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최소 1명은 재밌어할 내 인생 우주 레이저 쏘는 이야기

2편: 공무원 1년 후 퇴사한 이야기

by 새벽바다

2014년 10월.


나는 '임기제 공무원' 채용에 지원해서 합격했다.


[서울특별시 00 구청]에 출근했던 첫 달이었다.


나는

수도권 대학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했고,

4학년 때부터 MBC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쓰는 프리랜서 작가로 일했던 경력 외에

대단히 특별할 건 없었다.

(이 이야기는 아래 18편에서 읽어주시길!)

https://brunch.co.kr/@nartist/96


2009년.

대학 1학년때 전공 대표를 맡았었기에,

나름의 공로(?)를 인정받아 운 좋게 2개월 동안 영국 단기 어학연수를 갔으나

남은 건 사진과 추억이었고,


대학을 다니는 몇 년 동안은

하루도 쉬지 않고

카페며 레스토랑의 알바를 병행하고,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의 영어과외를 다니던

치열하고 허덕이는 인생 경력이 유일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내 꿈은 '언젠가 꼭 영화감독'이었기에

'영화연출'이라는 내 전공에 나름의 특별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제작하는 건 하나부터 열까지 '돈'이었고,

당시 까지는 배우와 스텝의 '열정 페이'에 전적으로 의지해 영화를 하나 제작하는 게

어느 정도는 가능했던 시기였기에

'여유가 생길 때까지' 꿈을 무기한 연기하는 마음의 상태였다.


타인의 열정에 기대어 영화를 제작할 수 있던

그 시대의 분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빠르게 바뀌었지만 말이다.


나는 어찌 되었든 대학을 졸업한 이상,

계속 서울에 살기 위해

취업을 해야 했다.


당시 나는 타인의 집에 얹혀살던 신세였고

그 집과 가까운 지역에서 일자리를 찾고자 했다.

당시엔 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은 안정적인 게 좋지?' 하는 생각에

채용 사이트 여기저기를 뒤지다가 문득 -

'관공서'까지 생각이 미쳤다.


나는 그 동네 OO구청 홈페이지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마침 그날 oo구청 홍보과에서 근무할 임기제 공무원을 뽑는다는 공고를 발견한다.


기간은 1년 단위이지만, 5년까지 연장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나는 최대 5년 일하고 난 후엔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고 이해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틀린 생각이었다.


여차저차 1차 서류에 합격을 하고,

면접을 보러 갔는데,

당시의 공기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나만 여자였고,

대기실에 앉아있는 면접자들 모두 남자였다.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홍보과에서 기획 영상, 홍보영상 을 제작하는 PD를 뽑는 자리였다.


당시까지 '영화 혹은 영상' 분야 전공자에서

남녀 성비는 월등히 남자가 우세했다.


그날의 면접이 생생하다.


살짝 긴장한 상태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5~ 6명의 고위 공직자(?)분위기 아저씨들이 근엄하게 앉아 계셨다.


질문의 분위기는 딱딱하지 않았다.


다만, 세 번째 질문에서 나는 미끄러졌다.


"혹시 4K에 대해 잘 알아요?"


당시 4K 화질 영상이 고개를 들고 쏟아지려던 시기였는데

나는 사실 어렴풋이 들어만 봤을 뿐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잘 모릅니다"라고 대답했다.


면접이 끝나고 네이버에 4K에 대해 검색을 해 본 후 별 것도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 이런 것도 모른다고 했으니, 떨어지겠네~!"


나는 포기했었다.


하지만 얼마 후


단 1명을 뽑는 그 자리에 합격자로 이름을 올리건

바로 나였다.


그 대기실에 앉아있던 안경 끼고 카메라 잘 만질 것 같은 남자들은

나처럼 4K를 모른다고 대답하지 않았을 것인데..


나는 본격적으로 oo구청 홍보과 공무원으로 일을 시작한 후에야

어렴풋이 내가 뽑힌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


이미 홍보과에서 나보다 선임 PD로 20년 동안 일하고 있었던

남자 PD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5년 지나면

그만둬야 하는 줄 알았던 그 자리는

5년 후 다시 지원 해서

큰 문제만 없으면 계속 같은 사람을

채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 남자 선임 PD는 같은 자리를 20년을 넘게 지켜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건

나에게 그 세 번째 질문을 했던 남자분이

내가 속하게 된 홍보과의 과장님이었다.


