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바다 Oct 14. 2023

2.지옥도(3)

지옥도3. 지옥도의 마지막장: 기적의 신호탄

-지옥도의 마지막장: 기적의 신호탄



2012년. 여름. 

 

외사촌과도 따로 분리를 하고 

서울 안암동, 논현동을 거치며 대학생활을 하던 나는 – 

생활비를 벌기 위해 고급 자동분사형 방향제를 판매하고 다녔다. 



엄마의 등골을 빼먹으며 학비와 이런저런 목돈을 받아쓰긴 했으나 

역시나 양심상 월세나 생활비만큼은 내가 벌어야 했다. 

아는 분의 추천으로 실내에 설치하는 고급 방향제 영업일을 시작했다. 

 



2011년의 지독한 폭염에 시달렸던 여름 어느 날. 

나는 논현동에서 발품을 팔며 방향제 하나를 팔아보기 위해 무진 애를 썻다. 



 

밤이 되면 불이 켜지는 빨강파랑의 촌스런 포장마차들, 

길거리에서 뿜어내는 담배연기,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사람들, 

시장골목에서 풍기던 비릿한 고기와 야채 냄새들, 

어설프게 자리잡은 식당과 카페들의 분주한 모습들.. 



 

화려한 밤이 지나고 아침일찍 펼쳐지는 논현동 골목의 풍경은  

나뒹구는 술병과 쓰레기와 담배꽁초로 번잡했다.



하지만 바로 옆 신논현역과 강남을 이웃해 가까우니 

나는 그 일대를 구석구석 들어가 발에 땀나게 영업을 하고 사람을 사귀고 

운수 좋은 날은 방향제도 여럿 팔 수 있었다. 



 

2011년, 2012년 그 해는 참으로 여름이 더웠다. 

오전부터 나가서 해가 질때까지 가방에 자동분사 기계와 방향제 샘플과 

홍보용 리플렛을 꽉 채운 채 들고 다니며 상가와 사무실, 식당과 카페, 갤러리부터 

외국 대사관까지 차별없이 넘나들며 영업을 다녔다. 



 

당시 20대 초반이라 앳되 보이는 얼굴이 영업에 있어 안좋은 조건이라 생각해

나름 옷도 차려 입고 어느정도 성숙한 분위기도 내보며 다녔지만 

누가 봐도 왠 대학생이 알바 뛰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일주일을 온종일 다녀도 방향제 하나를 못팔았다. 

 


어느 날은 땡볕 아래 땀은 삐질 삐질나고 어지럽고 

발에 생긴 무좀은 더 가려움이 심해져서 도저히 걸어 다닐 수가 없었다. 

 


나는 주머니를 다 털어도 겨우 몇 백원 뿐인 나의 재정능력을 한탄하며 

어느 편의점 플라스틱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래도.. 

하늘이 무심하지 않은 건지 

인복이 많다던 사주풀이의 말이 옳았던 건지 

 

엄청 착하게 생긴 알바생 한명이 

시원한 음료를 건네 주었다. 



 

시크하고 무관심하게 그저 툭 – 한 개를 주는데

하늘에서 내려 온 천사가 따로 있을까. 

그 시원한 파란색 음료를 벌컥벌컥 들이킨 후 

맞은 편 허름하고 오래된 식당을 쳐다보니

돈까스&스파게티를 파는 곳이었다. 

 

 

무슨 힘이었을까. 


 

나는 알바생 친구에게 연신 고맙다는 말을 한 뒤 

그 일대의 모든 간판 없는 사무실까지 다 들어갔다. 

 


일상의 기적은 이렇게 간절할 때 이루워진다. 


 

어느 여행사 사무실에서 쓰던 방향제 향이 독해서 

죽겠다느니..하며 내 방향제를 설치하기로 했다. 

 



입구와 사무실 책상 뒤와 화장실까지 해서 도합 3개를 설치하고 

나는 순수익을 계산해보았다. 

기계는 원가에 설치해주고 

방향제는 개방 만원의 이윤을 남기니 

3만원을 번 것이다. 

 


세종대왕님의 얼굴 3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나는 돈이라는 것에 묘한 느낌을 받았다.

겨우 종이 쪼까리일 뿐인데… 

그런데 이 종이마다 번호가 있지.

내 주민등록번호처럼.



 

겨우 이 푸른 종이 때문에 인생이 좌지우지..

그런데 사람 얼굴도 박혀 있고 등록번호도 있으니..

사람이나 마찬가지네…  사람보다 영향력이 커. 

 



3만원 벌기가 그렇게 힘든 것이었다. 


당장 발에 번지던 무좀이 너무 고통스러워 그 돈으로 피부과를 달려 갈까..

은행에 넣어서 3원이라도 이자를 받아야 하나.. 

그냥 방향제를 몇 개라도 더 쟁여놓는게 현명한 건가..

아니야… 이 폭염에 얼굴은 점점 타고.. 빈혈도 어때 심해지는 것 같은데..

썬크림을 더 사 놓을까? 철분제 사는데 돈을 보태야 하나… 고민이 깊었다. 



사실 폭염에 길거리를 방황하며 휘청거린 게 한두번이 아니길 했다. 


마음 같아선 시원한 카페에 가서 먹고 싶은 얼음 동동한 커피와 달달한 와플을 

마구마구 사 먹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돈이라는 것에 대해 

나만의 형언할 수 없는 정의를 내려보고자 애를 썼다. 


 

문득 나의 스승님이 알려준 구절이 하나 생각났다. 

