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카사망스의 리듬이 남긴 것

세네갈 지긴쇼르 코라페스티벌에 가다!

by 두치


칸쿨랑을 구경하고 더위를 먹었다. 담벼락 틈새로 보이는 장면에 정신이 팔려, 사정없이 내리쬐는 해를 깜빡했다. 급격한 두통과 현기증이 밀려왔다. 나는 천막 아래로 들어가 잠시 몸을 식혔다.


잠시 후, 남자 어르신들이 하나둘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들 중 한 할아버지가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리듬으로 노래를 시작했다.

리듬이 울리자 천막 아래에 모여 있던 서른 명 남짓의 조바르떼 가족들이 일제히 마음을 모으듯 집중했다.


할아버지는 내 곁에 앉은 뎀보 가족의 평화를 위해, 그리고 처음 보는 낯선 나를 위해 한참을 기도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진심이 내 몸 깊숙이 스며드는 것 같아 눈물이 났다.


버선발로 뛰어나와 배웅해 주던 쟈바떼(Diabate) 가족들


잠시 후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코라 페스티벌에 가야 할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함께 길을 떠나온 마타와 샐리도 오늘 공연에 함께 한다고 했다.


코라페스티벌은 카사망스 지역에서 매년 열리는 유서 깊은 행사다.

서아프리카의 감비아, 카사망스, 기니비사우, 말리, 기니, 세네갈 등지에서 젤리들이 모여 코라를 연주하고, 역사적인 코라 폴라들을 기린다.


함께 동행한 뎀보 가족 역시 감비아-카사망스 지역의 거장 타타딘딘의 계보를 이어 코라를 연주하고 있다.

그런 역사적인 가족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 같았다.


지긴쇼르로 가는 길, 끝없이 이어지던 맹그로브 나무들


길 위에서 우리는 마타의 핸드폰에 저장된 음원을 들었다.

그의 재생 목록은 감비아와 카사망스 지역 젤리들의 오래된 노래로 가득했다.

이 지역은 만데 음악의 뿌리가 강하게 남은 곳이기에, 그 리듬만으로도 깊은 영감을 준다.


하지만 샤잠(shazam, 음원의 제목을 알아내는 어플)으로 아무리 검색해도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젤리들은 음원 발매를 위해 음악을 하는 이들이 아니고, 음원을 낸다고 해도 서양 중심의 저작권 협회에 등록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녹음 앱을 켜거나, 온몸의 감각을 열어 그 순간의 음악을 흡수하고 기억하려 애쓸 수밖에 없었다.





마라사숨에서 출발한 지 2~3시간쯤 지나, 해가 질 무렵인 오후 다섯 시경에야 우리는 지긴쇼르 광장에 도착했다.

초행길이었기에 공연 시작 시간도, 끝나는 시간도, 숙소조차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나를 보고 마타와 샐리가 오늘 밤 같이 자자고 제안해줬다.

그때까지도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여정 한가운데에 있었다.


마을 곳곳을 어슬렁 거리던 칸쿨랑 마스크


공연장은 한동안 텅 비어 있었다.

이따금씩 칸쿨랑 마스크(카사망스 지역 어린이들이 성인식을 할때 지켜주는 영적 존재)들이 공연장 주위를 남자 어린이들과 돌아다녔다. 하지만 공연 관계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자 남아 있는 의자를 주워와 멍하니 무대를 바라보았다.

무대는 높고 넓었고, 앞에는 전설적인 코라 대가들의 모습이 걸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조명 구조물 위에 오래된 코라 두 대가 묶여 있다.

솔로시소코(Solo Sissoko)의 코라였다. 솔로시소코는 지긴쇼르에 있는 젤리 가문에서 태어나 어렸을때부터 코라 연주로 가문의 전통을 이었다.

무대 가장 높은 곳에 걸린 낡은 코라는 하늘의 시소코를 향해 닿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나는 그 코라를 오래 바라보며, 그가 평생 손끝으로 이어온 시간의 결을 느껴보려 했다.



