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갈 카사망스 조바르테 쿤다에서 만난 환대, 금기, 변화하는 전통
세네갈 카사망스 지역에서 열린 코라페스티벌에 다녀왔다. 지긴쇼르(Ziguinchor)에서는 일 년에 한 번, 사조 시소코(Sadio Sissoko)라는 코라 연주자가 이 축제를 연다. 카사망스를 비롯한 세네감비아의 중요한 코라 폴라들이 한자리에 모여 코라를 연주하는 자리다. 감비아에 머무르는 동안 한 번도 코라 공연을 보지 못했던 나는 큰 결심 끝에 길을 나서게 됐다.
남부 세네갈의 카사망스로 가는 길은 다카르에서보다 감비아에서 훨씬 가깝다. 지금의 세네갈 카사망스와 감비아는 서구가 그어 놓은 국경으로 갈라졌지만, 오랫동안 같은 통치권 아래에서 문화를 공유해 온 지역이다.
세네갈·감비아·기니비사우 일부 지역은 카분케(Kaabunké)라고 불리는 옛 만딩카 왕국이었다. 13세기 만데 제국 시절, 티라마간 트라오레(Thiramaghan Traoré) 장군이 설립해, 이후 17세기부터 식민지 직전까지 카부 제국으로 이어졌다. 이 제국은 만딩카 족장들과 전사 계급이 주도했고, 상업·전쟁·이슬람·전통 신앙·음악이 복잡하게 얽힌 독특한 정치‑문화 질서를 형성했다.*
특히 이 지역은 코라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어, 나에게도 각별한 장소다. 그래서 감비아만큼이나 카사망스에도 만딩카 젤리와 코라 연주자가 많다. 내 감비아 스승 산잘리는 "영국과 프랑스가 국경을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카사망스는 같은 나라였고, 사람들은 자유롭게 오갔다"고 회상했다.
동이 트자마자, 뎀보 조바르떼의 집으로 향했다. 뎀보는 감비아에서 활동하는 코라 연주자이자, 전설적인 타타딘딘 조바르떼(Tata Dindin Jobarteh)의 아들이다. 타타딘딘은 서아프리카 코라 계보의 중심에서 장애를 딛고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음악으로 삶·사랑·정의를 노래한 인물이다.
뎀보는 내가 머무르는 곳에서 차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산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새벽녘 그의 집 앞에서 두 시간이나 기다린 끝에 우리는 함께 조바르떼 쿤다(Jobarteh Kunda, 조바르떼 가족들이 사는 구역)로 향했다. 대문을 열자 뎀보의 가족들이 버선발로 달려 나와 두 팔 가득 나를 안았다. 함박웃음을 짓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떤 의무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살면서 이런 환영을 받아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얼떨떨한 나는 그들이 내어 준 서아프리카식 녹차(아타이아)를 한잔 마셨다. 누구인지, 왜 왔는지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느꼈다. 그냥 거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았다. 암만 생각해도 이 사람들은 나와 다른 종의 생명체(?)가 아닌 것 같이 느껴졌다.
잠시 쉬고 우리는 다섯이서 차에 몸을 실었다. 뒷좌석에 네 사람이 껴앉으니 죽을 맛이었다. 국경을 넘고 다리가 마비되는 것 같은 위협이 몇 차례 찾아왔다. 어느 정도 갔다 싶으면 경찰들이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뇌물을 요구했다. 그렇게 대여섯 번의 고비 끝에 다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후 세시 반,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남부 카사망스의 마라사숨(Marsassoum), 조바르떼(Jobarteh) 가족의 큰 본가였다. 서아프리카 문화에서는 서아프리카 사람이 아닌 사람들을 위해 서아프리카식 이름을 준다. 나도 그렇게 '디아바떼(조바르떼)'라는 서아프리카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의 뿌리 중 한 곳인 큰 시골집에 올 수 있어 기뻤다.
커다란 철문을 열고 들어간 부지에서 수십 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차에서 내린 우리에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덕담을 건넸다. 미소와 포옹세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끝났나 싶으면 저 멀리서부터 지팡이를 짚고 도착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덕담을 건네고 또 건네주셨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따뜻하고 말랑하다. 마치 끝이 없는 웃음과 살결들에 파묻혀 살아 있는 기쁨을 나누던 느낌으로 남아있다.
정신없이 인사와 덕담을 나누고 나니 철문 안의 세계가 눈에 들어왔다. 마라사숨의 조바르떼 본가는 감비아에서도 흔히 보이는 공동 주거지(컴파운드)로 되어 있었다. 3000평 정도 되는 부지에는 300-40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다른 컴파운드와 마찬가지로 가운데 커다란 공터가 있었고, 그 공터를 둘러싸고 수십 채의 집들이 마주 둘러 자리하고 있었다.