 

돈은 순환지리로 생겨 쓰는 것이지 억지로 취하여 쓸 것은 못된다.’ 

 


돈에도 눈이 달려있다. ‘ 


 

나는 그 날 3만원을 들고 

돈까스 식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른 점심으로 만 원짜리 돈까스를 배부르게 시켜 먹었다.


잠시 행복해졌다. 



 

그리고 남은 이만원으로 돈까스를 한 개 더 주문하고 포장해 달라고 했다. 

 



사장님. 소스는 따로 담아주세요.”

 




나는 편의점에 가서 착하게 생긴 알바생에게 돈까스를 줬다. 


음료를 받을 때 그 알바생의 손에 삼각김밥이 들려 있었다. 


알바생은 너무 놀라워하며 고마워했다. 

 

그리고 어차피 손님도 별로 없으니 

같이 얘기나 나누고 놀기로 한다. 

 



플라스틱 테이블 아래 앉아 

알바생은 돈까스를 먹고

나는 남은 돈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계산 한 뒤 시원하게 들이켰다. 


그 알바생은 나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였다. 


이제 겨우 19살. 


 

왜 대낮에 학교에 안 가고 알바를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 알바생도 집이 논현동이었는데 자기가 아는 돈 많은 사장님들 있는 곳을 

알려준다고 한다. 


나는 그 친구에게 고급 갤러리 한군데와 

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분의 와이프가 운영하는 비싼 레스토랑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고급 갤러리는 이 친구가 미대 진학을 원했기에 알고 있던 정보였고 

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분의 와이프가 운영하는 비싼 레스토랑은

자기가 예전에 잠깐 알바 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 후 –  나는 꼬박꼬박 방향제를 관리하고 리필 해주러 가는 곳들이 

여럿 생겼다. 수입이 크진 않았지만 중요한 생활비였다. 

3만원에서 2만원은 돈까스를 사고 천원은 아이스커피. 

남은 돈 9천원은 지갑에 넣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함께 사는 

언니와 먹을 저녁거리를 사기로 한다. 




계란 한판은 오랫동안 먹을 수 있고 된장도 늘상 없으면 안 되고 

또한 오래 먹을 수 있는 식자재이니 

그 두개를 살 꺼야!’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돈은 순환지리로 생겨 쓰는 것이다.

돈에도 눈이 달려 있다.’ 

 

 

 

작지만 깊은 사건. 

 

그 후 나는 방향제 영업을 줄이게 되었다. 

 

한 학기 휴학했던 학교에 다시 복귀를 했고 

 

영화’를 전공했던 나는 

 

학교에서 단편영화를 찍고 학교 앞 식당에서 알바를 하며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졸업작품을 준비하던 

대학 4년째부터 

 

부천에 회사를 두고 있는 

외주제작 애니메이션 프러덕션과 계약을 했다. 

 



비록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초짜 작가였지만 

MBC에 방영되던 유아교육용 애니메이션의 

메인 시나리오 작가였다. 

 



나는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기에 

마냥 즐거운 작업인 줄 알았으나 

매번 수정요청에 따라 원고를 수정하는 일은 정말 머리를 싸매고 

피터지는 일이었다. 

원고료는 적었으나 큰 경력이었고 

내가 쓴 시나리오 그대로 만화가 제작되어 티비에서 방영되니 그 기쁨은 

설명하기 힘들만큼 벅차고 자존감마저 쑥쑥 올라갔다. 

 



그 힘에 탄력을 받아 

나는 졸업하기도 전에 

강의계획서를 쓰고 

그동안 대학에서 찍은 단편영화를 편집해서 영상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그리고 지원서를 제출하여 

 


서울에서 한때 진행되었던 ‘찾아가는 평생학습교육’의 강사가 되었다. 

 


저 멀리 경기도로 , 서울 어딘가로 출장 강의를 나가서 

동네아파트 도서관에서 ‘영상제작’  혹은 ‘단편영화제작’ 에 관한 강의를 했다. 

 


인생 많이 살아보고 나보다 더 학벌좋은 학부모들 혹은 동호회 성인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려니 매번 진땀이 나고 나의 부족한 상식과 지식에 얼굴이 낯뜨거워질 때도 있었으나 

이렇게 또 발에 땀나게 2시간의 이동거리를 소화하며 다닌 경험은 

이 후의 나의 경력과 수입과 사업과 인생에 아주 큰큰한 기반이 되었다. 

 



그 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기간제 공무원에 지원을 했고 

서울의 구청에서 ‘홍보과’ 프로듀서로 일했다. 

 



계약의 형태는 매년 계약 갱신 후 5년이 지나면 재입사하는 것이었는데 

나보다 앞서 그 형태로 들어와 공무원이 된 선배는 20년이 넘에 

홍보과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었다. 


나름 팀장,부장님, 구청장에게도 성과를 인정받고 이쁨받던 입장이라 

나 또한 20년 공무원의 길을 걷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1년정도 ‘공무원’의 삶을 살다가 

이 길이 아니라는 판단 하에 사직요청을 했다. 

 


아직 한참 어린 부서의 막내가 1년 겨우 일하고 그만 둔다니 

선배들의 입장에선 뭐 이런 모험심 가득한 애가 있나.. 했겠지만 

 

내 인생의 중년까지 그곳에서 일한다면 

나 또한 우리 팀장,부장님의 무표정하고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렇게 살기 싫었다. 

 


나는 공무원의 울타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지금 – 


 

2023년 현재.

 

나는 비우포트 섬에  5년째 살고 있다. 

 

                                                  

 


이전 06화 2.지옥도(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