그때 어디선가 카오쑤 쟈바떼 (Kaossu Diabate)가 나타났다.

나보다 작은 체구였지만, 범접할 수 없는 단단함이 느껴졌다.

그 단단함은 부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세워주는 힘처럼 느껴졌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우리 앞에 서서 코라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코라를 치는 사람들은 코라로 말한다.

그는 알라라케(Ala lah ke)를 연주했다.

이해할 수 없이 찾아오는 삶의 고통조차 모두 신의 뜻이라는 의미를 담은 곡이다.


그의 연주를 들으며, 모든 것이 다 신의 뜻과 우주의 섭리 속에서 이어짐을 느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그들의 ‘신’을 삶의 언어로 번역해 이해하려 한다.

삶이 나에게 건네는 고통 또한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주기 위한 것이라 믿는다.

우주의 일부로서 고통의 진동을 통과하는 것, 그 자체가 살아 있음의 증거다.

그렇게 느끼면 고통은 사라지지 않지만 마음은 편해진다.


그는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


사소하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낯선 땅에서 들은 그 물음은 존재의 확인처럼 느껴졌다.

나는 짧게 답했다.

“부르키나파소 밴드에서 둔둔(서아프리카 전통 북)을 연주하고, 코라를 좋아하게 되어 이곳까지 왔어요”


그는 잠시 내 말을 듣더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둔둔을 연주하다니, 정말 용감하구나”


그 한마디에 긴장이 풀렸다.

그는 코라와 함께 한참 동안 나를 격려했다.

카오쑤 같은 젤리들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누군가를 격려하는 것’이 곧 삶의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서아프리카에서 겪어온 수많은 고생이 모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해관계도 이유도 없이 어떤 존재를 감각하고 사랑을 건넨다는 건, 매번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느낀다.

그는 내게 용감하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가 용감하다 느꼈다.

그 말을 그 자리에서 건네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된다.





숙소로 돌아오자 마타와 샐리는 공연을 위해 반짝이는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들은 마치 준비라도 해온 듯, 내게도 남아 있는 감비아 전통옷 하나를 건넸다.

꽃무늬에 레이스가 달린 투피스를 어색하게 입고 낡은 샌들을 대충 신자,

그들은 예쁜 장식이 달린 분홍색 샌들까지 신겨줬다.

이후 우리는 밤 10시경, 코라페스티벌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커다란 무대가 무색하게도 관객은 20명 남짓했다.

두 줄의 관객석 중 7-8할은 처음 보는 백인들이었다.

다들 짐은 많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 먼 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그들도 나처럼 코라를 배우러 온 걸까?


어떤 이는 남루한 옷차림의 자유로운 히피 같았고,

어떤 이는 눈동자가 풀려 마약에 찌든 것 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 곁에서 조금 떨어져, 어떤 카사망스 사람들 곁에 앉았다.






첫 무대는 솔로 시소코를 오마주한 합주였다.

코라가 세상에 전해진 후 처음 만들어졌다는 곡, 켈레파바(kelefaba)가 찬란히 울려 퍼졌다. 다섯 명의 연주자 중 네 명은 반주를, 한 명은 솔로를 맡았고 모두 함께 노래했다.


음원으로만 듣던 코라의 첫 곡을 듣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켈레파바의 음성이 공간을 압도했다.

느긋하게 기다리던 마타가 뛰쳐나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야!”하며 눈을 반짝였다.

그 표정을 보니 나도 덩달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역시나 노래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어딘가 미완의 감정이 남았다.

언젠가 젤리들의 노래를 다 이해하는 날이 온다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열리리라.

방 한켠에 잊혀져있던 만딩카어 사전이 생각나면서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헛된 다짐을 해본다.



이후 연주자들은 두세 곡을 더 연주한 뒤, 각자 가족의 코라 연주자를 오마주한 무대로 이어갔다.