공터의 가장 안쪽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나무 아래로 남자 어른 쉰 명 정도가 기도를 하고 있었고, 그 앞 망고나무 아래에는 쉰여 명의 어린이와 할머니들이 돗자리를 깔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공터의 한가운데는 마흔 명 정도의 여성들이 점심을 짓고 있었고, 그 사이로 닭과 병아리, 양들이 정신없이 오갔다. 공동주거지를 넓게 둘러싼 담벼락 위로 커다란 두건 독수리가 날개를 펄럭이는 모습을 보니 마치 다른 우주에 도착한 것 같았다.
그렇게 요리를 갈무리하고, 컴파운드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참 동안 밥을 배분한 뒤 우리도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며 보니 대문 앞 입구에 턴테이블과 그 앞을 오가는 젊은 남자들이 보였다. 그 옆에는 커다란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커다란 스피커에는 현란한 코라 연주를 기반으로 한 일렉트로닉 만데 음악이 쉴세 없이 쏟아졌다. 전통 행사처럼 보였지만, 이곳 사람들은 "매일 이렇다"라고 했다. 일상이 잔치와 맞닿은 스케일에 또 한 번 놀랐다.
변화하는 의례의 시간
식사를 마칠 즈음, 소녀들이 담벼락 너머를 기웃거렸다. 그들 중 몇몇은 과감히 떼를 지어 대문 바깥으로 나갔다가 성난 얼굴로 쫓아오는 남성에게 쫓겨 달아나기를 반복했다. 호기심에 나가보니 마을 공터에 칸쿨랑 신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칸쿨랑은 할례 의례 중 소년들을 보호하고 악령을 쫓는 신이다. 카사망스에서는 건기(2–4월)에 진행되는 연령 의례로, 월로프·풀라니·만딩카와 같은 다양한 공동체가 동일한 또래 집단을 대상으로 함께 거친다.
하지만 이 의례는 소년들의 세계다. 여성은 근처에 설 수 없다고 했다. 칸쿨랑이 오후 내내 마을을 누비는 동안, 집 밖을 나서지 말라 당부받았다. 그 말을 들으니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이건 그들의 문화고 나는 외부인이지만, 내가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반복되어 온 억압의 구조가 어디선가 다시 내 숨을 막는 것 같았다. 감비아에서도, 한국에서도, 지구 어디에서든 반복되던 금기와 경계들. 왜 내 시선은 언제나 ‘밖'이어야 할까.
한편으로는 '여자들은 안된다'는 말을 무시하고 싶었지만, '칸쿨랑을 만나면 큰일 난다'며 침을 튀기고 설명하는 이모들의 진심 앞에서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다. 결국 담벼락 틈 사이로 몰래 칸쿨랑을 훔쳐보았다. 호기심과 체념이 한꺼번에 밀려와 목이 탔다.
나는 서아프리카에 오면 꼭 탈춤(mask dance)을 보고 싶었다. 지역의 중요한 전통이자 내가 배우고 있는 음악과 춤이랑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사회적 의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칸쿨랑을 볼 수 없어 속상했다.
칸쿨랑 의례는 공동체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성장해 가는 사회적 전환의 과정이다. 본래는 의식이 수행되는 3개월 동안 할례를 받고, 비밀 지식과 수화, 다양한 사회적 상황에서의 올바른 행동 규범을 배운다. 참가자들은 만딩카어로 노래를 부르고, 자신들의 사회적 역할의 변화를 기념하는 춤, 시민으로서의 성공을 보장해 주는 춤, 그리고 이 의례를 보존하는 이야기들이 담긴 춤 체계를 배운다. 이 3개월의 과정이 끝나면 의식적인 목욕을 거친 후, 새로운 책임과 역할을 가진 공동체 구성원으로 돌아온다. 이때 잠바동(Jambadong)이라는 춤이 이들의 공동체 복귀와 새로운 사회적 역할 시작을 기념하며 공연된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사람들은 농업 중심의 경제 제도에서 벗어나, 산업화와 자본주의에 의해 이동하게 됐다. 도시화는 전통적인 만딩카 의식과 춤의 지속적인 실천을 방해해 왔다. 한때 춤은 삶의 모든 과정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체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가게나 사무실에서의 유급 노동, 학교와 대학 출석 등 현실을 살게 되면서 점차 그 위치를 잃어버리게 됐다.*
이제 지긴쇼르에서는 칸쿨랑을 더 이상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청소년들은 병원에서 할례를 받는다. 여전히 연령대 의식을 고수하는 사람들조차도, 전통적인 건기 시즌 대신, 방학이나 휴일에만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세 달에 걸친 의식이 단 몇 주로 축소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요소들이 빠질 수밖에 없게 됐다.*
세 달간 배웠던 언어, 비전 지식, 춤을 단 몇 주 만에 익힌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그렇게 만딩카 춤 체계는 카사망스에서 서서히 다른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마을 공터에 퍼지던 덕담과 코라 음악, 쨉 냄새, 담벼락 너머의 웃음소리는 여전히 이 전통이 살아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 변화의 결을 따라, 또 다른 사람들의 춤과 노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다음 화에 계속
* https://www.scribd.com/document/489832745/Kaabu-Wikipedia
* Chronicling the history of traditional mandinka dance, Ofosuwa M.abiola,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