나를 꽤 좋게 봤고,

영상 기술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괜히 나댈(?) 염려가 있는 남자보단,

아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조금 더 부드럽고 유연해 보이는 여자인

나를 뽑은 것이다.


심지어

당시 미디어팀의 팀장으로 계시던 분은

나와 '이름'이 똑같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홍보과의 과장님과 미디어팀의 팀장님은 꽤나 절친해 보였다.


나는 알았다.


내가 참 운이 좋다는 것을.




지금 생각해도 참 편하고 쉽고, 안락한 일터였다.


당시 생짜배기 사회 초년생이라

나는 공무원들이 쓰는 '지출'이나 '결제'에 관한 문서들이 낯설게 느껴졌으나,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 돌아보니 그렇게 쉽고 심플한 곳도 없었다.


게다가 나는 나름

일반 사무가 아닌 전문분야의 일을 하는 PD였기에

자발적으로 영상물을 기획하고,

과장님 컨펌이 떨어지면 일을 한다.


내가 일정을 잡아 촬영하고 완성해서

통과가 되면

바로 구청 홈페이지와 유튜브 채널에 올릴 수 있는 빠른 시스템이었다.


기획을 하는 것에 대단한 PPT나 철저한 문서 보고를 작성하는 것도 필요치 않았다.


대략 기획물에 대한 간단한 구상과 정보만 작성해서 보고하고

구두상 허락을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철저히 실무 중심 공무원이었다.


게다가 2년 차 선임 PD가 있으니

구청장을 쫓아다니며 뉴스를 찍고 편집하는 일은 그분의 업무였고,


또한 가끔 뉴스를 찍고 편집도 하지만,

대부분은 당시 oo구에 있는 홍보할 만한 소재를 찾아 영상을 기획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스스로 제작하면 되는 일이었다.


가끔 촬영 나가거나, 결제 문서 쓰는 게 귀찮긴 했지만, 어쨌든 업무는 수월한 편이었다.


어느 정도 기획에 자유가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메리트였다.


게다가

큰 문제만 없으면 5년 최대임기가 끝나고 재지원하여,

거의 평생 일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공식적으로는 계약직이지만

1 - 9급까지 정규직 공무원과 같은 급의

월급을 받고 혜택을 전부 받으니,

그만한 황금 보직이 또 어디 있을까!



사회초년생의 첫 번째 회식-


첫 번째 회식 장소가'종로'였다.


지금도 너무 황당해서 피식 웃음이 나는 일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꽤나 회식이 빈번하던 시대였다.


주 1회 과장님의 은근한 '회식' 푸쉬가 있었고

대부분은 참석을 했다.


제일 처음 회식을 따라 가는 길-

나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리벙벙했다.


"저희 어디로 가나요?"


내 질문에 20년 차 선임 PD가 대답했다.


"종로로 갈까요~~"


당시 거의 경기도에 붙어있던 그 동네에서

종로까지는 대중교통으로 2시간 반.

차로 가도 1시간 반은 잡는 거리였다.


'뜨악'이었다.


'무슨 회식을 종로까지 가서 하지?'

오늘 집에는 들어갈 수 있나?!'


이런 생각이 이어졌는데,

황당하게도 걸어서 도착한 곳은

구청에서 200미터가량 떨어진 '종로빈대떡'이었다.


"짜잔! 여기가 종로~!하하하!"


_ 아직도 그 선임 PD의 천진난만한 웃음과 허탈한 아재 개그의 순간이 선명하다.


그날 종로빈대떡에서의 1차 회식이 끝난 후

2차로 근처 노래방에 갔다.


트롯 뽕짝 메들리가 이어지고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가슴 설레게 하는 남자동료 하나 없는

그런 구성원과 몰려 다니는 회식이

딱히 재미는 없었지만,

그런 자리에 크게 불편이나 부담을 느끼지도 않는 성격이었다.


