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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로 가는 버스 안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을 내가 사랑하는 법

by 두치

2025.01.19

스크린샷 2025-11-09 195433.png 버스정류장에서 간단히 바게트를 먹고


다카르에서 바마코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말리의 공용어인 밤바라어가 들린다.

옆자리 승객의 낡은 핸드폰 스피커로 시디키 쟈바떼(Sidiki Diabate)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제야, 내가 정말 말리로 가고 있구나 실감이 든다.


도로 위 윤슬이 천국으로 가는 길처럼 반짝인다.

바마코로 가까워질수록 사하라의 기운이 강해지고, 대지는 태양의 빛으로 타오른다.


뒤쪽 좌석에서 누군가가 파마딩케(famadenke)를 부른다.

감비아에서 배웠던 만딩카 전통곡이다.

버스 안의 풍경과 소리가, 색이 번지듯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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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네 시간의 긴 여정이 지루하지 않도록 팟캐스트를 몇 개 저장해 왔다.

부르키나파소 밴드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이 생에 고통받으러 온 것 같아
아직도 유럽에 의해 고통받고 있어


그 목소리가 귓가에 오래 남았다.

고통의 목소리를 들으니, 내가 왜 이토록 먼 곳까지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창밖으로 머리에 짐을 인 상인들이 보인다.

고통의 이면에는 언제나 다시 일어나 살아가는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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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 음악의 황금기는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 시기, 서아프리카의 음악과 예술은 유럽과 미주를 거점으로 세계 각지에 퍼져나갔다.

서아프리카의 많은 젤리들이 승승장구하며 국제적인 무대에 섰다.

그러나 돈이 되는 방향으로 음악을 하기 시작하며, 만데(Mande)의 고유한 리듬과 문화는 조금씩 희미해졌다.


전통적으로 젤리(코라연주자)는 ‘자티기(jatigui, 전사 왕과 황제의 상급 가문들)’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자티기가 없는 사람은 젤리가 될 수 없었고, 젤리가 없는 사람은 자티기라 불릴 수 없었다.

마을마다 자체적인 젤리 가문이 있었고, 그들은 지역의 역사와 사건을 기록하고 이야기로 전해왔다.

그러나 수백 년 이어지던 이 관계와 전통은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거의 사라져 버렸다.


전통이 사라질수록 젤리에게는 위기였다.

말리의 아미코이타(Ami Koita)처럼 1970년대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젤리는 극히 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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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를 여행하며 만데 음악의 현재를 알아갈수록 절망감이 밀려온다.

계속 코라를 쳐야 할까. 정말 칠 수는 있을까.

감비아와 세네갈의 코라는 이미 전통의 결을 많이 잃고 있었다.

코라는 기타로, 발라폰은 신디사이저로 대체되었다.


전통 코라를 배우고 싶은데, 정작 전통 자체를 만나기 어렵다.

이미 사라진 것들을 찾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가.

찾을 수 없는 것을 쫓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마코로 가는 길 내내 절망감이 무겁게 내 몸을 짓눌렀다.

절망감 너머, 투마니 쟈바떼(Toumani Diabate)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나를 코라의 세계로 이끌어 준 사람이다.



나는 세계 제일의 코라 연주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냥 코라를 잘 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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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젤리들이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흩어졌다.

투마니의 아버지 시디키 쟈바떼(Sidiki Diabate) 역시

감비아에서 말리로 돌아올 때 말을 타거나 직접 걸어서 이주를 했다.

투마니의 어머니는 최고의 보컬이자, 말리 국립 음악단의 멤버였다.


투마니는 태어났을 때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이름을 지어주는 의례인 네이밍 세레머니(naming ceremony)를 하지 못했다.

다섯 살이 되어 또래 아이들이 축구를 할 때, 그는 7줄짜리 코라를 쳤다.


아버지가 코라를 직접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그는 스스로 코라를 익혀야 했다.

말리의 라디오는 그에게 좋은 음악들을 많이 들려줬다.

남아공의 음악부터 이집트, 인도의 시타르와 타블라, 파키스탄, 플라멩고, 아랍 음악을 들었던 경험이 그에게 또 다른 문을 열어 주었다.


투마니는 서아프리카 음악의 황금기를 타고 유럽, 일본, 스페인, 인도 등 세계 곳곳에서 코라를 연주했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나 또한 그의 음악을 통해 코라를 만났다.

투마니가 음반을 만들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코라를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현대화는 전통을 잃게 했지만,

그 덕분에 내가 코라를 만났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절망감은 그렇게 복잡한 감정으로 변해갔다.





1990년대, 말리를 비롯한 서아프리카에는

군사독재의 긴 그림자를 걷어내고 민주주의를 향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젤리들이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해주길 바랐다.


1992년, 말리가 군사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로 전환되던 해에

투마니와 발라케 시소코(Ballake Sissoko)는 기쁨의 상징으로 '비 람방(Bi Lamban)'을 함께 연주했다.

그 연주는 새 시대를 맞이하는 말리 사람들의 희망을 담은 하나의 선언처럼 울려 퍼졌다.


430088.png 97년도에 발매된 투마니와 발라케의 앨범, 'New Ancient Strings'


사람들은 역사에 관심이 없고 돈만 쫓는다.
쿠페데칼레 같은 음악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전통은 계속 이어질 거다.
우리는 평화와 법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 투마니



본디 코라 연주자들은 단지 돈을 위해 연주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탄생과 죽음, 사랑과 상실, 평화와 기억, 고통과 기쁨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었다.


오래된 투마니의 인터뷰를 들으며 마음이 먹먹해진다.

투마니가 사라진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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