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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에 24멈춤, 남편은 바나나 인형

24분의 1은 에어콘 껌딱지, 24분의 1은...

by 새벽바다

나는 어떤 날엔 '나'이고,
어떤 날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너무 나약하고,
나는 아주 강해요.


나는 웃음이 헤프고,
그보다 눈물도 헤프죠.


번뜩이는 순간엔
살인자 마저 이해하려 들고,
스쳐가는 순간엔
권력자 마저 이해하려 하죠.


나는 나의 추함에
하루에도 여러 번 부끄럽고,
그 틈새 틈새마다 반짝이는

내 안의 눈부심에

스스로 참 대견해요.


에어컨이 파업하던 더운 여름 날,
3만 원짜리 선풍기를 데려와

뚝딱뚝딱 두들기다

결국 울어버리는데,


다음날
기사님 손길 하나에
찬 바람 터져 나오니
쩌든 내 세상이 갑자기 괜찮아져요.


침대 구석에 홀로 뉘여둔

노란 바나나 인형에

문득 미안하다가도,
일이 좀 풀린 날은
외로웠을 바나나를 끌어안고
베개 삼고,
남편 삼아,
뒹굴뒹굴 애정표현을 하죠.


저녁밥을 애써 먹고도
속이 헛헛하면
괜시리 외로워 하고,
몸뚱이 편안하고자

침대에 발라당 누우면
마음속 물통이 거꾸로 뒤집어져
괜히 눈시울이 촉촉해져요.


내일은 조급하고 두려우면서,
먼 훗날은 근거도 없이
찬란하리라 믿죠.


내가 늘 닿고 싶은 사람은
먼 곳만 향하고,
함께하기 버거운 사람은
그림자처럼 붙어 가요.


삶은 영화처럼
1초에 24장면의 멈춤으로 이어지는데,
난 자꾸만 그 멈춤을 망각하고
격렬한 움직임만 쫒다가
자꾸만 뼈가 갈리고,
마음이 딱딱해져요.


보이는 것들,
만져지는 것들,
향기 나는 것들이
날 자꾸 비춰요.


너는
이렇게 생겼고,
이렇게 웃고,
이렇게 이해하고,
이렇게 살아간다고 말예요.


무심결에 튼 TV 속에
도깨비가 등장하면,
내게는 나타나지 않았던
멋진 인간 도깨비를 동경하며,
사랑에 빠져요.


무심결에 연 카톡창에
그리운 사람의
새로운 사진이 등장하면
늘 곁에 닿을수 없는

그 멋진 미소를 동경하며,
사랑에 빠져요.


이 모든 일상의 파편 위에서

아직 결정되지 않은 초안처럼

살아가고 있어요.


오늘은 24장의 멈춤 중에

어떤 찰나의 순간을 품었을까요?


찬란한 미래의 어느 날,

오늘의 멈춤을 돌아보면

'모든 것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라며,

나를 또 한번 토닥토닥- 대견해 할 수 있을까요.


바나나.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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