다만,

어떻게 과장님에게 잘 보여서

빨리 승진 좀 해보려는

9급 여자 주무관의 가슴 털기 애교에

속으로 경악을 했던...

약간의 충격적인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과장님은 나를 이뻐하셨다.


나와 이름이 같은 여자 팀장님도,

내가 나이는 어리지만

영상은 꽤 감각적으로 잘 기획하고 만드는

막내라고 편하고 가볍게 대해주었다.


일은 비교적 자유로웠고, 편했고,종종 지루했다.


월에 한 번씩은 모든 부서의 개별 팀이 돌아가면서

구청장과의 식사 자리를 가졌다.


나는 거기서 막내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구청장에게 꽤 웃긴 얘기도 하고,

조심스레 분위기를 살리곤 했다.


그때 그곳에 있던 구청장님은

현재 국회의원이 되었는데,

의원으로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크게 알려지진 않는 듯하다.


다만 그때의 조금 정의롭고 선한 인상과 달리

지금은 관상이 좀 바뀌어 보인다는 느낌일 뿐이다.


나는 대부분 6시에 칼퇴근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늘 내가 먼저 그 사무실을 나섰고,

임기제라는 나름의 권한(?)때문인지 딱히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게다가 내가 하는 일은

방송으로 드러나는 일이었기에,

꽤나 칭찬도 받고 구청에서 중요한 업무로 인식을 하는 듯했다.


매년 1월

지역의 대강당에 주민 천여 명을 모아두고

'신년인사회' 영상을 제작하는 건 내가 구청에 입사한 가장 큰 이유였고,


일반 업체에 돈 5 - 6천을 들여서 제작할 영상을

직원 한 명이 뚝딱 만들어내니,

구청 입장에선 꽤나 큰 예산을 아끼는 턱이었다.


게다가 그 영상의 주인공은 구청장이니,

그분의 입장에선

무시할 없는 1년 중 가장 중차대한

행사인 것이다.


물론,

홍보과 과장님과 미디어팀 팀장님의 최대 업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내가 1년 후 퇴사를 결심한 이유는 뭐였을까?




답은 간단하다.


운명의 변화에 이끌려

내 감정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구청의 본관이 아닌

별관에 위치해 있던 홍보과 건물은

조금 퀴퀴하고, 굉장히 회색빛의 사무적인 분위기였다.


다닥다닥 붙은 책상 한 켠을 차지하고,

나는 반복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간다.

그리고

영상을 만든다.


완성이 되면 보고를 하고,

온라인에 게시를 하고,

그렇게 한 달이 흐르면 월급을 받고,

가끔 별생각 없이 회식을 간다.


지금도 느끼는 사실 하나


모두가 저마다의 일을 하며

살아있음을 느끼고,

때론 좌절하지만,


인간에게 있어 고난과 고통의 원인이

'일'의 속성 때문은 아니다.


절대 아닐 것이다.


그 어떤 회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퇴사를 결심하게 하는 사유에서

'일'의 난이도와 특성 따위는 10%도 차지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결국 배우면 할 수 있고,

모든 일은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의 원인이자,

문제는 - 오직 사람, 사람, 사람이다.


그곳에서 나를 괴롭게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누구 하나 진정으로 보람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그게 곧 문제가 되었다.


최소 근무경력 5년 ~ 20년, 30년 이상의 구성원들.


- 곧 정년퇴직을 앞둔 과장님,


- 구청의 일과 생태계가 밥 먹듯 익숙해 보이는 25년 차 팀장님.


- 세무를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18년 차 계장님,


- 그 외 매일 퇴근만 기다리는 20대 후반부터 30대의 주무관들.


그리고 막내인 나.


회식할 때 말고는

삶의 생기와 보람이 딱히 없어 보이는

과장님의 패인 주름과 깊은 한숨.


과장님의 잔소리와 아재 농담에 픽픽 웃으며 대꾸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지루하고 우울하던

중년 여성 팀장님의

무기력하고 지루한 기운.


나에게 차갑게 대하는 여자 주무관을 향해

나 대신 뒷담화를 해주며

'고리타분한 관공서에서

승진에만 목숨 거는 여자들의 인정머리 없음'에 분개하던

어느 여자 주무관의 투덜거림.