랄로 케바 드라메(Lalo Keba drame-세네감비아), 엘하즈 순줄루 시소코(Elhadj Soundioulou Cissokho-세네갈), 엘하즈 바부 쟈바떼(Elhadj Babou Diebate sedhiou-세네갈), 솔로시소코(Solo Cissokho-세네갈), 타타딘딘 조바르떼(Tata Dinding Jobarteh-감비아), 모리 칸테(Mory Kante-기니), 투마니 쟈바떼(Toumani Diabate-말리).. 그들의 이름이 무대 위에서 다시 불렸다.


이 무대는 단순히 음악 공연이 아니라,

세네갈과 말리, 기니와 감비아 공동의 기억을 잇는 의식에 가깝다고 느꼈다.


전통은 아름답다.

잊히고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이어가기 때문이다.

살아생전에 자신에게 생명력과 영감을 줬던 노래들을 기억하며,

코라를 통해 그들과 살아있는 대화를 이어나간다.

눈을 감고 코라의 리듬에 몸을 맡겨보면,

수많은 코라 연주자들의 삶과 내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결됨을 느낀다.


코라 연주자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리듬으로 존재한다.

그들이 이어온 리듬은 고유하면서도 공동의 것이기도 하다.


지긴쇼르 국제 코라 축제에서 공연 중인 (왼쪽부터) 뎀보, 마타, 샐리


여러 무대가 이어지고, 마침내 타타 딘딘 가족의 차례가 왔다.

샐리와 뎀보의 코라 연주 위에 마타의 목소리가 얹혔다.

마타의 목소리는 압도적이었다.

살아생전 타타딘딘이 10대의 마타에게 가문의 노래를 잇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마타가 노래하는 도중, 투마니쟈바떼의 동생이 뾰족구두를 신은채 달려와 마타의 마이크를 빼앗고 노래를 이어갔다.

서아프리카 무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누구든 언제든 무대의 순간에 노래로 마음을 전할 수 있다.

그는 노래로 한참을 마타를 격려했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그 광경이 아름다워 뭉클해졌다.


마타는 사랑을 바다처럼 내어줄 줄 아는 사람이다.

오늘 하루의 여정만으로도 그가 내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주었는지 느꼈다.

그의 단단한 목소리는 그런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느낀다.

아마도 비슷한 결의 투마니 동생이 그를 격려했던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뎀보 가족의 공연이 끝나고 다른 가족의 공연이 두 팀이나 더 남아있었지만, 새벽부터 이어진 여정에 지쳐 공연을 뒤로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백인 관객들은 이미 모두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화려한 무대 뒤에 남겨진 텅 빈 관객석을 보고 돌아오니 씁쓸하다.

카사망스에서 코라의 자리는 어디쯤 와있는 걸까?

공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우리는 말이 없었다.


저녁 내내 아무것도 먹지 못해 쫄쫄 굶은 배를 차게 식어버린 바게트 빵으로 대충 때웠다.

좁은 침대의 마타와 샐리 사이에 누워,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금세 잠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의 코라페스티벌은 끝이 났다.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차 안에서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뎀보:

“좀 더 침착(캄 다운 calm down)하면 굳이 자신을 보여줄 필요가 없어.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항상 외부로부터 그 관심을 받아야 하거든.

그러니 자신을 낮출 필요가 없지. 그냥 스스로 단단하면 돼“


카사망스에서의 1박 2일 동안, 나는 뎀보가 유독 무던한 사람 같다고 느꼈었다.

표정의 변화가 적고, 침착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많은 젤리들이 어릴 때부터

자신의 사회적-존재론적 역할을 받아들이며 살아간다는 걸 느꼈다.



뎀보의 말이 천천히 내 안에 스며든다.

나도 더 이상 누군가에게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자기 리듬을 세밀히 감각하는 순간들이 쌓여 단단함이 되는 게 아닐까.

다른 건 몰라도, 코라와 함께 산다면 그게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믿게 된다.


코라페스티벌의 연주자들은 누군가처럼 연주하지 않는다.

자신의 리듬을 찾아 코라와 함께 살아간다.


그렇게 카사망스에서 만난 코라의 리듬들은

내 안의 무언가를 정리해줬다.

나는 여전히 길 위에 있고, 그 리듬이 나를 데려 가고 있음을 느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