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을 괴롭혀온 무릎 통증을 잡기 위해 수술을 예약하고, 정밀 검사를 했다. MRI 촬영 결과, 받은 진단명은 연골연화증, 활액막 추벽 증후군, 지방체 충돌 증후군이었다. 이것들 때문에 가장 통증이 심한 왼쪽 무릎은 약간의 연골 결손도 의심된다고. 30대 초반에 이런 무릎을 가진 환자는 처음 본다고 의사 선생님이 어찌나 혼을 내던지, 괜히 머쓱해질 정도였다.
그런데 옆에서 설명을 듣던 엄마가 왜 이렇게 된 거냐고 물었을 때 의사 선생님의 대답이 의외였다. 체중 증가, 무리한 운동, 뭐 이런 이유를 말할 줄 알았는데, 대뜸 ‘유전’이란다. 활막을 두껍게 만들어준 것도, 불안정한 무릎 구조를 만들어준 것도 전부 부모라고. 왜 자식에게 이런 무릎을 줘서 젊은 나이에 고생시키냐고 의사 선생님이 엄마에게 반농담도 던졌다.
희한했다. 왜 희한했냐 하면, 마음이 더없이 편안해졌기 때문에 그랬다. 나는 왜 타고나길 무릎이 안 좋게 타고났을까 불평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오히려 개운했다. 내가 잘못한 탓이 아니구나! 나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었구나! 이런 생각들
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체중 관리를 못해서, 근육을 키우지 않아서, 자세를 바르게 하지 않아서, 무리한 운동을 해서 무릎이 아픈 게 아니라 타고나길 쉽게 아픈 무릎이구나. 내 행동들이 무릎 통증에 영향을 아예 안 준 건 아니었겠지만, 내 행동만의 잘못은 아니었구나. ‘내가 뭘 얼마나 무릎을 잘못 썼다고’라는 생각으로 억울해했던 지난날의 답답함이 깔끔하게 씻겨 내려갔다.
수술을 위해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침대에 누웠다. 유전 덕에 나는 또래보다 상대적으로 일찍 무릎 수술을 하게 됐다. 나는 남들보다 더 일찍, 자주 병원을 다니며 무릎을 관리해야 하고, 남들보다 더 조심히, 천천히 활동하며 무릎을 아껴 써야 한다. 그렇게 관리를 잘해도, 타고난 무릎 때문에 미래의 수술들이 거의 확정적으로 예견되어 있다. 그러니 지금부터의 관리는 앞으로 수술을 안 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다음의 수술 시기를 최대한 늦추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확연히 열악한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편안하다. 이 편안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생각 끝에 ‘원인의 규명’과 ‘결과의 수용’에서 오는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유전이 원인이니, 후천적 노력을 더 기울인다.' 이렇게 깔끔하고 단순한 명제라니!
이런 점에서 불가항력인 유전은 대단하다. 유전은 수많은 결과의 원인을 설명하고, 수많은 결과의 해법을 제시한다. 한때 ‘사람은 타고난 대로만 살아야 하는 수동적인 기계일 뿐인가’ 고민하며 유전과 진화를 소심하게 부정한 적도 있었으나, 진화의 진정한 힘은 타고난 유전을 인식하고 후천적인 노력으로 발현을 조절하는 데 있다는 진화심리학자 데이비드 버스의 말이 아주 생생하게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다.
무릎 수술을 하러 와서까지 생물학적인 생각을 하는 내가 참 너무하지만, 2년을 괴롭혀온 억울함과 답답함이 뻥 해소된 오늘을 꼭 기록해야 했다. 불리한 유전을 타고난 어느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약간이라도 수용의 진가를 알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런 생각으로 써 내려간 글이다.
2주 뒤면 무릎 수술이 끝난다. 이제 나는 유전을 받아들이고 후천적인 노력을 하려고 한다. 다음의 수술 시기를 80살 이상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늦추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