되게 잘한다."
"조용히 해. 네 목소리 되게 컸어 방금…"
"근데 너 위스키 스트레이트로 마셔? 완전 어른이네."
사실은 어쩌다 어른이 되어버린 세 친구였다.
기분전환 삼아 시도했던 재즈바 방문은 파티원 모두의 만족을 샀다. 공간 밖을 나서면서 앞으로도 이렇게 이색적이고 분위기 있는 곳을 가보자는 호들갑으로 주위가 잠시 들썩였다.이윽고 적막이 흘렀다.
"…근데 속이 좀 느끼한데 얼큰한 국물 먹으러 갈래?"
결국 얼큰하게 속을 달랜 뒤 저벅저벅 걷던 청계천 길목에서 생각했다. 우리들은 오십을 먹어도 이렇게 은근하게 함께이고 싶다고.
겉으로 나타내지는 않지만 속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같은 존재. 서로가 서로에게 은근하게 함께인 존재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 글감을 쓰도록 허락해준 두 친구에게 고맙습니다. 먼 훗날 그대들에게 원고료를 떼어줄 수 있는 그날까지 부단하게 써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