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숙 계란
소식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마음의 허기가 위장을 자극하는 걸 느낀다.
양심의 가책상 좋아하는 감자튀김을 자정 12시에 시켜 먹을 수 없기에
냉장고의 문을 열어 동글동글한 계란 3알을 꺼낸다.
탁- 치이익!
기름 위 계란이 뽀얀 형태를 드러낸다.
'세상에..지금 시간이 몇시야?'
자정을 앞 둔 시계의 분침이 분주하다.
'째깍. 째깍. 째깍.'
뭐가 그리 정확하고 바쁘니?
제 할일 하며 달려가고 있는 시계한테
한 마디 톡- 쏘듯이 묻고 싶지만,
문득.. 나 또한 얼마나 여유가 있나 하는 생각에
시계를 향한 날카로운 눈빛을 거둬들인다.
나이가 들어서 일까? 경험이 늘어서 일까?
좋고 싫음이 분명해지고, 옳고 그름이 흐릿해진다.
한 편으론
늙은 홍시처럼 스쳐오는 눈빛 하나에 마음이 물컹거리고
다른 한 편으론
마른 하늘의 벼락처럼 조용하게 서슬퍼렇다.
문득 이성을 볼 때 절대 거둬들일 수 없는 투명한 시멘트 벽이
차곡차곡 쌓여간다는 기분이 든다.
그때의 심정은 딱 이 문장으로 쓸 수 있다.
'아! 정 떨어져.'
누군가를 몰래몰래 미워하다가도,
작은 호의 하나에, 가벼운 친절 하나에
만리장성 같은 벽은 모래성이 된다.
푸스스... 바람에 날아간다.
그러나, 이성에 관한 기준 만큼은,
마음의 다부진 자리 하나 만큼은,
조선시대 열녀비를 받은 어느 전설 속
양반집 'OO 아씨'처럼 완고하고 단단하다.
그래. 나는 그런 면이 있지.
열녀비를 받을 법한 N아씨는 몰래 가슴에 은장도를 품는다.
하늘거리는 봄바람 벚꽃잎 속에
몽글몽글 애정이 피어나다가도 ..
찰나에 뚝! 하고 끊어내게 만드는 것.
그것은 바로... 상대가 보이는 '헤픈' 분위기이다.
하나를 쥐고, 다른 것을 궁금해하는 남자.
“난 널 좋아해. 근데, 저 여자는 누구지?”
다른 가능성에 마음의 문이 열려있는 남자.
호기심 많고,
대화에 능하고,
모두에게 친절할 수 있는 능력의 보유자.
좋아. 다 좋아!
그런데...
확정되지 않은 표, 무기한 보관 중인 택배,
여전히 '읽씹' 상태의 메시지 같은 존재.
단박에 받지 않는 부재중 전화 같은 존재.
나는 그런 남자 앞에 서면
나 자신을 자꾸만 확대해서 보여주고 싶어진다.
더 반짝이게, 더 특별하게.
조금 더 “이 여자는 다르네” 소리 듣게.
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한 편의 오디션과 같은 것.
사실, 나는 무대체질이다.
하지만,
나를 오디션 무대에 세우는 그런 남자는
한마디로 — 정. 뚝. 떨.
나는 객관적인 수치로 따지는 경쟁을 좋아한다.
그러나, 주관적인 감정을 뺏기고 혹은 빼앗아오는 경쟁은 거절한다.
사랑을 경쟁으로 만드는 남자.
단숨에 정이 떨어진다.
“즐겁고, 편안하고, 바쁜 그대는 좋아.
나만 바라보지 않아도 좋아!
다만,
나를 손에 쥐고 다른 걸 궁금해한다면…
음,
이쯤에서 꺼져줄래?”
나는 반숙 계란을 좋아한다.
혼연일체의 수준으로!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아.
나도 말야..
그 누구에게도 질리지 않을 거야.
결단코.. 나 자신에게 조차!
그래서
계란을 반숙도 완숙도 아닌 상태로 놔두고 있어.
다른 맛을 궁금해하지 않는 진짜 나만의 사람을 위해.
. 끝.