조심스레 청첩장을 내밀며,

'직장 생활만 하다 보니 친구도 다 떨어져 나가고

직장 동료는 많이 오지 않을 거라며

내게 결혼식 부케를 꼭 받아주길' 애청하던

선임 주무관의 안타까운 눈빛.


나는 그 모든 생기 없음, 낡음, 노쇠함, 지루한 기운에 점점 절어갔다.


5년까지 어떻게 버텨본다 해도

그 미래의 내 얼굴이 마치 그들을 닮아갈까 봐

나는 점점 암울하고 두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곳에서 갑작스러운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작게 오픈할 카페의 인테리어부터 메뉴 구성, 운영까지 맡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서비스업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지만,

인테리어와 메뉴 구상이라면 꽤나 구미가 당기는 부분이었다.



그러다

선임 PD가 휴가를 떠났던 어느 날.

나는 그를 대신하여 구정 뉴스를 편집하고 있었다.


뉴스는 구청장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

아주 디테일하고 중요한 사안이다.

그 뉴스를 완성시킨 후, 과장님의 컨펌을 받으러 갔다.


과장님은 정년 퇴직을 몇 년 앞두었지만

내년 1년 만이라도 기적적으로 국장으로 승진하고 싶은데

동네 독거노인과 손을 잡는 '구청장님'의 측은한 표정과 전체 풍경이

제대로 안 잡혔다며 많이 아쉬워했다.

몇 년 안 남은 자신의 '승진 미끄러짐'을 하소연하며

퍽 허탈하고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그가 한 명의 고독한 중년 가장임을 이해했다.

그의 너털 웃음을 보는 순간

어릴 땐 몰랐던 내 아버지의 허탈함과 패배감을 엿보았다.

내 아버지처럼 늙어가는 남자..

쓸쓸하고 깊은 연민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

익숙하게 쾨쾨한 먼지 냄새가 베어있는

어두운 편집실에 돌아와서

뉴스를 업로드하고,

깊은 명상에 빠져 들었다.


그리고,


내가 1년 가까이 기획하고 만들었던

10개가 넘는 영상들을 주욱 스크롤해 보았다.


'메르스 예방 안전수칙 홍보영상'

'자살예방 캠페인 영상'

'구청 캐릭터와 함께 하는 주민 건강운동'

'우리 동네 자랑스러운 마을기업'

'상생을 앞세운 oo구 신년인사회'

등 등...



ㅡ 그때

어디선가 운명이 나를 스치며

귓속말을 하고 지나갔다.



잠시 바람이 불었을까?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



"이제 그만해도 돼~"


그래, 그런 목소리가 스쳐갔다.



나 대신 운명이 결정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사표를 냈다.


구청장까지 나서서

조금만 더 같이 하자며 다정한 말을 건네왔지만

나의 고민은 끝난 상태였다.


그렇게 평생 철밥통 계약직 공무원 PD로 살아갈 뻔했던 내가

지금은 바다가 보이는 섬,

제주도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시간은 우리의 착각 속에

과거 - 현재 -미래로 흘러간다.


하지만 아니다.


모든 시간은 동시에 존재한다.


다만 어떤 거대한 신의 질서랄 까?

그런 거대한 힘이 시간축에서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아놓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동시에 존재할 2014년, 2015년의 'N바다'


세계 속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시간을 거슬러 말해주고 싶다.


"때려치워도 괜찮고,

더 해도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다 알아져~


네가 뭘 하든,

어디에 있든,

다 괜찮아.

다 괜찮은 거야.


네가 꿈꾸던 서울이 이런 건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도 돼~"



그리고,


2025년, 지금의 나를 떠올리고 있을

2035년의 'N바다'에게

또한 먼저 말해주고 싶다.



"있잖아.

결국 다 필요한 시간이더라.

지금 내가 겪는 모든 일도,

사람,

사람,

사람도 말이야.


결국 10년 후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일인 거... 알아.


그곳에서

더 깊게 출렁거리고,

더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너를

여기서부터 기다릴게.


곧 만나자."



_ 안녕, 미래의 N바다.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25화1초에 24멈춤, 남편은 바나나 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